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식물학계의 '큰 별' 故 전의식 선생님의 3주기를 맞아..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 2016. 11. 19.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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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약간 사적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제가 존경하는 식물학자는 일본의 ‘마키노 도미타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카이 다케노신’이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식물 연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마키노 도미타로를 최고의 식물학자로 꼽습니다.

마키노 도미타로(사진 출처 : 위키백과)

그는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입니다. 저 역시 별다른 스승 없이 독학으로 식물을 공부했기에 같은 ‘독학파(?)’라는 이유로 그를 동경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일본인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도 되는 일이 제게 생겼으니 그게 바로 전의식 선생님과의 만남입니다.

식물 공부를 하다 보면 해당 식물의 첫 발견자로 자주 언급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전의식 선생님입니다. 수많은 외래종을 찾아내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셨던 선생님의 업적은 한국 식물학계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생물교육 전공이시긴 하나 교장 선생님으로 퇴임하셨고, 거의 독학으로 식물을 연구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사실을 안 다음부터 저는 선생님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운 좋게도 당시 제가 활동하던 동호회에 선생님께서 간혹 나오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용문사에서 찍은 전의식 선생님 모습.

기회를 노리던 중 용문사 은행나무 보러 가는 날에 선생님께서 참석하신다는 걸 알고 저도 얼른 신청해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처음 뵌 선생님은 너무나도 인자하고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존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겸손함까지 갖추고 계셨습니다. 그날 이후 제게 마키노 도미타로는 그냥 일본인 학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선생님을 제대로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 아쉬움에 그 당시 제가 신문에 연재하던 글에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큰잎쓴풀’에 대해 썼습니다. 선생님께서 큰잎쓴풀의 거대한 군락이 삼척 쪽에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선생님과 함께 길동무가 되어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입니다.

<큰잎쓴풀 자세히 알기>

큰잎쓴풀

얼마 후 제 예상대로 그 글을 보신 선생님과 연락이 닿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게 다 초면에 연락처를 달라고 하지 못한 제 소심한 성격 탓에 생긴 일입니다. 다음 해인 2009년에는 선생님과 함께 전국 환경 조사에 참여해 1년 동안 충남의 부여와 은산 일대의 식물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불암초를 발견한 것은 잊지 못할 일 중 하나입니다.

<불암초 자세히 알기>

식물에 대한 선생님의 작명 솜씨는 정말 탁월합니다. 한번은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에서 제가 처음 발견한 식물을 보여드렸습니다. 그곳 바닷가 모래땅에는 냉이처럼 분명히 십자화과 식물로 보이는,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도감에는 전혀 등재되지 않은 식물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불암초

그걸 보신 선생님 역시 처음 보는 거라고 하시면서 저녁에 메일을 보내오셨습니다. 이름을 ‘붓냉이’라고 하자고. 그때 저는 선생님의 창의적인 작명 솜씨에 감탄했습니다. 그 식물의 열매가 정말로 짧은 붓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식물이 혹시 이 식물이 아니냐며 뒤늦게 학명 하나를 보내오셨습니다. 그 학명을 검색해 보니 얼마 전에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해 ‘서양갯냉이’라는 이름으로 학회지에 발표된 식물이라는 자료가 떴습니다.

동쪽 바닷가에서 발견된 식물이 어째서 서쪽 바닷가에서도 자라는지 모르겠으나 같은 식물이 분명했습니다. 서양갯냉이라는 그저 그런 이름보다 선생님께서 지으셨던 붓냉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창의적이라는 생각에 선수를 빼앗긴 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서양갯냉이

<서양갯냉이 자세히 알기>

선생님께서 발견해 이름 붙이신 식물은 수십 종이 넘습니다. 제가 아는 것만 해도 가시상치, 가시도꼬마리, 서양메꽃, 공단풀, 애기달맞이꽃, 창명아주, 솔잎미나리, 미국나팔꽃, 개꽃아재비, 만수국아재비, 애기나팔꽃, 주홍서나물, 미국실새삼, 미국물칭개, 긴잎달맞이꽃, 냄새명아주, 털갓냉이(유럽장대), 긴갓냉이, 냄새냉이, 우단담배풀, 나래가막사리, 노랑개아마, 미국쥐손이 등이 모두 선생님에 의해 처음 발견되고 이름 붙여진 식물입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과 경기도 여기저기에 잡초처럼 퍼져 자라는 냄새명아주를 알아보고는 또다시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냄새명아주 자세히 알기>

냄새명아주

저처럼 선생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선생님의 성품과 관련된 일을 많이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원색 일본의 난』이라는 책에 얽힌 사연만 해도 그렇습니다. 물욕은 없으나 책 욕심은 많다고 하는 선생님께서 비싼 가격 때문에 몇 번을 주저하다가 큰 맘 먹고 사 오신 책이 그 책입니다.

그걸 난초를 연구하는 제주의 모님께 선뜻 빌려주셨는데 1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채근하지 않으셨는데, 그걸 안 故이영노 박사님께서 제주 모님한테서 받아 전의식 선생님께 돌려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제주 모님이 염치없지만 그 책을 자신에게 줄 수 없느냐고 해서 선생님은 책은 꼭 필요한 사람이 가져야지 하는 생각에 기꺼이 주셨다고 합니다. 그 후 난초를 연구하는 저의 지인께서 그 책의 존재를 알고는 제주 모님한테서 받아와 복사했으면 한다는 연락을 선생님께 취했습니다.

전의식 선생님의 많은 사연이 깃든 책 ‘원색 일본의 난' 표지

그래서 마침 제주도 탐사를 하고 있던 저에게 그 제주 모님한테 가서 그 책을 받아오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저는 별생각 없이 가서 받아왔고, 그 참에 지인께서 몇 부 복사해서 선생님은 결국 복사본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참 많은 사연이 깃든 책이라고 하신 그 책을 저도 갖고 있어서 그 책을 만질 때마다 선생님의 인자하신 성품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생님의 사연이 저에게로 전이된 사연이 담긴 책으로 남게 됐습니다.

점점 각박해지는 이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이 더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 한 번 내는 법 없이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해주셨던 선생님. 따로 스승이 없는 제게 유일한 스승이나 다름없으셨던 선생님.

강원도 영월 어느 봄날의 전의식 선생님

오는 11월 22일이면 선생님의 3주기가 됩니다. 제가 만든 나무도감을 받아보셨어야 했는데… 제가 발견하고 선생님께서 이름 붙이신 동강제비꽃을 논문으로 발표하셨어야 했는데… 저의 늦은 결혼식 주례를 봐주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왜 그토록 서둘러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제가 지우지 않고 있는 선생님의 번호로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 아, 혁이삼촌! 수고가 많아요. 허허” 하고 받으실 것만 같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선생님을 생각하고 추모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나 계실까요? 모르고 계실 것 같기에 선생님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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