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리가 그랬구나'라고..언제까지 무릎만 칠 건가
'인종차별'을 대하는 자세
[한겨레]
연초부터 부끄러울 일투성이다. 지난 4일 방영된 제이티비시 <말하는 대로>에 출연한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는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인종차별 사례를 들려줬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중년 여성이 “까만 ××가 한국에서 뭐하는 거냐.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폭언을 던진 일, 이를 보고도 가만히 침묵하는 수많은 한국인 승객을 보며 ‘한국인들은 원래 이런가’ 생각했다는 이야기, 똑같이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해도 백인들이 멋진 역할을 맡는 동안 흑인들은 악당이나 좀도둑 역할을 맡아야 했던 경험,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어학원 교사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경험담…. 듣는 사람이 다 부끄러워지는 인종차별 사례는 그 종류가 다채롭기까지 했다. 서아프리카 지역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2014년, 한 식당이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해 아프리카 고객은 받지 않겠다”는 문구를 내걸며 접객을 거부한 탓에 전 아프리카인들이 분노했다는 이야기쯤 되면 나라도 대신 나서서 사과하고 싶어진다. 이토록 무례하고 폭력적인 공동체의 일원이라서 미안하다고.
아마 늘 웃는 얼굴로 한국을 향한 사랑을 얘기하던 샘이기에 이날의 고백이 더 충격적이었으리라. 그의 그늘 없는 웃음에서 폭력적인 인종차별이 남긴 상처를 찾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방송 직후부터 인터넷에는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프로그램 리뷰 기사들이 올라왔고, 사회관계망서비스나 블로그에서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이 이처럼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부터 우리 모두 자성해야 한다는 다짐까지. 올라오는 글들을 공감하며 지켜보다 문득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우린 이미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접해왔고, 그때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2015년 한국방송 <이웃집 찰스>에 출연한 코트디부아르인 숨이 동료 상인들로부터 악의적인 조롱과 성희롱을 당하는 걸 봤을 때에도, 2014년 에스비에스 <붕어빵>에 출연한 나이지리아인 벤이 흑인을 경계하는 한국인들의 눈빛 때문에 한시간이나 기다렸다가 혼자가 됐을 때 비로소 엘리베이터를 탔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2014년 샘이 제이티비시 <비정상회담>에서 한 차례 자신이 당한 인종차별 사례를 이야기했을 때에도.
샘의 고백, 처음이 아니다
그렇다. 샘이 자신이 당한 인종차별 사례를 이야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물론 <비정상회담> 초기만 해도 그는 “한국 사람들이 몰라서 실수를 하는 거지, 진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방송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2014년 연말, ‘차별’을 주제로 토론을 하던 샘은 조심스레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었다. 단역배우 아르바이트조차 백인들은 앞줄에 세우고 흑인들은 뒷줄에 세우는 차별을 피할 수 없었던 이야기, 한국인들의 편견과 차별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국에 오는 걸 망설인다는 그의 흑인 친구들 이야기, 샘의 광고 화보가 큼지막한 걸개그림으로 인쇄돼 쇼핑몰 건물 전면에 걸린 것을 보고는 마침내 흑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이 사라지나 싶어서 울었다는 친구의 사연까지. <말하는 대로>에서 들려준 이야기 중 절반가량은 이미 2년 전 <비정상회담>에서 나온 이야기다. 2014년 말 <비정상회담>을 다룬 기사들은 대부분 이 이야기를 큰 비중으로 다뤘고, 많은 이들이 “처음 알았다”, “놀랐다”,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고, 2년이 지난 지금 우린 마치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사람들처럼 다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 중이다.
샘은 <비정상회담>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차별을 겪어야 했다. 2014년 7월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사회자 전현무는 첫 방송 시청률이 3%를 넘기면 샘 오취리 분장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다른 인종이 흑인의 짙은 피부색이나 곱슬머리, 두꺼운 입술 등의 인종적 특징을 흉내내는 것 자체가 흑인에 대한 조롱이자 인종차별이란 사실을 가볍게 간과한 것이다. 1980년대 말 한국방송 <쇼 비디오 쟈키> ‘시커먼스’와 1990년대 말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게으르게 소비하던 한국방송 <개그콘서트> ‘사바나의 아침’을 보고 자란 한국인들에겐 흑인 분장이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1800년대 미국에서 백인 배우들이 얼굴에 검댕을 칠해 흑인 분장을 하고는 무대에 올라 과장된 춤과 노래로 흑인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악의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던 ‘블랙 페이스’의 악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전현무의 ‘샘 오취리 분장’ 공약은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다. 국경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표방한 <비정상회담>의 시작은 사실 그렇게 지독한 인종차별과 함께 시작했다.
나는 과거에도 이 지면에서 한 차례 ‘시커먼스’와 ‘사바나의 아침’을 인종차별적 코미디의 예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주장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건 인종주의가 아니지 않냐’는 의견이 메일함에 수북했다. “그냥 랩 음악이 흑인 음악이라서 흑인 분장을 한 것이지 비하를 하려던 건 아니지 않나”라거나, “웃음을 위해 차용한 소재를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대체 무엇으로 웃길 수 있단 말이냐” 등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주노동자와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을 차별하는 것은 “이들이 불법 체류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흑인을 ‘흑형’이라 부르며 흥이 많고 신체기능이 탁월한 인종이란 식의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흑인이 많기 때문에 칭찬 삼아” 하는 일이 된다. 이 논리 구조 속에서 한국인들은 ‘이유 없이’ 부당하게 차별하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샘 오취리가 경험한 ‘인종차별’
방송 뒤 “자성하자” 목소리 확산
2년 전 ‘비정상회담’에서도 고백
“몰랐다” “반성하자” 반응은 같아
차별과 폭력의 가해자 지위 부인
‘불법체류자=범죄 위험자’로 합리화
자성과 사과는 늘 일회성에 그쳐
차별에 눈감은 일원임을 인정해야
불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기억에서 지우는 건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차별과 폭력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상상해본 경험이 드물지 않나. 우리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한나라 침공이나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추진한 북진정책 및 여진정벌, 대마도 정벌을 멀쩡히 배워 놓고도 ‘평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번도 타국을 침략한 적 없는 민족’이라는 실체 없는 자부심을 주입받은 채 살고, 일제 치하 조선에서, 미국에서, 일본에서, 독일에서 인종차별을 견뎌냈던 선조들의 눈물겨운 역사는 배우면서도 한국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한반도 내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차별해 한반도에서 쫓아냈는가 같은 건 배우지 못했다. 이렇게 선별적으로 역사를 배우고 기억해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을 강화하는 동안, 우리 또한 인종주의를 내면화한 가해자는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은 좀처럼 자리잡지 못한다. 끔찍한 차별의 사례가 방송에 나올 때마다 다 함께 자성하고 사과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경계심은 다시 증발한다. 다음 사례가 전파를 탈 때까지 잊고 사는 셈이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피하는 가장 빠른 길은, 나 자신이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자신을 다잡는 것이다.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야말로 불의로 향하는 지름길이니 말이다. 샘은 그 많은 상처에도 한국에 남은 이유를 ‘우리’라는 우리말 단어로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곁에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며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상처를 보듬어준 정 많은 한국인 친구들이 있었기에 이 땅에 애정을 주고 희망을 걸었다. 이 ‘우리’라는 단어를 차별 없이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공동체로 키워 나가는 일은, 나 자신이 이 끔찍한 차별을 용인하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끊임없이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논의하고 만들어가야 할 2017년, 새해 벽두 티브이가 우리에게 던져준 부끄러움을 화두 삼아 걸어가보자.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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