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권 10년 동안 대통령은 한 번도 찾지 않았다"

허호준 2017. 4. 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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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주년 제주4·3추념식에는 갖가지 사연들 쌓여
굴속에 숨었다 한날 한시에 잡혀가 행방불명된 삼형제
끌려가던 남편의 옷자락을 건드린 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과 도의적 책임 절대 필요"

[한겨레]

제주4·3희생자 유족이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지석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한 할머니가 8개의 잔을 행방불명인 표지석에 얹었다. 행방불명인 표지석은 한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는데 8개의 잔을 놓고 이름을 불렀다. 행방불명된 남편을 포함해 8명이 4·3 때 희생됐다고 했다. 그들의 영혼을 초청해 위로하는 의식이었다.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만난 유족들은 저마다 사연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의 표지석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서귀포시 서호동에서 온 오오순(76)씨는 “내 나이 6살 때, 큰 오빠, 둘째 오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어린 때여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오씨는 20여분을 헤맨 끝에 아버지의 표지석을 찾았다.

4·3평화공원에는 희생자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곳이 3곳이 있다. 평화공원에 들어서면 제주4·3기념관 부근에 희생자의 이름과 생년월일, 사망일 등이 적힌 각명비가 둥그렇게 돌아가면서 있고, 위령제단에는 희생자 이름이 적힌 위패봉안소가 있고, 그 뒤로는 형무소 등지에서 행방불명된 행방불명인 표지석이 있다. 유족들은 국화꽃을 놓거나 준비해온 제물을 풀어놓고 절을 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3일 열린 제69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 원희룡 제주지사(맨왼쪽) 등이 위령제단에 헌화·분향하고 있다.

맑은 날씨였다. 머리에 얹은 잔설이 파란 하늘에 닿은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했고, 텃새가 된 까마귀들은 제삿날을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보수정권 10년 동안 대통령이 참석한 적은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해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한 2006년 4·3희생자추념식 이후 이처럼 좋은 날씨 속에 추념식이 거행된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비바람이 거세게 쳐서 제주4·3기념관에서 약식으로 치러진 때가 있었다. 한 유족은 “박근혜 정권이 끝나니까 이렇게 날씨가 좋은가”라며 혼잣말을 했다.

“자주 찾아와야 하는데 찾아뵙지도 못해수다.” 강계향(72·여·서귀포시 안덕면 상창리)씨는 묵념을 한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강씨는 “시아버지가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는데 행방불명됐다. 숨진 날을 모르니 생일에 제사한다. 결혼해서 듣기로는 밭에 일하러 가다가 잡혀가서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그게 전부다”라며 “얼굴도 모르지만, 될 수 있으면 4·3추념식에 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당시 나이 4살이었던 현황열(74·여·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씨는 “너무 어려 기억이 없지만 꼬박 꼬박 추념식을 챙긴다”고 말했다. “여기(행방불명인 표지석)에 세 사람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동생. 아버지는 제주에서 행방불명되고,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은 육지에서 행방불명됐어요.” 현씨의 어머니 안재욱(당시 24)씨는 육지형무소로 끌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행방불명됐다. 현씨는 “둘째아버지가 이곳에 오곤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내가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고복자(70·여·제주시 조천읍 대흘리)씨는 아버지(고철송·당시 27) 형제 7명 가운데 5명을 4·3 때 잃었다. “싸우다가 죽었으면 원이 없는데 굴 속에 숨었다가 삼형제가 한날한시에 잡혀갔다. 제주시 부둣가 동척회사(4·3수용소 역할을 한 곳)에 수용됐다가 육지로 갔는데 가족들한테 편지 한장 보내지 못하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곧건 들어봅써”(말하면 들어보세요)라며 말문을 연 고씨는 “어머니도 당시에 징역형을 살았는데, 석방되고 나니까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아버지가 끌려가신 소식을 듣고 시내에서 식당일을 하면서 아버지한테 사식을 들이려고 했는데 거부당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육지로 이송되는 현장을 보고 쫓아가서 아버지를 톡 건드려 알아챘지만, 경찰이 ‘산 쪽 연락병 아니냐’며 잡아가려고 하는 것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은 그게 끝이다”고 말했다.

제69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열린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를 찾은 유족들이 준비해간 제물을 올려놓고 예를 갖추고 있다.

각명비 앞에서 만난 양순(82·여·제주시 노형동)씨는 각명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으로 가리켰다. 집안 식구 3명이 희생됐다. “노형마을은 제사가 명절 같습니다. 음력 10월19일인데, 노형마을을 불붙이고, 부모를 다 잃게 됐습니다”고 했다. “사난 살았주(사니까 살았지) 그 시절을 어떵 입에 담습니까”라며 한숨을 쉬었다. 모자를 벗고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 예를 갖춘 김호택(82·제주시 연동)씨는 “아버지(김신경·당시 49)가 1949년 5월9일 사망했다. 당시 북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하지만 4·3 이후 정말 힘들게 살 수 밖에 없었다”고도 했다.

특히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의 추념식 인사말이 눈길을 끌었다. 양 회장은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인권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69년전 제주에서는 국가공권력에 의해 30만명 중 3만명이라는 부모·형제가 족과 이웃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며 “제주4·3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편협된 시각으로 해석돼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양 회장이 추념식 자료집에 미리 쓴 인사말에선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자세와 도의적 책임의식이 필수적이다. 국가는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절대적 피해자인 국민의 아픔과 슬픔을 감싸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며 가해자의 사과와 국가의 잘못 인정을 강조했다.

제69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3일 오전 유족과 도민 등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렸다.

추념식에는 4·3 교육 차원에서 제주시 곽금초등학교와 애월중학교 등 초·중학교 학생들도 여럿 보였다. 김미래(15·애월중2)양은 “학교에서 4·3교육을 받아 알고 있었는데 현장에 와서 보니까 더 이해된다. 4·3을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학교 부인식(57·국어 담당) 교사는 “소설가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로 4·3교육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4·3을 가르치는 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어렵게 느끼지 않고 스토리를 받아들였다. ’4·3’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는데 계기 교육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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