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 궂은 날씨도 못 끈 성난 '민심'.. 분노를 해학·풍자로 승화

김준영 2016. 11. 2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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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150만 인파 운집

26일 오후 8시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 전까지 광장을 가득 밝혔던 150만의 촛불이 약속이나 한 듯 꺼졌다. 인근 상점들도 함께 소등했다. 1분 후 다시 빛이 일며 일제히 어둠을 가르며 뜨거운 환호와 함께 광장이 환해졌다.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낸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메시지였다.

박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하며 5주째 이어진 이날 서울 도심 촛불집회에는 또다시 ‘헌정 사상 최다 인파’ 기록을 썼다. 형사 피의자 신분으로 국민과 약속한 검찰 조사마저 거부한 채 버티고 있는 박 대통령을 기필코 끌어내리겠다는 국민의 결기가 무섭게 나타났다는 평이다. 하지만 국민의 분노는 우리 특유의 해학, 풍자와 어우러진 축제의 한마당으로 평화롭게 표출됐다. 

26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5차 주말 촛불집회 도중 한 어린이가 서울 종로구 내자동 로터리에서 청와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찰버스 차벽에 꽃 모양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제5차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일부 시민이 횃불을 든 채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제5차 주말 촛불집회에서 한 여성 참가자가 황소에 올라탄 채로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직접 민주주의의 열망으로 든 촛불

집회 참가자들은 정오 무렵부터 도심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토론회나 시국선언, 시민발언 등에 참여했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2차 시민평의회는 시민들이 직접 나서는 ‘만민공동회’로 단장했다. 참가자들은 권력의 독점을 막는 정치체제에 대한 고민부터 검찰 개혁, 전국적인 시민평의회 등 다양한 제언을 쏟아냈다.

최요섭(32)씨는 “언제나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지방자치단체장에게만 해당하는 주민소환제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까지 확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승민(50)씨는 “우리 국민이 어느 때보다 엄중한 역사의 기로에 서 있다”며 “박 대통령이 퇴진할 때까지 평화적 방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국교수협의회 등이 모인 ‘전국교수연구자 일동’은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인근에서 “박 대통령이 비선 및 재벌들과 파괴한 헌정을 회복하고 1987년 이래 지속된 국가사회질서를 넘어서는 민주공화제를 재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본 집회에 앞서 오후 4시 청와대 인근 3개 경로로 사전행진한 끝에 청와대를 포위하는 형태의 ‘인간 띠 잇기’도 실현했다. 이들은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든 채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과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세움아트스페이스 인근에서 ‘박 대통령 퇴진’의 함성을 질렀고, 한편에서는 시민발언을 그치지 않았다.


◆분노 속 품위 잃지 않은 촛불

사상 최대인 150만 인파는 분노의 함성을 쏟아내면서도 촛불파도를 타고 노래하는 한편 눈물을 흘렸다.

오후 6시부터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된 본 집회에는 여러 시민의 발언뿐만 아니라 각종 공연이 곁들여졌다. 뮤지컬 배우들은 ‘레미제라블’의 대표곡인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를 부르던 중 ‘너는 듣고 있는가’ 가사 부분에서 일제히 손가락으로 청와대를 가리켜 큰 호응을 얻었다. 가수 안치환은 “원곡 훼손을 정말 싫어한다”면서도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사람을 하야로 개사해 불렀고, 양희은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널리 불린 곡 ‘아침이슬’로 시민들의 합창을 끌어냈다.

무대 밖에서는 시민들이 저마다 풍자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배우 김한봉희(34)씨는 흰색 셔츠에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뒤 휴대전화를 쥔 최순실씨의 모습을 감쪽같이 연출했다. 청와대가 발기부전치료제를 구입한 사실을 풍자한 사람들은 ‘한국 고산지 발기부전 연구회’란 이름으로 ‘하야하그라’란 깃발을 들었고, 어떤 이들은 ‘박근혜 체포단’, ‘하야하소’ 등 문구를 두른 소에 올라탄 채 광화문광장을 활보했다.

또한 광장 한켠에는 박 대통령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얼굴을 붙인 펀칭머신, 미르재단과 검찰 등의 로고가 붙은 두더지잡기 게임기 등이 마련돼 참가자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나섰고, 곳곳에서 풍물패의 가락이 집회 내내 이어졌다. 본 집회와 2차 행진이 끝난 뒤에는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하야하락(rock)’ 공연이 자정 넘도록 흥을 이었다.

촛불인파는 집회가 회를 거듭할수록 무섭게 늘고 있지만 특별한 사건·사고가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은 점은 시민들의 자존감을 더욱 높였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인천에서 온 상인들이 ‘하야수(水)’를, 인근 돌담에서는 인천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한 부부가 ‘하야빵’을 무료로 나눠줬다. 경복궁역 인근의 한 카페는 하루 장사를 접고 급수쉼터로 탈바꿈했고, 눈비 내리는 날씨 속에 핫팩이나 촛불을 건네는 시민도 있었다.

대중교통 막차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는 참가자의 모습이 목격돼 성숙한 시민의식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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