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홍길동과 허균의 '가짜뉴스'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7. 3. 18.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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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등 삼정승이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실존인물 홍길동이 실록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뒷날 허균이 소설 '홍길동전'을 쓰면서 참고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60년 후의 '도적' 임꺽정은 실록에 그 행적을 어느 정도 남겼지만, '강도' 홍길동은 앞뒤 잘린 채 아리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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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5 - 홍길동 : 고위직 행세하며 관청 드나들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5 - 홍길동 : 고위직 행세하며 관청 드나들다]

“강도(强盜)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중하오니 그 무리들을 다 잡아들이소서.” (연산군일기)

1500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등 삼정승이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실존인물 홍길동이 실록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정승들이 단체로 ‘기쁜 소식’을 고한 걸 보면 단순 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홍길동과 그의 무리들은 대체 무엇을 훔치려고 했을까?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연산군 때의 홍길동이 모티브로 쓰였다. 뒷날 허균이 소설 ‘홍길동전’을 쓰면서 참고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런데 실존인물 홍길동은 행적이 베일에 싸여 있다. 60년 후의 ‘도적’ 임꺽정은 실록에 그 행적을 어느 정도 남겼지만, ‘강도’ 홍길동은 앞뒤 잘린 채 아리송하기만 하다.

물론 몇 가지 단서는 있다. 홍길동 무리에 대한 심문은 의금부에서 이루어졌다. 역적죄, 강상죄(유교질서 위배) 등 중범죄를 다루는 사법기관이다. 그 심문 기록을 읽어 보면 깜짝 놀랄 만한 대목이 나온다.

“강도 홍길동은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했다. 대낮에 떼를 지어 무장한 채 관청에 드나들었는데 그 행동이 거리낌 없었다.”(연산군일기)

여기서 ‘옥정자’는 갓 꼭대기에 단 옥 장식을 가리킨다. ‘홍대’는 겉옷에 두르는 붉은 띠다. 모두 고위직 신분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홍길동이 자칭했다는 ‘첨지’도 첨지중추부사라는 정3품 벼슬을 말한다. 그를 둘러싸고 출생의 비밀이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홍길동이 조선 초기 절도사를 지낸 홍상직의 서자이며, 세종 치세에 출사한 홍일동에게는 이복동생 격이라는 설을 제기한다. 이와 관련해 소설 ‘홍길동전’의 무대가 세종조라는 점도 흥미롭다. 원래 허균 같은 글쟁이는 취재력도 뛰어나다. 이 가계도 역시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을 그럴 듯하게 만드는 ‘가짜뉴스’일 뿐이다. 허균은 평소 농담 삼아 이런 장난을 즐겼다고 한다. 후일 그가 역모 혐의로 목숨을 잃을 때도 가짜뉴스가 한 몫 했다. ‘유구국(오키나와) 사람들이 조선을 치기 위해 섬에 숨어있다’는 등 허균이 내뱉은 짓궂은 농담들이 소문으로 나돌고 정적들에 의해 부풀려져 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소설과는 달리 현실에서 홍상직과 홍일동, 그리고 홍길동의 조합은 시대가 안 맞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어째서 고위직 신분으로 행세하며 관청을 들락거렸을까. 아전과 호족들은 왜 모른 체하고 고발하지 않았을까. 결국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강도(强盜)’, 강한 도적이어서 손댈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적질한 다음에 유망(流亡)이 회복되지 않아 토지측량을 오래도록 못했습니다. 세금을 거두기가 어려우니, 올해는 측량하게 하소서.”(중종실록)

1513년 8월 29일 호조에서 중종에게 보고한 기록이다. 홍길동이 붙잡히고 십수년이 지났는데도 충청도는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망’, 곧 경작지를 버리고 떠도는 백성들이 복귀하지 않아서다. 홍길동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아니었을까? 충청도 일대를 휩쓴 거대 농민반란의 지도자 말이다.

농사를 나라살림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농민반란 지도자들을 도적으로 깎아내렸다. 왕에게서 백성을 훔치니 도적은 도적이다. 그러나 본질은 나라를 흔드는 역적이요,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강상죄인이었다. 특히 ‘강한 도적’ 홍길동은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었는지 행적에 관한 기록까지 지워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후대 사람들은 그 몇 가지 단서와 구전들로 잘도 소설을 지어내고 드라마를 찍는다. 실존인물 홍길동은 기록의 여백 덕분에 오히려 묻고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역사기록에 완벽한 답은 없다. 기록의 진정한 가치는 이렇게 좋은 질문을 구하는 데 있다.

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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