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

이영욱 2017. 4. 2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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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접어달라 조르던 애들, 요즘엔 일자리 만들어 달래요
김영만 원장은 항상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어울린다. 색종이 왕관을 쓴 그는 아이들을 위해 색종이 모빌을 접어보였다.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 천진난만한 그의 모습에서 `영원한 어린이`로 불리길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주형 기자]
"오늘은 또 어떤 코딱지가 날 찾아왔나요?" 인터뷰 장소인 서울 중구 장충동 종이문화재단에 들어서자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66)이 반갑게 웃으며 맞아줬다. 기자를 포함해 1980~1990년대 유아기를 보낸 세대에게 그는 어린이 TV프로그램 속 종이접기 아저씨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손을 거치면 색종이와 종이컵, 휴지심, 우유팩, 빨대 등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재들이 도깨비, 공룡, 왕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아이들은 아침시간 색종이를 가지고 TV 앞으로 모여들었고 아저씨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나하나 따라하면서 종이접기를 배웠다. 한동안 방송에서 보기 힘들었던 그는 지난해 MBC 마이리틀텔레비전(마리텔)에 출연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코딱지라는 말은 여전히 쓰시네요.

▷ 6~7세 아이들에게 종이접기를 가르치려면요 먼저 '자 여기 보세요' 해서 주목을 끌어요. 그리고 다 같이 동요를 부르죠. 그다음 색종이를 세모로 한 번 접어줘요. 뭔가를 만들려면 이렇게 접기를 여러 번 해야 하는데 다음 과정을 설명하려고 하면 아이들은 이미 다들 다른 짓을 하고 있어요. 오래 집중을 못하거든요. 그래서 '코딱지'로 불러보기로 한 거죠.

― 코딱지라는 말에 집중을 한다고요?

▷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엉덩이, 쭈쭈 이런 말이에요(웃음). '코딱지들아~' 이렇게 부르니까 아이들이 주목을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코딱지라는 말을 쓰게 됐는데 어린이 TV프로그램에서 처음 사용한 후로 계속 써왔죠. 그거 아세요? 요즘 '코딱지들아~' 하고 부르면 아이들은 '내가 왜 코딱지예요' 이러거든요.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게 불러주면 오히려 박수를 치면서 웃어요. 아이들보다 더 좋아한다니까요.

김 원장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자신과 종이접기 추억을 공유한 세대를 모두 다 코딱지라고 불러준다. 그는 지난해 방송 출연에서 '코딱지들아' 하고 시청자를 불러줬을 때 나온 열광적인 반응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종이접기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는 '아저씨가 금방 만들어서 코딱지들에게 보여줄게요'라며 단 몇 분 만에 멋진 왕관을 만들었고 한 송이 색종이 꽃을 피워냈다.

― 종이접기를 하실 때 표정이 어린아이 같습니다.

▷ 하하 그런가요? 영원한 어린이라는 말을 듣는 게 참 좋습니다. 예전과 같다는 이야기요. 아무래도 제가 아이들과 계속 어울리는 직업이다보니 더 그렇지 않을까요? 이렇게 왕관과 꽃을 금방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이 일을 30년 가까이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거 아니에요.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 프로 속 종이접기 아저씨는 어느새 60대에 접어들었다.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손은 더 거칠어졌고 얼굴엔 주름이 늘어났다. 직접 만든 색종이 왕관을 머리에 쓰고 색종이 꽃을 손에 든 채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자 왜 그가 영원한 어린아이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방송을 진행한 만큼 김 원장에겐 유행어가 여럿 있다. '손톱만큼 접어요' '자 다 만들었나요 친구들?' '이런 게 두 개 있어야 해요. 아저씨는 그래서 미리 더 만들어 왔어요' 등이다.

― '아저씨는 미리 더 만들어왔어요'라고 하셨을 때 솔직히 좌절했습니다.

▷ 아이들이 ㎝라는 단위를 언제 배우는지 아세요? 초등학교 3학년 때예요. 6~7세 아이들은 이걸 몰라요. 그래서 손톱만큼 접으라는 말을 한 겁니다. 미리 하나 더 만들어온 거는 '5분'이라는 방송시간 때문이었어요.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작을 보여줘야 하다 보니 불가피했거든요. 이해해주세요(웃음).

― 종이접기를 오래해 오셨는데 생각 나는 일화가 있나요?

▷ 최근에 군인 가족들이 모인 행사에 재능기부를 갔다가 대령 한 분을 만났어요. 내 팬이었더군요. 어릴 때 색종이도 구할 수 없는 시골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신문지를 색종이 크기로 오려 매일 아침 제 방송을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종이컵을 들고나와서 뭘 만들길래 펑펑 울었대요. 자기가 사는 시골에선 종이컵을 구경할 수도 없었던 거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참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한때 강아지를 접어달라고 하던 코딱지들이 요즘은 '아저씨, 일자리 좀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연락을 해와요. 요즘 코딱지들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프죠.

