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냄새 풍기던 詩畫展의 추억

이현수·소설가 2016. 11. 17.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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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수의 도란도란 식탁] 간장 게장

봄과 가을은 꽃게의 계절이다. 봄엔 암게, 가을은 수게. 내가 제대로 된 간장 게장을 먹은 건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당시 나는 김천여고 앞 모암동에서 자취했는데 옆방엔 상주에서 온 아이가 살고 있었다. 휴일 옆방에서 째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또 연탄가스를 마셨나. 문을 열어보니 검은 간장이 방바닥에 흥건했고 수게 서너 마리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집에서 올려 보낸 간장 게장을 실수로 쏟은 모양이다. 옆방 아이는 간장에 젖은 일자 통바지를 움켜쥔 채 울상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 옷은 맥향을 '까러' 갈 때 입을 단벌 바지였기 때문이다.

옆방 아이와 나는 김천여고 문예반이었다. 김천여고는 명록, 김천고는 맥향. 김천 시내 여섯 고등학교 가운데 문예반이라곤 두 학교밖에 없어서 사이가 좋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대대로 앙숙이자 라이벌 관계였다. 1년 동안 갈고 닦은 문재를 시화전에서 뽐냈는데 그러면 우르르 몰려가 상대의 시를 물어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날이 맥향 시화전의 마지막 날이었다.

옆방 아이는 속이 상해 게장은 쳐다보기도 싫다며 점심을 쫄쫄 굶었고, 앞방에 살던 문경에서 올라온 3학년 언니와 나만 포식했다. 꽃게의 딱지를 떼자 세상에나, 한 떨기 노란 꽃이 핀 것 같았다. 딱지는 비벼 먹게 따로 놔두고 게의 몸통을 절반 갈랐다. 그제야 드러나는 꽃게의 속살.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탱탱한 게살이 갓 지은 쌀밥 위로 점점이 떨어졌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던 열일곱 살, 간장 게장에 비벼 먹던 맛이 오죽했겠는가.

게장 백반으로 점심을 먹고 옆방 아이와 사전 모의 장소로 출발했다. 한 달 전, 명록 시화전을 열었을 때 맥향 애들이 쳐들어왔다. 그날 맥향 소속 안경잡이 하나가 방명록에 남긴 글이 가관이었다.

"미래의 내 여자 혹은 내 집안 사람이 될 명록의 여인들이여! 훗날 그대들이 너무 나대지 않게 미리 밟아둘 필요성을 느껴…."

이런 식으로 시작된 글에 우리는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고 칼 같은 복수를 다짐했던 터였다. 사전 모의 장소인 김천역 앞 뉴욕제과점(뒷날 소설가가 된 김연수네 집)으로 나갔더니 명록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맥향의 시를 일대일로 깔 것인지 단체로 깔 것인지 의논하는 자리였다. 모의를 끝내고 각자 꽃 한 송이씩 샀다. 당시 전통이 그랬다. 피바다가 되도록 깐 후 상대 액자 밑에 꽃을 살포시 달아주고 나오는 게 상례였다. 그걸 '아까징끼'라 했다.

시화전 전시장에 단체로 들어서자 "명록 애들 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꽃으로 답방의 예를 갖췄고 일렬로 늘어선 남학생들 시선을 정수리로 느끼며 액자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시 감상은 뒷전인 채 무슨 말로 어떻게 공격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옆방 아이 몸에서는 간장 내가 은은하게 났다. 게장에 젖은 바지를 아쉬운 대로 빨았지만 냄새까지 지우진 못했다. 하여 전의에 불타오른 옆방 아이는 맥향 방명록에 비평 글을 한 수 남겼는데 그 글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김군의 글을 볼작시면 그 유치함과 우매함이 입술로 쾌감을 얻는 구순기(프로이트에 따르면 생후 18개월)의 옹알거림과 다를 바 없고… 못내 안쓰러워 이 글을…."

문체는 장중하나 장작 패듯 상대를 두들겨 패는 글이었다. 결론은 아가야 젖 좀 더 먹고 와라, 였다. 점심을 두 그릇이나 배불리 먹은 나는 만사태평인 상태가 되어서 내년엔 합동 시화전을 열자고 어설피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고 옆방 아이는 그날로 명록의 퀸에 등극했다.

"왜 그 간장 게장을 탐했던고…."

나는 뒤늦게 책상을 두드리며 후회했다.

지금도 늦가을이 되면 모암동 자취방에서 먹었던 그 간장 게장이 떠오른다. 명록과 맥향의 시화전, 거친 혀들의 전쟁과 다름없었던 방명록의 글귀들도. 첨언하자면 미래의 내 여자 운운했던 김군은 훗날 옆방 아이와 결혼했고 지금껏 울산에서 잘 살고 있다. 그들의 화목한 결혼 비결은 감성이 잘 맞아서가 아니라 장모님의 뛰어난 게장 솜씨 덕분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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