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한 권] '희망고문'에 지친 우리사회의 '김지영'

정혜진 기자 2017. 4. 4.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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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읽기
현재진행형인 김지영 이야기

[서울경제] 89년생 김지영씨.

아니 김민지씨라고 해야할 지도 모른다. 기억하는 한 친구들 중 가장 많았던 이름은 김민지였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한 학년에 김민지가 다섯명이나 돼서 선생님들은 어떻게 정한 순서인지 김민지 각자의 이름에 A부터 E까지의 알파벳을 붙였다. “난 김민지B야” 김민지들은 어디에서나 자신을 알파벳이 더해진 이름으로 소개했고 친구들도 그렇게 불렀다.

김지영씨는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손녀들 이름에는 돌림자 없이 은혜, 지혜 등 무난한 뜻의 이름을 지어줬던 할아버지는 첫 손주가 태어났을 때는 이름난 작명소에 가서 당시로서는 거금 5만원을 주고 사주팔자와 큰 뜻이 어우러지도록 한 이름을 받아왔다. 아들 셋 외에도 두 명의 딸을 둔 할아버지는 ‘딸들은 소용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할아버지와 여덟살 때부터 살았지만 단둘이 밥을 먹은 기억은 남동생 돌사진을 찍으러 온 가족이 자리를 비웠던 때 한 번뿐이다.

김지영씨의 어머니는 차남과 결혼했지만 딸만 둘을 낳은 장남이 완수하지 못한 특명을 받았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

김지영씨의 동생인 둘째까지는 세상에 나왔다. 셋째부터 김지영씨의 어머니는 시누이가 알려주는 산부인과에 가서 미리 아들인지 딸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의 빛을 못 본 아이도 있었다. 노력 끝에 집안의 장손을 낳게 됐을 때는 손주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시부모의 뜻을 따라 시부모댁으로 이사를 오면서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김지영씨는 초등학교로 입학한 첫 세대다.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겠다며 명칭은 달리했지만 대부분 이전의 관습 그대로였다. (보통 남자인) 반장을 두고 남·여 부반장을 두던 때였지만 여자 반장이 여럿 나오자 선생님들은 요즘은 여자애들이 기가 세다고 표현했다. 6학년 때 40대 후반의 남성이었던 담임선생님은 갓 숙녀티가 나는 아이에게 ‘골반이 커서 아이를 잘 낳을 것’이라고 한다든가 힙합 바지에 길게 허리띠를 매는 유행 패션을 하면 ‘누구를 꼬시려고 이렇게 혁대를 길게 늘어뜨리느냐’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여학생들의 긴 머리에서는 페로몬이 나온다며 머리를 묶으라고 하기도 했다. 어린 맘에도 지나치다 싶어 김지영씨는 친구들과 함께 쓴 우정 다이어리에 담임을 ‘변태’라고 썼다. 친구들끼리 돌리던 우정다이어리가 담임에 의해 발각됐을 땐 왜 담임선생님을 변태라고 썼는지 저녁까지 남아서 깜지를 써내야 했다.

이미지투데이 제공
신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했지만 대부분은 바뀌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들은 가끔 지영씨에게 호감을 표하더라도 자신들끼리 있을 때는 센 척을 하고는 했다. 김지영씨는 털털하고 남자답게 행동하는 게 또래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학습했다. 어느샌가 치마 교복 대신 바지를 입고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어울렸다. 남자아이들처럼 똑같이 하면 애초에 다른 점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전교회장에 출마했던 김지영씨가 남자인 후보와 마지막 유세를 할 때 우르르 투표를 하러 온 3학년 언니들은 ‘어디 치마입은 게 회장을 해’, ‘깝치고 있네’ 등의 말을 들었다. 그들도 치마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여자 후배가 회장이 되는 것에는 반감을 표했다. 결국 회장이 되고 한동안 3학년 언니들이 졸업할 때까지는 따라오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실 이는 나의 유년시절 이야기다.

민음사에서 펴낸 조남주 작가의 장편 소설 『82년생 김지영』 형식을 빌렸다.

누구든 대한민국에서 30년가량 혹은 그 이상 여자로 살아오는 기간 소설 속 주인공인 1982년생 김지영으로 치환을 해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경험들을 겪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소설이 아닌 르포르타주(기록문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 작가는 성평등에 대해 당위적 메시지를 담거나 혹은 요즘 말로 MSG(조미료)를 치지 않았다. 보탬도 덜어냄도 아닌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이야기를 김지영씨의 삶으로 표현해냈다. 출간 후 입소문이 나면서 5개월 만에 2만부가 넘게 팔릴 정도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장편소설『82년생 김지영』표지 이미지
이제 소설 속 김지영씨를 만나보자.

