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 모은 씨앗 대출해주고 수확하면 반납 받지요"

김보근 2017. 4. 1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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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개관 2년’ 홍성씨앗도서관 오도 대표

홍성씨앗도서관 대표 오도씨.

이쁜이강낭콩, 선비잡이콩, 반짝이녹두, 흰까치콩, 까투리찰벼, 쇠뿔가지, 검은여늬강낭콩, 노란쥐이빨옥수수, 호랑이울타리콩, 각시동부, 파란밤콩, 쪼그리아욱….

충남 홍성군 홍동면 운월리에 자리잡은 ‘홍성씨앗도서관’(www.hs-seed.com)에 들어서면 낯설면서도 예쁜 이름을 가진 각종 씨앗들이 손님들을 반긴다. 씨앗을 담은 병 옆에는 깊은 주름이 팬 할머니 사진들이 놓여 있다. 바로 그 씨앗들을 채집한 주인들이다.

도서관에서는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농사를 짓는 회원분들과 다른 지역이라도 홍성씨앗도서관의 회원이 되신 분들에게 이 씨앗들을 한 해 동안 ‘대출’해주고 이듬해 그만큼의 씨앗을 ‘반납’받는다. 하지만 이 특별한 도서관에서 대출해주는 것은 단지 씨앗만이 아니다. 씨앗들을 채집한 할머니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토종’과 ‘연대’, ‘전통’에 대한 소망도 함께 나누어준다. 홍성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생태농업 전공부 농업교사이기도 한 이 도서관의 오도 대표를 지난달 26일 도서관에서 만났다.

이쁜이강낭콩·각시동부·쪼그리아욱…
할머니들 씨앗보존 이야기 들으며
토종 종자도 얻는 씨앗마실 4년째
개관 3년째 두배 늘어난 150종 모아

풀무학교 졸업뒤 모교 농업교사로
“할머니들 떠나면 씨앗도 사라져”

“씨앗마다 다 사연이 있어요. 18살에 시집올 때부터 씨앗을 보존해온 올해 82살 할머니에게 ‘왜 그렇게 오래 씨앗을 챙기셨느냐’고 물었어요. 할머니는 ‘친정아버지께서 결혼할 때 챙겨주신 씨앗을 잃어버리면 친정과의 인연이 끊어질 것 같기 때문’이라고 답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시집온 할머니에게 그 씨앗은 그냥 씨앗이 아니라 고향과 친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던 거죠.”

씨앗과 관련해서는 오 대표도 사연이 깊다. 홍성에서 나고 자란 그 자신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할머니가 꼭 그렇게 씨앗을 소중히 간직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농사일도 씨앗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소작농을 하시던 아버지가 1976년 관행농에서 유기농업으로 바꾼 뒤부터는 오 대표를 포함한 4남매가 새벽 4시면 논밭으로 나가야 했다. 소작농에게 배정된 밭이기에 골라내야 할 돌도 많았고, 유기농을 처음 시작한 탓에 뽑아야 할 풀도 많았다. 논밭에서 풀을 뽑다 날이 밝으면 어머니가 밭으로 가져온 아침을 먹고 4㎞ 떨어진 학교에 걸어서 갔다.

그 뒤로도 오 대표의 삶은 농사와 꽃, 씨앗과 이어져 있다. 홍동마을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1993~95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일본 게이센여학원 단기대학 원예생활학과에 다니면서 화단설계를 배웠다. 시골에서 집과 학교만 오가며 지내다가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많이 있구나” 하고 느끼던 시기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제주 여미지식물원과 충남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면서 꽃과 나무를 돌보는 생활을 이어갔다.

오 대표가 본격적으로 다시 씨앗과 관련을 맺은 것은 2003년 풀무학교에 돌아오면서부터다. 그는 풀무학교에서 농업대학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천리포수목원 생활을 정리하고 모교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유기농 농사를 가르치면서 10년 동안 각종 씨앗을 받아내는 법도 익혔다.

처음에는 씨앗 받는 방법을 몰라 고생도 많았다. 농사는 천한 것이라는 생각에 농부들조차 씨앗 받는 일을 자식들에게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씨앗은 대개 종묘회사 것을 사서 심는 것이 돼버렸다. 그러나 종묘회사 씨앗은 병충해를 없애기 위해 살충제 처리를 하고 쉽게 눈에 띄도록 염색처리까지 한 것이었다. 그는 2006년도에 영국 오가닉 가든을 방문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씨앗을 받게 됐다. 그 경험을 <씨앗 받는 농사 매뉴얼-내가 직접 키운 작물, 내가 직접 받는 씨앗>(도서출판 들녘, 2013)에 오롯이 담았다.

2011년부터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지역에서 씨앗을 직접 받고 보급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공부하면서 씨앗도서관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첫걸음으로 2014년에 홍성씨앗도서관 준비위원회를 꾸려 ‘씨앗마실’ 활동을 시작했다. 씨앗마실은 10월 이후 농한기로 접어든 뒤 마을 할머니들을 찾아가 수십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지켜온 씨앗을 얻고 그 씨앗에 얽힌 이야기와 삶을 듣는 걸 말한다. 씨앗마실에는 풀무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함께했지만, 오 대표는 가능한 한 꼭 동행하려고 노력했다. 외지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홍성 토박이말을 그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서다.

이런 노력 끝에 홍성씨앗도서관은 2015년 2월28일 문을 열 수 있었다. 도서관 규모가 커지면서 일손도 크게 부족해졌지만, 가능하면 정부 지원금을 안 받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정부 지원금이 들어오는 순간, 마을 사람들이 일구어 만든 씨앗도서관 본연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다. 도서관 운영은 온전히 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 대표는 도서관 개관 이후에도 씨앗마실 등을 해오면서 도서관 씨앗을 개관 당시 80여종에서 150여종으로 늘렸다. 하지만 그 몇해 사이에도 수집할 수 있는 씨앗들이 크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그 할머니의 생과 함께 몇십년간 받아오던 토종 씨앗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는 다른 지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는 그간 홍성씨앗도서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씨앗도서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매뉴얼을 준비하고 있다. 그 매뉴얼이 민들레 홀씨처럼 전국에 씨앗도서관의 가치를 널리 알려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070-4351-3647.

홍성/글·사진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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