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통진의 농가에서 쓰다

2017. 4. 6.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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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여행
(2) 박제가와 그의 친구들
[한겨레]
본래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옮겨져 복원된 광통교(廣通橋)는 그대로 서울의 역사다.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심이었고 도성 안에서 가장 컸던 다리였다. 광통교 난간에 서서 돌짐승의 깨진 다리를 본다. 저것은 사자일까. 사진 신상웅
지난회 요약 오랜 시간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있다. 박제가(1750~1805)가 그렸다는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도 그랬다. 하지만 그림을 처음 접하고 20년 동안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대상을 그리는 기법, 화면을 지배하는 분위기도 그의 것이라고 하기 힘든 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 그림에 중국 화가 나빙(羅聘, 1733~99)의 필봉이 가미됐다는 주장을 접했다. 자세히 보게 된 <의모도>는 ‘읽는 그림’에 가까웠다. 의문의 실마리 역시 그림 안에 있으리라.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비로소 그림 <의모도>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어디일까. 남산순환도로를 내려와 필동주민센터 옆 빈터에 서서 지도를 본다.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 산자락 어딘가에 십대의 박제가가 살던 집이 있었다. 어느 봄날,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는 냇가를 따라 걸어가던 한 청년에게 눈길이 머문다. 이마가 훤칠하고 낯빛이 환한 남자였다. 흰 겹옷에 초록 허리띠를 두른 청년도 그를 쳐다봤다. 그가 박제가라는 것을 이덕무는 한눈에 알아봤다. 둘은 만나자마자 마음이 통했다.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박제가가 문집을 만들자 책의 서문에, ‘박제가의 시는 담백하고 시원스러운 것이 그 사람과 꼭 닮았다’고 책만 보는 서생 이덕무는 적었다. 이제는 어느 땅속을 흐르고 있는지 알 길 없는 그 냇가가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자리였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계곡을 따라 저 아래 청계천으로 갔다.

# 광통교와 박제가, 이덕무

본래의 자리에서 서쪽으로 옮겨져 복원된 광통교(廣通橋)는 그대로 서울의 역사다.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심이었고 도성 안에서 가장 컸던 다리였다. 그러나 시절은 늙은 돌다리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1910년 도로 밑에 묻혀 수십년 오물 냄새를 맡다 2005년 청계천 복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광통교 아래로 내려간다. 광통교는 내겐 작은 야외 조각 전시장이기도 하다.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 새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바닥에 쌓인 모래를 걷어내고는 그 사실을 애써 새긴 글이 지금도 기둥에 선명하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바로 광통교 일대였다. 다리 주변엔 그림을 팔던 가게도 있었다고 전한다. 바야흐로 양반들끼리 방안에서 감상하던 그림들이 시장으로 나와 상품이 되기 시작했다. 박제가의 친구들도 이 다리로 자주 몰려와 술을 마시고 달빛에 젖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 속에 사라진 개를 부르던 술에 취한 모범생 이덕무가 있었고 거위를 희롱하던 유득공이 있었다. 무얼 하든 그들은 좀 유별나 보였다.

박제가가 그렸다는 ‘의모도’
그의 발자취 따라 나선 길 광통교와 탑골공원의 백탑
박제도 이덕무...친구들 함께 북경서 온 박제가 집필에 몰두
세상 지식 모인 곳서 무엇 느꼈나

광통교 난간에 서서 돌짐승의 깨진 다리를 본다. 저것은 사자일까. 박제가는 <의모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는 정성공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생토록 우정을 나눴던 이덕무의 글에는 정성공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정성공이 군대를 이끌고 청나라가 점령한 도시를 공격한 일과 이후 대만을 점거한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그곳에 정권을 세우게 된 사실도 적었다. 박제가도 이런저런 책을 보았고 어디서든 정성공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모두 그가 격렬하게 싸우던 전성기에 해당하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의모도>는 그런 것들과는 동떨어진 그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는 백탑이란 아리따운 이름보다 검정색에 가까운 처량한 모습으로 유리 안에 갇혀있지만 내 눈엔 여전히 빛나는 ‘백탑’이다. 백탑파(실학파)가 남긴 글도 글이려니와 그들의 행위 속에는 어떤 진솔한 떨림이 있었다. 사진 신상웅