김 원장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소품들로 작품을 만든다.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 인형 눈도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 색종이, 휴지심, 빨대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만 사용한다. 종이접기를 언제든 쉽게 따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구하기 어렵다 싶은 것은 일부러 모두 제외했다.

김 원장이 처음부터 종이접기 아저씨였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 그의 꿈은 화가였다. 서울예고에서 순수 미술을 공부한 김 원장은 대학에선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다. 관련 전공을 살려 대기업 그래픽디자이너로 5~6년을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종이접기의 길에 접어든 것은 우연히 가게 된 일본에서였다.

― 일본을 다녀오신 뒤로 종이접기를 시작하셨죠?

▷ 대기업을 다니다 개인 사업을 해보고 싶어 뛰쳐나왔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잘 안됐습니다. 사업이라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많이 힘들었어요. 머릿속이 복잡해 생각도 정리할 겸 일본에 잠깐 쉬러 갔는데 거기서 일본 유치원 아이들이 종이접기를 배우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문득 '아! 그래 종이접기를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도 가르쳐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 당시 우리나라엔 종이접기 교육이 없었습니까?

▷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선 배, 비행기, 동서남북 이런 단순한 종이접기는 알려져 있었지만 종이접기 '책'은 없었어요. 잘 짜인 커리큘럼 없이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거죠. 그러다보니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교육도 없었죠. 가령 어른들이 유치원생인 7세 어린이들에게 종이배 접기를 가르친 거예요. 종이배 접기가 쉬울 것 같죠? 종이배는 초등학교 4학년에게 적합한 난이도예요. 유치원생에겐 무리입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던 종이접기 교육을 체계화하고 싶었어요.

종이접기에 '푹 빠진' 김 원장은 1983년 만사를 제쳐놓고 종이접기 교육의 보급에 뛰어들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던 그에게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김 원장은 "아버지께서 딱 1년만 생활비를 보태주겠다고 하셨기에 1년 안에 결판을 보려 이를 악물고 도전했다"며 "집에 틀어박혀 커리큘럼 제작과 종이접기 연구를 반복했다"고 회상했다. 발이 부르트도록 여러 유치원을 돌며 종이접기 강의도 진행했다.

뚝심 있는 그의 노력에 김 원장의 종이접기 수업은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드디어 길이 열렸다. 종이접기에 매진한 지 1년 만인 1984년 사립 유석초등학교에 미술교사로 취직이 된 것. 안정된 직장이 생기자 김 원장은 비로소 종이접기에 매진할 수 있었다. 당시 학교 미술수업은 주 5일 회화에만 집중돼 있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주 3회 종이접기 수업을 시도했다.

영원한 어린이라는 말 좋아…이빨 다 빠질때까지 할거예요

김영만 원장이 동물 모양으로 만든 종이접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한주형 기자]
― 방송에 처음 출연하신 것도 그 즈음이죠?

▷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이후 '종이접기 김영만 아저씨'로 알려졌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KBS에서 'TV유치원 하나둘셋'이란 어린이 프로그램을 만들 건데 종이접기 선생님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일주일치 방송분을 몰아서 녹화했는데 '펑크(결방)'가 나지 않게 전력을 다했죠. 혼자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코딱지들이 항상 옆에서 저를 응원하면서 밀어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방송에 처음 출연한 이후 20년, 30년 시간이 흘렀다. 김 원장은 'TV유치원 하나둘셋'에 이어 후속 프로그램인 '혼자서도 잘해요'가 종영할 때까지 꾸준히 코딱지들을 만났다. 지상파 정규방송 외에도 대교방송 '김영만의 미술나라'와 EBS 특집프로그램 등에도 얼굴을 비쳤다. 김 원장도, 코딱지들도 모두 나이가 들면서 김 원장은 한동안 코딱지들의 기억에서 잊혔다가 지난해 마리텔 출연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오랜 세월 출연하신 걸 보면 방송이 천직이신 것 같습니다.

▷ 처음 시작할 땐 많이 힘들었어요. 게다가 제 나이 서른아홉에 방송에 처음 나간 거였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젊은 MC들이 나와서 진행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마흔이 다 된 아저씨가 나온다는데 얼마나 가겠나' 이런 반응을 보였어요. 심지어 학교 동창들에게 '미술을 전공하고 고작 종이접기를 하느냐'는 힐난도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지만요(웃음).

