[Why] 인왕산 정적 깬 컹! 컹! 컹!.. 마취총 쥔 엽사 "그놈이 왔다"

표태준 기자 2017. 4. 2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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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까지 출몰하는 야생 들개 포획 현장 따라가보니
유기견이 들개로.. 서울에 152마리 야산 서식, 주택가 주민 습격하기도
4~10마리씩 몰려다녀.. 사람이 못들어가는걸 알고 청와대 경비구역으로 도망
포획되면 20일간만 '보호'.. 입양 안 되면 안락사, 동물보호단체들은 반대

19일 오후 3시 40분쯤 서울 종로구 인왕산 황학정 인근 산기슭. "컹! 컹! 컹"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1시간 동안 미동 없이 앉아있던 엽사(獵師) 방기정(65)씨가 엉덩이를 뗐다. "그놈 소리네. 움직입시다." 그는 길이 1m쯤 되는 마취총을 들고 소리 나는 인왕산공원 쪽으로 잰걸음을 했다. 200m쯤 걸었을까, 들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엽사는 몸을 낮추고 장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방씨는 서울 은평구·종로구·성동구가 고용한 야생동물 포획 전문가다. 이 3개 구에선 최근 들개가 자주 출몰하고 있다. 방씨는 한 달 세 차례 이 지역으로 출동한다. 작년 한 해에만 50마리 넘는 들개를 포획했다. 그중에는 작년 11월 인왕산에서 잡은 흰색 우두머리 들개도 있었다. 진돗개와 일본 토종견 아키타 교잡종으로 몸무게 30㎏, 길이 1m나 됐다. 방씨가 '그놈'이라고 한 건 그 우두머리 들개 부하였던 검은색 들개였다. 방씨는 "들개는 보통 4~10마리 안팎이 몰려다니는데 우두머리가 잡히면 새 대장이 생길 때까지 흩어진다"며 "인왕산 들개들이 검은색 들개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들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을 때 방씨가 길을 막았다. "더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인왕산 청와대 경비구역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날 방씨의 포획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방씨는 이날 오후 2시쯤 인왕산 황학정 부근에 1.2t 트럭에 야생동물 포획틀을 싣고 나타났다. 들개를 유인하는 데 쓸 고등어 통조림 한 통과 마취총 한 자루도 있었다. 그는 "마취총 맞은 들개는 쓰러지기까지 20~30분 걸리는데, 그때까지 전속력으로 도망가기 때문에 쫓아가려면 들고 가는 짐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했다.

들개한테 실제 총을 쏘지 못하는 이유는 현행법상 들개가 야생동물이 아닌 유기 동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유기 동물을 잡을 때는 총포나 덫 대신 다치지 않도록 포획틀 또는 마취총만 사용할 수 있다. 서울시는 수년 전부터 환경부에 "야생화 된 개들을 유해 동물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환경부는 "유기견이 멧돼지처럼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들고양이처럼 생태계를 해친다는 보고는 없다"는 입장이다. 방씨는 "뭘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현재 서울시 들개는 2000년대 중반 구파발이나 난곡 같은 산동네 주택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버려진 유기견들 후손이 대부분"이라며 "몇 세대에 걸쳐 야생에서 자랐기 때문에 야생동물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방씨는 작년 6월 서울 서대문구 안산에서 잡았던 검은색 그레이트데인을 잡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몸무게 50㎏에 키 80㎝, 몸길이 1m가 훌쩍 넘는 초대형견이었어요. 작년 초부터 등산객들을 위협해서 서대문소방서 직원들이 출동했는데도 사나워서 못 잡았지요. 네 차례 추적 끝에 20m 거리에서 딱 마주쳤고 마취총 쏴서 명중했는데,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마취가 잘 안 돼서 100여 m 도망친 걸 쫓아가 잡았어요."

서울 북한산국립공원 약수터 인근에 나타난 들개 한 마리(사진 왼쪽). 야생동물포획전문가 방기정씨가 지난 19일 오후 서울 인왕산 황학정 인근에서 마취총이 든 가죽 케이스를 들고 들개 수색을 하고 있다. 작년 서울시가 포획한 들개는 115마리였다. / 서울시·장련성 객원기자

들개는 등산객이 버리고 간 음식뿐만 아니라 무리를 지어 고라니와 꿩 같은 야생동물을 사냥해 먹는다.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음식물 쓰레기를 찾아 주택가와 공원에 내려와 주민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지난달 20일 서울 불광 1동 주택가에선 몸길이 1m 들개가 경찰관 2명의 손을 물고 달아났다. 작년 12월에는 서울 관악구 낙성대공원을 산책하던 70대 할머니가 새끼를 데리고 있던 어미 들개에게 오른쪽 발목을 물렸다. 서울시는 올 1월 기준으로 들개 152마리가 도심 야산 등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방씨는 이날 인왕산에 도착하자마자 들개 목격 신고가 가장 많이 들어온 감투바위에 갔다. 주변 지형을 훑어보던 방씨가 "개들이 여기 머무른 지 1시간도 안 됐다"고 했다. 흙 위에 가로·세로 50㎝ 길이의 성견 한 마리가 앉아있던 자국이 있었다. 바로 옆에는 들개가 오줌을 누고 흙으로 덮은 흔적도 있었다. 방씨는 이후 20여 분간 들개 흔적을 찾아다니다 인왕산 테니스장 아래 개울가에 다다랐다. 그는 "들개 은신처가 확실하다"고 했다. 개울가 주변에는 들개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 치운 흔적이 보였다. 그때부터 방씨는 개울가에서 20여 m 떨어진 수풀 속에 자리를 잡았다. 1시간여 만에 들개 짖는 소리를 듣고 접근했으나 방아쇠를 당기는 데는 실패했다.

작년 8월 방씨는 들개를 잡으러 청와대 경비구역 안에 들어갔다가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아 경찰 조사를 받았다. 방씨는 "들개들이 우리가 다가오는 걸 알고 청와대 경비구역 안으로 도망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들개는 머리가 좋아 작년 황학정에서 우두머리 개가 잡힌 걸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며 "학습을 통해 청와대 경비구역에 사람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방씨는 들개 1마리를 포획할 때마다 각 자치구로부터 50만원씩 받는다.

포획된 들개는 각 자치구 동물보호센터에서 20일간 보호된다. 입양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야생화 된 성견을 데려가는 사람은 드물다. 작년 서울시가 포획한 115마리 들개 중 입양된 개는 새끼 31마리를 포함해 49마리였다. 입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로 생을 마친다.

동물단체에선 들개 안락사에 반대하고 있다. 윤정임 동물자유연대 국장은 "들개 안락사는 비인도적이고 일시적인 대책"이라며 "잡은 들개를 중성화시켜 다시 놔주거나,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오지 않게 사료를 공급하는 등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유기견을 보호하는 일명 '도그맘'들은 산속에서 발견한 들개 새끼들을 중성화하거나 먹이를 주고 가기도 한다. 지난달 성동구에는 "내가 돌보고 있는 들개니까 잡지 말아달라"는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반면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들은 들개들이 고양이를 물어 죽인다며 포획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방씨는 오후 4시쯤 "오늘은 글렀다"며 청와대 경비구역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때 다시 어디선가 "컹!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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