# 백탑을 두고 어울린 그들

박제가가 자주 어울렸던 사람들, 흔히 실학파라 불리는 그들을 나는 백탑파라 부르기를 선호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내 눈엔 가장 그들다워 보였다. 오늘처럼 광통교를 지나 이곳 탑골공원에 이르면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변화의 물결에 누구보다 먼저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 중에 박제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저 백탑을 가운데 두고 먹고 쓰고 마시고 뒹굴었다. 이제는 백탑이란 아리따운 이름보다 검정색에 가까운 처량한 모습으로 유리 안에 갇혀있지만 내 눈엔 여전히 빛나는 ‘백탑’이다. 그들이 남긴 글도 글이려니와 그들의 행위 속에는 어떤 진솔한 떨림이 있었다. 그게 나를 매료시켰다. 서로 간에 나이를 잊은 사귐을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했다. ‘나이는 잊자.’ 그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에 살아온 시간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파도 상관없었다. 2백 수십 년 전 하늘 위를 높이 솟구친 저 백탑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종묘 앞을 지나 혜화동을 거쳐 낙산에 오른다. 박제가는 남산자락을 떠나 낙산 아래로 이사를 왔다. 저 아래 방송통신대학 앞 어디쯤 장경교(長慶橋)가 있었고 다리에서 서쪽으로 십여 발짝 떨어진, ‘능금나무 두 그루’가 있던 곳이 그의 집이었다. 혜화문을 지나온 사람들과 물건들은 모두 다리 앞을 지났다. 광통교보다는 못했지만 이곳도 제법 술렁이는 상가가 늘어섰다. 복사꽃이 피는 봄이면 박제가는 거리에 나가 쑥과 민물복어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는 음식과 요리를 남다르게 여겼던 것도 같다.

낙산 마루에 서자 멀리서 인왕산이 다가왔고 북한산의 끝자락인 백악산이, 남쪽에는 안개에 가린 남산이 있었다. 그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한복판에 저 홀로 우뚝하던 것이 백탑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죽순이 삐죽 솟은 것’ 같다던 백탑은 이제 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장경교도 흙 속에 매몰되었을까. 박제가가 ‘그윽하고 아름답기가 서울에서 으뜸’이라던 그 다리가 보고 싶었다.

# 틀어박혀 글쓰기를 마치다

도성을 따라 걷는다. 성벽은 쌓은 시기에 따라 색과 다듬은 모양이 달랐다. 그렇게 돌의 벽에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토록 바라던 북경을 다녀온 뒤 박제가는 집을 나와 광흥나루로 갔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배로 강물을 따라 내려가 운양나루에 내렸다. 지금은 철새도래지가 되어 무성한 억새밭에 전망대가 서있는 곳. 그는 자주 그 나루로 갔다. 시골집이 있던 통진(通津)으로 가는 길은 늘 그랬을 것이다. 서른의 그는 북경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싸들고 가서 방문을 닫아걸고 썼다. ‘지친 여행을 마치고 농가에 앉아 글 쓰는 시름만 안고 있었다.’ 때론 울적했고 때론 열기가 치솟았다. 낙산에 서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을 바라보면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광통교 다리처럼 낙산 성벽의 구석에도 어느 석수가 새긴 글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저렇게 시간을 돌에 새기듯 박제가의 시간도 성벽 어딘가에 스며있을 것만 같았다.

낙산 마루에 서자 멀리서 인왕산이 다가왔고 북한산의 끝자락인 백악산이, 남쪽에는 안개에 가린 남산이 있었다. 그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한복판에 저 홀로 우뚝하던 것이 백탑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죽순이 삐죽 솟은 것’ 같다던 백탑은 이제 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사진 신상웅

그가 북경을 다녀와 바라보던 통진의 바다는 더 이상 이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북경에서 바라본 현실은 그의 삶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었다. 세상은 요동의 들판처럼 넓고 또 넓었다. 대륙을 차지한 만주족 청나라는 승승장구했고 주변국들은 모두 그 앞에서 쩔쩔맸다. 그들의 천하였고 세상의 지식은 북경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먼 바다 끝 어딘가에서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가고 있다는 것을 박제가는 알고 있었다. 새로운 물결이었다. 자신과 조선이 그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을 그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를 마친 박제가는 서문 끝에 이렇게 적었다.

‘비 내리는 통진의 농가에서 쓰다.’

나는 이 구절에 오래 머물렀다. 그가 있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저 먼 바다로 떠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그가 보이는 듯했다. 그 간절함을 누군가는 지지하기를 바랐다. <의모도>에는 정성공과 엄마의 사연만이 아니라 좀 더 긴 이야기가 그림 밖에 있었다. 그림은 때론 스스로를 증명하기도 한다. <의모도>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그림이었다. 화가는 그런 사실을 근거로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녹여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림의 배경이자 정성공이 태어난 곳은 일본 규슈(九州) 서쪽의 작은 섬 히라도(平戶)였다. 그리로 가야 했다.

글·사진 신상웅 염색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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