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公私·義利 제대로 구분 못한다".. 初心잃은 효종에 직언과 질책

기자 2017. 1. 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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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21) ‘임금의 스승’ 송준길

1606년 12월 28일 한성 정릉동에서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태어났다.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아버지 송이창(宋爾昌·1561∼1627)이 46세에 얻은 늦둥이였다. 태몽은 이웃에 살던 조신(朝臣) 이덕순(李德純)이 대신 꿔주었다. 그의 꿈에 하늘나라 사람이 나타나서 곧 아들을 낳게 될 송이창에게 산구(産具)를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김계휘(金繼輝)가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및 손자 김장생과 김집이 모두 이 집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 불렀다.

송준길이 처음 글을 읽은 것은 9세 때였다. 이때부터 1년 만에 ‘사략(史略)’을 뗐고, 10세 때 쓴 글씨는 당대의 명필 이시직(李時稷)으로부터 “네 글씨가 나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송(兩宋)으로 불리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이 함께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훗날 송시열은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8, 9세 때 송준길의 집에서 자랐는데, 늘 송준길과 옷을 같이 입었다. 내가 입은 옷이 해지고 이가 들끓으면 송준길은 어머니께 말씀드려 자기 옷을 벗어 주었다.”

송준길은 18세 때(1623)부터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김장생으로부터 장차 예학가(禮學家)의 종장(宗匠)이 될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해 가을에 생원진사 초시(初試)에 합격했고, 10월에 유성룡의 문인 정경세(鄭經世)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송준길은 서인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지만, 남인 정경세를 장인이면서 동시에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장가들고 10년 뒤 장인이 돌아가시자 사제(師弟)의 복을 입고 상을 치렀다.

그는 19세 때 생원진사 회시(會試)에 합격했고, 20세 때 별시(別試) 초시에 합격했다. 25세 때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정9품), 27세 때 내시교관(內侍敎官·종9품)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공부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28세 때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어 잠시 취임했지만 장인상을 이유로 곧바로 사임하고 귀향했다. 그 후에도 그는 인조 조정으로부터 대군사부(大君師傅·종9품), 예산 현감(禮山縣監·종6품), 형조 좌랑(刑曹佐郞·정6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정5품),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종5품) 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송준길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투신했던 것은 효종 즉위 후였다. 그는 효종이 즉위한 해인 44세 때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과 집의(執義·정3품)에 임명되었고,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맡아 경연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경연은 임금 앞에서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자리였지만, 신하들에게는 시국을 논하고 임금의 실정을 논박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송준길은 효종 즉위년(1649) 11월 18일 임금을 인견(引見)한 자리에서 횡포를 부린 대군의 가노(家奴)를 처벌할 것을 요청하며 말했다.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반드시 측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측근에게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법관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아우와 자제를 비호하는 기색을 남에게 보이십니까? 이런 일은 향리에서 명예를 지키려는 자들도 수치로 여기는 것인데, 성상의 마음속에 어찌 한 점이라도 편벽된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후 송준길은 효종에 의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정4품), 찬선(贊善·정3품), 사헌부 집의(執義·정3품), 이조 참의(參議·정3품)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했다. 그러나 효종은 벼슬하지 않는 것은 군신의 의리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송준길을 거듭 찾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송시열이 이미 찬선으로 있었지만, 효종은 찬선이 꼭 한 명일 필요는 없다며 송준길을 불러들였다. 결국 송준길도 52세 때 찬선 직을 수락했다.

송준길은 이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효종이 즉위 초에 밝힌 포부를 10년이 다 되도록 완수하지 못한 잘못을 작심하고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효종의 문제는 공사(公私), 시비(是非), 의리(義利), 왕패(王牌)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것에 있다며, 오(吳)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했던 월(越)나라 임금 구천(句踐)을 본받으라고 요구했다. 그러고는 임금이 방사(放肆)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자신도 사마골(死馬骨)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사마골은 죽은 말의 뼈라는 뜻이다. 전국시대 때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곽외(郭외)에게 인재를 추천하게 하자, 곽외가 임금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유래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내관에게 천금을 주며 천리마를 구해 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이미 죽어버려 오백 금을 주고 말의 뼈만 사서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노하자 내관은 죽은 말 뼈도 사왔으니 머지않아 천리마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못 되어 천리마를 세 마리나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인재를 구하려면 나부터 등용하십시오. 그러면 나보다 어진 사람들이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앞다퉈 모일 것입니다.” 송준길이 사마골이 되겠다는 말은 자신이 인재를 불러 모을 구심점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다. 산림(山林) 세력에 대한 그의 위상과 정치적 영향력을 반영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다음 해에도 송준길은 임금의 잘못된 처분을 따끔하게 지적했다. 이때 그가 임금을 가르치기 위해 거론한 것은 ‘논어’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노(魯)나라 애공(哀公)과 공자(孔子)의 문답이었다.

