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아들, 28살 때 직선제 논의하는 청 회동 참석했다

2017. 4. 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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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전두환 부인 이순자 회고록 뜯어보니
[한겨레]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가 <당신은 외롭지 않다>(자작나무숲)를 펴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7년 직선제 개헌 등 전 전 대통령이 관여한 주요 사건에 대해 회고록에선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아직 살아 있는 자, 전두환>(북콤마, 2013)을 쓴 고나무 기자가 회고록의 내용을 꼼꼼히 따져봤다. 그는 2013년 <한겨레>의 ‘전두환 은닉재산 특별취재팀’으로 활동하며 은닉재산 미납 추징금을 완납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96년 12월16일 항소심 선고를 받기 위해 공판정에 서 있는 12·12 군사반란 사건 피고인 16명의 모습. 앞줄 오른쪽부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어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년 전 김종필 전 총리의 회고록이 출간됐을 때 그는 여러 이유로 비판받았다. 특히 5·16 쿠데타를 옹호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즈음 진보성향으로 분류된 한 현대사 연구자를 만났다. 그는 회고록 내용의 오류 문제는 비판하면서도 내게 “그래도 안 낸 것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정치인 등 공적 인물은 설령 왜곡된 기억이라도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했다. 기록이 없다면 비판조차 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 좋은 예다. 그는 끝내 증언 없이 숨졌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가 펴낸 <당신은 외롭지 않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민간인 아들’ 참석, 첫 공식인정

현직 대통령이 현직 집권당 대표와 청와대에서 개헌을 논의하는 자리에 아무런 공적 직위가 없는 28살의 대통령 아들이 배석해 기록을 맡고 의견을 피력했다면? 아마도 언론은 ‘비선’이나 ‘국정농단’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도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공적 직위가 없는 장남 재국(1959년생)씨를 국가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논의 자리에 배석시킨 사실이 이번 회고록에서 처음 확인됐다.

이순자씨는 회고록 469쪽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이(전 전 대통령)와 노 대표와의 마지막 비밀회동의 날이 왔다. (…) 그 비밀회동 장소로 갈 때 그분은 재국을 데려갔다. 사안의 성격상 회동의 보안 유지와 기록을 위해 재국만을 배석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두환 부인 이순자씨 회고록 펴내
전두환-노태우 직선제 개헌 논의 때
“비밀회동 장소 갈 때 재국 데려갔다”
공적 직위 없는 ‘민간인’ 개입 논란 12·12 쿠데타 두고 기존 주장 재탕
정승화 전 총장을 ‘용의자’라 지목
법원, ‘정치적 욕구 성취’라고 판결
‘먼저 직선제 수용하자 했다’ 주장

1987년 6·10항쟁으로 전 전 대통령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 압력에 시달렸다. 이를 논의하는 자리에 대통령이 민간인인 아들을 데려간 것이다. 어떤 공적 지위도 없는 장남 재국(현재 시공사 대표)씨가 청와대 논의에 배석한 사실은 전두환 정부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김성익씨가 1994년 펴낸 <전두환 육성증언>(조선일보사)에서 짧게 언급된 바 있으나, 전 전 대통령 측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뒤 5공비리가 불거지면서 5공 청산 압력이 거세지자 1988년 11월23일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백담사로 들어가 약 1년간 머물렀다. <한겨레> 자료사진

재국씨의 배석 사실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김현 전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법에 근거하지 않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긴 관행이 결국 비선과 국정농단 사태를 불렀다”며 “직선제를 논하는 엄정한 역사의 순간에 재국씨가 배석한 것도 적절치 않은데 이를 자랑스레 회고록에 기록한 것을 보면 여전히 전 전 대통령은 권력의 공공성 개념이 전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5공화국 때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윤여준 전 장관은 <대통령의 자격: 스테이트크래프트>란 책에서 전두환 정부에 대해 “정실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부정부패를 초래하여 공공적 가치를 크게 훼손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썼다. 시공사와 전 전 대통령 쪽은 이와 관련한 <한겨레>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한편, 이순자씨의 아버지인 이규동 전 대한노인회장이 1960년 4·19 이후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사실도 회고록을 통해 처음 드러났다. 하지만 회고록은 이밖에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새로운 사실관계는 담고 있지 않다.

‘정승화 체포 정당’ 주장은 재탕

12·12 군사반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직선제 개헌 과정 등 주요 사건과 관련해선, 새로운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정치적 입장 역시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데 그쳤다.

먼저 12·12 군사반란의 이유와 목적. “(박 전 대통령 시해) 수사 결과 강력한 용의자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어서 아버지가 시해사건의 전모를 밝히려 하다가는 자칫하면 내 목숨과 명예, 아니 우리의 모든 것까지도 잃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중략) …너희들은 내가 극도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해서 내 임무를 저버리고 국가가 내게 부여한 책임과 역사 앞에 불충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전 전 대통령이 쿠데타 직전 가족에게 했다는 말을 이순자씨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전했다. ‘용의자’는 당시 상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말한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총장의 지휘를 받는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었다. 그런데도 대통령 재가 없이 불법적으로 정 총장을 연행했다. 전 전 대통령은 쿠데타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 전 총장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감싸는 등 시해사건에 관여한 의혹이 있어 체포했다고 주장한다. 이순자씨 회고록도 이런 입장을 반복한다.