1982년 태어나 두 살 터울의 언니와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최초의 수치심은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먹던 분유가 먹고 싶어 몰래 먹다가 할머니의 경멸에 찬 눈빛을 봤을 때 경험한다. 할머니에게 남동생을 제외한 언니와 자신은 ‘아무’인듯한 차별을 느꼈다.

1987년 4월 11일치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에는 경기여고 등 서울시내 20개 고교에서 여성다움을 찾자는 취지로 ‘치마입는 날’을 정해 치마를 강제로 입게 하는 일도 있었다. /경향신문DB

학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남녀공학인 중학교에서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엄격한 두발규정을 지켜야 했다. 한겨울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스타킹 위에 양말을 신어서는 안 되며 교복 아래에는 끈 나시도 면티도 아닌 둥그런 목의 러닝셔츠만 입어야 했다. 학교 앞에 출몰하는 ‘바바리맨’을 잡아 경찰서에 넘긴 친구들은 벌을 받기도 했다. 김지영씨는 이러한 상황들을 목격하며 뭔가 부당하다는 감정을 느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문제 제기를 하는 친구들은 간혹 나타났다. 학교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모르는 척 받아주는 일은 생겨났지만 규율이나 문화가 바뀌지는 않았다.

자신도 원하는 직업이 있었으나 남동생들 뒷바라지로 제때 받아야 할 교육을 포기했던 김지영씨의 어머니는 방송국 PD를 꿈꾸던 큰딸에게 ‘여자 직업으로 교사만한 직업이 어딨냐’며 교대를 권한다. 하지만 딸이 정작 교대라는 선택지를 받아들이자 죄책감에 시달린다.

김지영씨는 취업 준비 과정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벽을 경험한다. 김지영씨가 졸업하던 2005년 한 취업 정보 사이트 인크루트에서 100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채용 비율은 29.6%에 불과했다. 비공식적으로 채용 추천 의뢰가 들어오면 남학생들만 추천하는 교수가 있었고 아주 드물게 면접까지 기회가 왔지만 ‘미팅을 나갔을 때 거래처 쪽에서 성희롱을 시도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질문을 받았다. 성희롱을 참겠다는 말을 하는 지원자를 보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그 지원자는 붙었을까’ 생각하며 후회를 한다.

김지영씨의 후배들은 달라졌을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난해 자산 상위 30대 기업의 여성 직원은 19%에 불과했다. 요사이 여성 취준생 사이에는 ‘고추가 스펙’이라는 자조섞인 말이 공공연하게 쓰인다.

김지영씨가 가까스로 합격한 회사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작지만 탄탄한 홍보대행사에서 일을 시작한 김지영씨는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여자는 김은실 팀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심히 일하고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도 회사에서는 자신을 ‘오래 남지 않을’ 사람으로 본다는 사실도 느낀다.

어느 날 갑을 관계에 있는 거래처의 한 기업 부장은 자신을 술자리에서만 옆에 두려고 하며 야한 농담에 술을 강권하며 굴욕감을 준다. 하지만 그가 도서관에서 늦게 마치는 딸을 걱정하며 데리러 가자 분노를 느낀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 나처럼 될지도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이 소설에서는 사회의 벽을 느낀 한 여자가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번의 낙담 끝에 소진되는 모습을 다룬다. 이는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남성은 ‘직접적 가해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김지영씨를 상처입힌 건 여성도 평등하다는 희망고문과 현실과의 괴리다. 좌절과 낙담의 굴레 속에서 김지영씨는 자꾸 누군가에 빙의하면서 정신적인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회복은 장담할 수 없다.

정신과 상담을 맡은 남성 의사는 김지영씨의 살아온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녀의 상황에 깊이 공감했지만 그 공감이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자신과 같은 의사였지만 아이 문제로 인해 전업주부의 삶을 택하게 된 부인이 왜 자꾸 초등학생 수학 문제집에 매달리는지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임신한 직원이 몇 번의 유산을 계기로 회사를 떠나려 하자 다음 직원은 미혼으로 뽑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이 점에서 우리 사회가 속한 문제 인식과 한계가 드러난다.

이미지투데이 제공

“정말 평등한 사회라면 여성이 국가와 기업의 반을 운영하고 남성이 가정의 반을 꾸려나가야 한다. 이것이 내가 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세 아이를 키우는 내내 자신이 고용됐던 구글, 페이스북에서 탄력근무제 등 돌봄 권리를 당당히 요구했던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는 저서 ‘린인(Lean In)’에서 이같이 말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여성이 가정을 전부 꾸려가야 하기에 국가와 기업에는 영원한 뜨내기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구조라는 게 잔잔한 절망감을 준다.

/정혜진기자 made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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