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시민교육의 장? 무기력함 스스로 깨는 자리죠

2016. 12. 2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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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교육] 광장에 나온 청소년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계기로
자발적 정치참여 나선 청소년들

정유라 부정입학·헬조선 현실 등 지적
프랑스·독일 등 고교생도 정당 참여
'미성숙 존재'라는 편견 사라지고
사회 구성원으로 목소리 낼 수 있어야

[한겨레]

11월5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집회에 ‘중고생혁명’이 등장했다. 청소년 600여명이 집회에 참가하고 행진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기특하다, 우리가 미안하다. 너희가 안 나와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주마.”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집에서 공부나 해라.”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이 접한 어른들의 반응이다. 각 지역 시국집회에서 초중고생들의 ‘사이다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청소년’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거나 한편에서는 누가 써준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청소년을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미성숙한 존재로 본다는 방증이다.

최준호(19) 전 중고생혁명 대표는 “이번 집회 때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는 정유라씨 문제와 헬조선 사회에 대한 성토였다”고 했다. 특혜를 이용해 대학에 부정입학하거나 정작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 힘든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는 뜻.

이들은 단순히 불만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7일 전국 청소년 2000명이 자발적으로 꾸린 ‘전국청소년혁명’이 출범했다. 기존의 ‘중고생혁명’과 ‘중고생연대’가 합친 단체다. 그에 앞서 전국와이엠시에이연맹(YMCA)에서는 ‘광장에 나선 청소년들’이란 주제로 청소년정책포럼을 열었다. 집회를 주도한 학생의 생각과 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을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이날 최 전 대표는 “이전에는 청소년 정치참여 활동이 선배나 교사 주도로 이뤄졌다. 교내 서클 형태로 만들어져 선배가 졸업하고 나면 주춤하거나 교사가 훈육의 관점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지금은 청소년들이 직접 조직화해서 ‘당사자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사회·정치 문제가 그 누군가가 아닌 우리 문제이고 현실이기 때문에 사회 주체로서 적극적이고 지속가능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지금 당장 옆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하고, 10년 뒤에는 실업자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국와이엠시에이(YMCA)전국연맹 강당에서 와이(Y)청소년연구소 주최로 청소년정책포럼 ‘광장에 나선 청소년들'이 열려 참가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한국와이엠시에이전국연맹 제공

조혜연(신일비즈니스고 3)양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가결 직후인 10일 집회에 친구와 참여했다. 파주와이엠시에이(YMCA) 청소년운영위원회 활동으로 알게 된 ‘만 18세 이하 참정권 요구 서명’도 사람들에게 받았다. 단순히 집회에서 나온 구호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이 기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호 참사 당시 알고 지내던 선배 몇명이 희생당했다. 우리가 관심을 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됐다.”

조양은 평소 지역을 돌아다니며 고장난 신호등, 시각장애인 보도블록 등 불편하거나 위험한 곳을 찾아 파주시에 건의했다. 무단횡단이 잦은 곳에 펜스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 실제 설치되기도 했다. 교육감선거 때는 친구들과 ‘야간자율학습 폐지’나 ‘학생인권 강화’ 등 의제를 만들어 제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학교에서는 집회에 참여하거나 정치적 발언을 하면 벌점을 받는 등 불이익을 준다. 학생들은 집회 현장에 나간 게 걸릴까봐 다른 학교 학생과 교복을 바꿔 입기도 했다. 일산 대진고 총학생회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학교 쪽이 징계를 주겠다고 해 논란이 됐다.

우리와 달리 해외에서는 청소년의 정치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편이다. 우석훈 ‘내가 꿈꾸는 나라’ 대표는 “한국에서는 청소년을 주체로 보지 않고 가르치고 이끌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고등학생 시절은 시민으로 완성되는 중요한 단계”라고 했다. 그는 프랑스 사례를 들며 “우리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정치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면 학부모들이 항의한다. 학생들도 정치참여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고등학생이 되면 정치적으로 좌우 이념을 고루 접하고 자기 견해나 관점을 갖는 기회가 있어 20대 리더도 나올 수 있는 분위기”라고 했다.

우 박사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고등학교에는 기본적으로 정당 조직이 있다. 예전에 우리도 학도호국단을 뽑았지만 상당히 관제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나 독일은 각 정당과 아나키스트까지 포함해 자체적으로 학생 대표를 뽑는다. 다른 단체와 논쟁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를 자연스레 체득하는 훈련이 된다.

부모들이 학생 집회에 따라 나올 때는 학생 유니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한국 학생들이 부모의 허락을 받고 집회에 갈 수 있는 것과 정반대다. 부모와 함께 나온 청소년들도 청소년 집회로 오지 않고 일반 성인들이 참여하는 집회에 가는 경우가 많다.

2006년 프랑스에서 실업 해소 정책인 최초고용계약법이 통과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고용주가 26살 미만의 사원을 채용한 경우 처음 2년 동안은 특별한 사유 없이도 해고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시작했지만 고등학생까지 합류하며 영향력이 커졌다. ‘나의 미래에 대한 일’이라고 길거리에 나와 선언하는 학생들 뒤로 학부모까지 함께 참여했다.

청소년자치공동체 아지트틴스의 신희경 대표도 “독일은 인문계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만 가도 지리나 사회시간에 지역과 연계해 활동한다. 청소년들도 정당에 가입해서 발표를 한다. 우리처럼 특정 사안이 생겼을 때가 아니라 평소 사회참여가 일상화돼 있는 셈”이라고 했다. “독일에서 대학 등록금을 받거나 학제를 줄여서 미국 시스템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교사와 고등학생들이 대학생 시위에 같이 참여했다. 특별한 청소년 몇몇이 모여서 하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이번 집회에 나서는 것을 단순히 민주시민교육이나 역사교육의 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대한민국 중고생으로 겪어왔던 설움과 분노가 터졌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벼랑 끝에서 생존을 위해 친구와 경쟁하는 현실과 “돈이 없으면 너네 부모를 탓해”라는 조롱의 눈빛을 비판하기 위해 뛰쳐나왔다는 것.

신 대표는 “외국처럼 학교 수업이나 노동조합 활동을 통한 교육과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온 건 대단하다”고 했다. “집회에 나온 아이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배운 그대로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동안 어른들은 ‘현실은 교과서와 다르다’며 자신들이 만든 잣대와 사회적 기준을 들이대 애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광장에서 그 무기력함을 스스로, 조금씩 깨나가고 있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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