거짓말이다. 12·12 군사반란의 실체에 대해 사법부는 1996년 서울고법 내란죄 판결문을 통해 군사반란은 ‘정치적 욕구 성취’임을 분명히 했다. 판결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 전두환은 그와 정승화 총장 사이에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여러 번의 마찰로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자 차제에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로 빚어진 권력의 공백과 혼란을 틈타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자신을 비롯한 정규 육사 출신의 장교모임인 이른바 ‘하나회' 소속 장교들을 중심으로 군의 지휘통솔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일거에 돌파함과 동시에 평소의 정치적 욕구를 성취하기 위하여,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한다는 명목을 가장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상관인 현직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기에 이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방문에 나선 당시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1981년 2월2일(현지시각)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부부와 백악관 발코니에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전에 나온 다른 회고록들의 내용도 대부분 이순자씨 회고록과 배치된다. 쿠데타 피해자인 정승화 전 총장 회고록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까치), 윌리엄 글라이스틴 쿠데타 당시 미국 대사 회고록 <알려지지 않은 역사>(중앙M&B),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회고록 <12·12와 미국의 딜레마>(중앙M&B) 등은 이순자씨 회고록과 입장이 정반대다.

재판부가 ‘정치적 욕구’라고 표현한 대로, 전 전 대통령은 법령상 보안사령관의 권한을 넘어 정치인처럼 행동했다. “부정축재한 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할 것을 정 전 총장에게 건의했고, 대통령 권한대행을 뽑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 전에 대의원들을 조직해 “득표율이 90% 이상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전 총장은 둘 다 거절했다. 전 전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 수사 과정에서 발견한 9억원 가운데 6억원을 자의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생계비’ 명목으로 준 것으로 알려져왔다. 정 전 총장 회고록을 보면, 나머지 3억원 중 1억원은 합동수사본부 수사비로 썼고 2억원만 상관(정승화)에게 보고했다. 이뿐만 아니라 전 전 대통령은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비자금 중 5천만원을 그냥 줬고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은 오는 4월초 발간되는 자신의 회고록에 박 전 대통령이 9억5천만원 중 수사비로 쓰라며 3억5천만원을 돌려줬다는 주장(노 전 장관에게 준 5천만원이 기존에 알려진 금액과의 차액으로 추정)을 담았다. 정 전 총장은 훗날 회고록에서 “‘나에게 (전 전 대통령이) 정확한 보고를 하지 않고 있구나, 앞으로는 주의 깊게 모든 일을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왜 권력을 잡았을까? 위컴 전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전 전 대통령을 두고 “박정희의 프로테제”라고 비유했다. 프로테제는 멘토의 반대말로 ‘따르는 자’라는 뜻이다. 위컴 전 사령관은 또 “그들(쿠데타군)은 전적으로 개인적 이익욕이라는 모티브로 움직였다”고 관찰했다.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12·12 쿠데타에 대해 “이름 빼고 실체는 전부 쿠데타”(coup in all but name)라고 묘사했다. 수사행위가 아니라 ‘집권행위’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은 12·12 쿠데타 직전 위컴 전 사령관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해 “한 무리의 젊은 장교들이 (민주화) 이행을 격렬하게 싫어한다, 이들은 육군사관학교 11, 12, 13기 졸업생”이라며 “그들이 대통령 선거 전에 권력을 잡으려 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전 전 대통령 전기를 썼던 천금성 작가는 이순자씨의 삼촌 이규광씨가 집권을 권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어쨌든 12·12 군사반란은 전 전 대통령 주장처럼 정당한 수사행위가 아니라 ‘권력추구’였다는 데 이견이 없는 셈이다.

2012년 1월1일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전 전 대통령의 모교인 대구공고 총동문회 회원들로부터 새해 인사를 받고 있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이순자씨 회고록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입장을 반복한다. “광주사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남편을 임기 내내 그리고 퇴임 후 법정과 감옥에 이르도록 악몽처럼 따라다녔다. 다행히 재판을 통해 그분은 오랫동안 남편을 따라다녔던 양민 학살자라는 누명을 벗게 되었다.”

이순자씨가 회고록에서 든 근거는, 당시 전 전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및 중정부장 서리이므로 1980년 5월17일 계엄 확대를 결정한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책임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도 법원 판결 및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숱한 현대사 연구 결과와 배치된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을 광주재진입작전의 주체로 적시하며, 전 전 대통령이 하나회 장교들을 통해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에게 본인 의사를 논의한 정황을 여러 차례 근거로 제시했다. 도청 진압작전 중 시민 사살과 관련해서도 내란목적살인죄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노(태우) 대표의 첫 반응은 거부였다”

이순자씨는 직선제 개헌과 관련해 468쪽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집무실에서 노 대표와 마주앉은 그이(전 전 대통령)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국민의 뜻이 직선제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노 대표의 처음 반응은 분명한 거부였다.” 1987년 당시 전 전 대통령은 물밀듯이 터져나오는 직선제 개헌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선제를 유지한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한다. 이후 국민 분노는 더 커졌다. 이어 6·10 항쟁 등 대규모 저항이 일자, 결국 당시 노태우 대표가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6·29 선언을 했다. 전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중에 누가 먼저 직선제를 받아들이기로 했는지를 두고선 여전히 양쪽의 주장이 엇갈린다. 이 쟁점에 대해 이순자씨 회고록,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 <노태우 회고록>(조선뉴스프레스), ‘6공 황태자’인 박철언 전 체육부 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랜덤하우스중앙)의 기록이 다 다르다. 노 전 대통령 등은 직선제 개헌을 자신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회고록에 담긴 이순자씨 주장의 신빙성은 떨어진다. <국민일보>가 보도한 미 국무부 기밀해제문서를 보면, 6·29 선언 닷새 전인 1987년 6월24일, 전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미 국무부 차관보를 만나 “공공안전이 완전히 사라지고 무정부 상태가 발생할 경우 정부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무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이순자씨는 2013년 검찰 수사를 받고 유죄로 확정된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도 거듭 부인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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