― 30년간 1만개의 종이접기를 창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세 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 정도 되지 않을까요(웃음). 맨 처음 접었던 게 도깨비였을 거예요. '춤추는 도깨비'였던가? 그게 1호 작품일 겁니다. 아이들이 도깨비를 좋아하거든요. 뱀, 악어, 코끼리 등 동물은 거의 다 접은 것 같고. 마리텔에 출연했을 땐 스마트폰 케이스, 스마트워치, 스냅백을 만들어달라는 즉석 요청이 있어서 만들어봤습니다. 1만개라지만 방송에서 보여준 건 3분의 1밖에 안돼요. 나머지는 아이들이 따라하기엔 좀 난이도가 있어서요. 이런 건 대학 강의 등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만드신 작품은 집에 보관하시나요?

▷ 아쉽게도 그렇진 않아요. 그 많은 작품을 둘 공간이 없거든요. 대신 그림으로 다 그려서 가지고 있습니다. 접었던 작품들, 갑자기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들은 모두 대학노트에 그려서 정리해뒀는데 스물댓 권 정도 될 거예요. 대학노트는 제 보물 1호입니다. 가족이 2호, 코딱지들은 3호예요.

― 그 많은 아이디어는 다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 저희 집엔 모든 방마다 색종이가 있어요. 심지어 화장실에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색종이를 접으려고 손이 닿는 모든 공간에 둔 거죠. 제 차에도 색종이가 있습니다. 운전 중에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색종이를 접어요. 요즘은 2시간 강의 요청을 받아도 커리큘럼을 안 가져가요. 이미 다 머릿속에 들어 있거든요.

물론 방송에 처음 나갔을 땐 전혀 달랐죠. 당장 내일 녹화인데 뭘 접어야 할지 생각이 안 나서 처음 2년은 애를 먹었어요. 결국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병원도 다녀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우울증을 극복하려면 우선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비워야겠단 생각에 국내 곳곳 여행도 다녔죠. 결국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방송 출연 3년째 접어들자 아이디어 고민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졌습니다. 한땐 방송국에서 아이디어 고민에 머리를 싸매고 있으면 PD가 와서 '1년 전에 했던 거 그냥 하시죠' 이렇게 권한 적도 있어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스스로와 한 약속이 하나 있거든요. 방송에서 아이들에게 같은 종이접기를 두 번 보여주지 않겠다고. 만약 같은 걸 보여주게 된다면 방송에서 손을 떼겠다고요. 앞으로도 그 약속은 꼭 지킬 겁니다.

― 취직, 결혼 등 요즘 코딱지들은 고민이 많습니다.

▷ 대학교 땐 취직이 가장 큰 걱정이었어요. 1학년부터 군대 제대 후 졸업할 때까지 어떤 직장에 가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잘 이루고 잘 살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지금처럼 모든 청춘들의 고민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어렵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 했으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죠.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일단 부딪쳐보라는 거예요. 진정한 스펙은 경험이거든요. 과감히 쏟아지는 빗속을 헤치고 나가서 맑은 해를 봐야 해요.

어린이 프로를 보고 자란 코딱지들은 부모님이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고 자랐을 겁니다. IMF를 겪으며 부모님이 실직하고 집안이 어려워지기도 했겠죠.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방송에서 '여러분 틀려도 괜찮아요. 예전엔 아이였지만 지금은 어른이니 잘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했더니 채팅창이 ㅠㅠ(우는 표정을 나타낸 이모티콘)로 도배가 되더군요. 사실 종이접기를 따라하면서 틀려도 괜찮다는 격려였는데 취업난 등에 시달려온 코딱지들에게 그 말이 다른 의미로 마음에 와닿았던 모양입니다.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그만 울어요' 이랬더니 '고맙습니다'란 말이 계속 올라왔어요. 그때의 기억이 오래 남습니다.

― 마지막으로 향후 어떤 계획이 있는지 살짝 소개해주신다면?

▷ 제가 좋아하는 종이접기를 30년 가까이 해올 수 있었던 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초청받아 가는 것보단 스스로 찾아가는 재능기부를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이빨이 다 빠질 때까지 다닐 거예요. 그만큼 종이접기를 좋아하니까요. 영원한 현역, '코딱지들의 종이접기 아저씨'로 남고 싶어요.

■ 김영만 원장은

어릴 적 꿈은 화가로 서울예고에서 순수 미술을 공부했으며 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다. 대기업 그래픽디자이너로 근무하다가 1984년 유석초등학교에 미술교사로 취직했다. 1988년 KBS에서 방영된 어린이프로그램 'TV유치원 하나둘셋'에 출연해 종이접기를 선보이며 '종이접기 아저씨'가 됐다. 현재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으로 종이접기의 즐거움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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