애공 :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따르게 할 수 있습니까?

공자 :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곧지 못한 사람을 버리면 백성들이 따르지만, 곧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고 곧은 사람을 버리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송준길은 이 문답을 인용하면서 효종이 법대로 하는 자는 버리고 법을 왜곡하는 자는 오히려 등용하기 때문에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힐난했다.

효종은 송준길의 직언에 때때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에게 호조 참판(參判·종2품),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종2품), 이조 참판 성균관 좨주(祭酒·정3품) 등의 직책을 거듭 맡겼다. 물론 송준길은 궁궐 내의 은밀한 문제에 대해서도 바른말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송준길이 이런 말도 했다. “궁내(宮內)의 말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궁내의 좋은 말이 외부로 전파되면 아름다운 명예가 되고, 좋지 않은 말이 유출되면 신하들이 듣고서 간(諫)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궁내에서 유출된 말에 설령 진실이 아닌 것이 있더라도, 그런 점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분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송준길은 54세 때 병조 판서(判書·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정2품),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정2품)에 임명되었고, 이해 5월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한 뒤에는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도 송준길은 현종에게 궁궐 밖의 왕자들과 그 부인들이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처소에 절제 없이 출입하며 며칠씩 궁궐에서 유숙한다는 소문이 돈다며, 작은 사랑에 이끌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다시 다음 해에도 송준길은 임금이 궁궐 단속과 친인척 문제에 조금도 사심이 없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며, 임금의 철저한 반성을 요구했다.

효종의 승하로 자의대비의 복제(服制)가 논란에 휩싸이자 송준길은 송시열과 뜻을 같이하며 기년복(朞年服·1년)을 주장했다. 반면에 당시 허목(許穆)을 비롯한 남인 학자들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었지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적장자로 간주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준길은 적처(嫡妻) 소생으로 10명의 아들이 있고 첫째 아들이 죽어 부모가 그를 위해 이미 3년복을 입었는데, 불행히도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차례로 죽어 모두 3년복을 입어야 한다면 그처럼 비합리적인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1년복을 주장한 서인의 논점은 효종의 왕위 계승이 체이부정(體而不正)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체이부정이란 선왕의 혈통은 이어받았지만 적장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적장자였으며, 효종은 적장자가 아닌 서자(庶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이었다. 서인들은 서자를 첩의 아들이 아니라 첫째를 제외한 적처 소생의 여러 아들로 해석했고, 첫째 이외의 아들들을 위해 부모가 1년복을 입는 것은 제왕가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기해년(1659)의 예송을 승리로 이끈 송준길은 이후 현종에 의해 의정부 우참찬, 이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좨주, 의정부 좌참찬(정2품), 세자시강원 찬선 등에 거듭 임명되었다. 그 사이 그가 한결같이 아뢴 말은 임금의 과실은 큰일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작은 일을 소홀히 하다가 끝내는 국가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현종이 안질(眼疾)을 핑계로 국사를 소홀히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송준길은 승지(承旨)에게 문건을 읽게 하여 들으면서 사안의 경중과 우선순위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면 된다며 임금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56세 때 일이었다. 그는 60세 때도 현종에게 장주(章奏)와 송사의 안건들을 쌓아두고 처리하지 않는 병통이 있다며 질책했고, 61세 때는 현종이 자신이 시행한 조치와 정령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으려는(自强不息) 군자의 태도가 없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송준길이 일관되게 임금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임금에게는 반드시 두려워할 만한 신하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송준길이 올린 마지막 상소도 임금의 전교에 분노해서 나온 말들이 많으니 사과의 성지(聖旨)를 내려 뉘우치는 뜻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67세 되던 해(1672) 4월에 올린 상소였다. 그는 그해 12월 2일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손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그의 목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나라 걱정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송준길은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관작이 삭탈되었고, 영조 32년(1756)에야 송시열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어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양송의 문묘 종사는 노론 독주(獨走)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독부(獨夫)의 국정 농단에 맞선 지식인의 저항정신을 현창하려는 여망의 반영이기도 했다.

연세대 교수 (문화일보 11월30일자 26면 20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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