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의 고민사전]위로의 기술②..'죽은 사람 나이 세기'를 함께해야 하는 이유

문화치유 전문가 2017. 1. 2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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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자 선생님과 죽음에 대해 긴 얘기를 나누던 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남편이 췌장암 선고를 받고, 한 달 반 만에 갔어. 꿈같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같이… 장례 끝나고 집에 와서, 방송 가려고 옷장을 열었는데 남편 냄새가 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

사실 슬픔은 이별 후에, 느리고 깊게 밀려온다. 돌아가신 후 꿈에도 한 번 찾아오지 않던 아버지가 나를 찾아 온 것은 13년이 지난 후 독일 바이로이트의 어느 다락방이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으면서 포기했던 독일 유학. 서른여섯이 돼서야 장학생으로 독일에 가 있던 어느 날, “똑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베개가 젖어 있었다.

스물세 살의 나는 서울행 고속버스에 앉아 있다. 49㎏의 아버지는 버스 유리창을 “똑똑똑” 두드린다. “상미야, 상미야.”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서 돌아보지 못한다. “상미야, 잘 있어.” 떠나는 딸에게 잘 있으라니! 나는 무연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버지도 잘 가.” 아버지는 그게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알았던 듯하다. 서울 자취방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가 나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다는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는 암 말기환자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딸을 배웅하면서 끝낸 아버지…. 다시 집에 돌아가야겠는데,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다. “가지 마, 가지 마.” 말을 하고 싶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정신을 내려놓은 것은 내가 잘 가라는 인사를 너무 빨리 해버린 탓이었다. “아버지야, 나는 잘 있어. 아버지도 잘 가….” “똑똑똑” “똑똑똑” 새벽비가 창문을 두드리며 운다. 나는 그날 새벽, 낯선 땅에서 통곡하며 아버지를 겨우 떠나보냈다.

끝내 거부했어야 할 배웅을 받아버린 죄책감은 13년간 나를 괴롭혔다. 아버지의 환영을 만나게 될까봐 고향집은 물론이요, 고향 근처에도 가지 않고 살았다. 누가 아버지 얘기를 꺼내면 애써 말을 돌리고, 글을 쓰려고 앉으면 아버지가 내 속에서 흘러나올까 봐 남의 작품 평론만 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아버지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종종 쓰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추억하고 자주 울고 웃으면서 죄책감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펴낸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이란 책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치유받았고,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 가족은 죽은 아버지의 나이를 함께 세면서, 죄책감과 미안함과 원망과 후회… 모든 감정을 비워낼 수 있었다. 비워 낸 자리에는 ‘당신이 우리 아버지여서 많이 고맙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고백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혼자 사는 이모가 직장을 그만두고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서 극진히 할머니를 간호했다. “네가 먼저 죽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을 정도로 이모는 야위어 갔다. “내가 엄마와 이별하는 방식이야.”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가족들은 이모를 걱정하며 한마디씩 했다. “집을 팔아라” “동사무소에 연락해서 모든 물건을 버려라” “외국여행을 떠나라”…. 큰 냉장고에는 병자를 위한 음식이 가득했다. 이모가 말했다. “아무것도 손대지 마. 엄마가 드시던 음식, 천천히 내가 다 먹을 거야. 내 마음이 엄마를 잘 보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이 집에서 살 거야.” 나는 아무 말 없이 이모 곁에 있었다. 모두가 돌아간 뒤 일주일간 그 집에 함께 머물며 할머니의 사진첩을 보고 또 보고, 할머니 옷을 입고 할머니 침대에 누워서 할머니 냄새를 같이 맡으며 깔깔깔 함께 웃었다.

얼마 전 이모에게서 문자가 왔다. “네 책을 읽었어. 네가 아버지를 추억하는 글들을 읽으며 많이 울었어. 나도 글을 써 보려고 해.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 이야기를….” 나는 답했다. “아름다운 애도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슬픔을 비워낸 자리에 감사와 행복이 새 살처럼 차오를 거예요.”

낳은 지 3개월 만에 아이를 잃고, 말도 잃은 미혼모의 상담을 맡은 적이 있다. 내게도 마음문을 꼭 닫은 그녀에게 세 번째 만남에서 내가 물었다. “아이 사진 있으면 보여줄래요? 엄마 닮아서 얼마나 예뻤을까?” 그녀는 내게 안겨서 통곡했다. “아이가 죽은 뒤 예쁜 우리 새롬이에 대해 물어본 사람은 처음이에요. 모두 저에게 ‘잊어라.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는 말만 했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죽고 싶었어요.”

모든 이별은 만난 시간보다 더 긴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슬픔에 빠진 사람이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 어쩌면 ‘죽은 사람 나이를 함께 세어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큰아들을 잃었을 때, ‘빨리 잊으라’며 아들 얘기를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 위로가 아니었어요. 가슴을 찢는 듯한 아픔이었습니다.” 이번주는 박○○님의 사연에 대한 답입니다.

‘문화치유 전문가’ 박상미는? ‘문화치유 전문가’로 불리는 박상미씨는 ㈜더 공감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이자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 저자이다. 함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그가 다양한 고민을 수집해(skima1@hanmail.net) 사이다보다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문화치유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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