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다른 삶에 용기를 더하는 또 다른 학교

2016. 11. 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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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하는, 다시 찾는 나는 누구인가?
“남이 만들어준 명함 반납하고 빨리 퇴직하고 싶다”

일, 행복 그리고 일자리 “주 30시간 노동제 사회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위한 시간뿐 아니라 시민들 간의 새로운 연대를 구축할 시간, 개인적 즐거움을 누릴 시간, 새로운 삶의 방법과 주체성의 모델을 창조할 시간을 허락할 것이다. … ‘일’을 노동시장의 고용체계로 규정하는 산업화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무엇이 일이고 일이 아닌지 그 정의를 일자리와 고용 여부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일을 통해 돈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 덕에 각자의 일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오롯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며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사회에서 우리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일’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5월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50+인생학교에서 1기생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 정광필 제공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한다.

얼마 전까지 은퇴하고 몇 년 여행 다니면서 쉬다보면 경로우대증이 나왔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손주 재롱을 보면서 10년쯤 편히 지내다 가면 되었는데, 이제는 살아온 만큼을 더 살아야 한다. 곳곳에서 노후자금 준비를 강조하지만 50년 버틸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가정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최악의 경우 퇴직금으로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밑천 털리고 노년기에 극빈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이던 지금의 50대는 자신이 활동한 분야에 풍부한 노하우와 폭넓은 네트워크, 경제력, 건강한 몸과 의지를 갖고 있다. 세상을 바꾸어본 경험도 있다. 역사상 최강의 50대가 아닐까. 하지만 당장 할 일이 없다. 게다가 5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더 살아야 한다. 50+의 시간, 과연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지난겨울에 시작해서 봄꽃이 다 필 때까지 궁리가 많았다. 조직과 가정을 위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하다보니 정작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하지 못한 분들. 그들에게 필요한 게 뭘까? 이것저것 챙길 게 많겠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 결론은 발심! 그래서 우리는 ‘작지만 의미 있는, 조금은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에 초점을 맞췄다.

1기를 마치고 돌아보는 자리에서 자치회 회장님은 ‘50+인생학교’의 의의는 “처음 표방한 ‘조금은 다른 삶에 용기를 더하는’ 것에서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이라고 했다. 또 몇몇 분들은 손에 잡히는 대안이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렇다. 여기에서 ‘용기’를 얻어 전문 과정이나 새로운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로 나서야 한다. 50+인생학교는 입문 과정이다.

어떤 분들을 모실 것인가? 요즘 교양 강좌가 넘친다. 처세술을 가르치는 곳도 많다. 그러다보니 이런 곳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교육쇼핑족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싱싱한’ 분들을 원한다. 또 연령, 성별, 경제력, 사회 경험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구성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수강생이 아니라 50+인생의 새로운 영역을 함께 개척해나갈 ‘동반자’를 원한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알아듣기 어려울 것 같아 지원서 양식을 바꾸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비워야 할 것’과 ‘앞으로 살아갈 삶에서 새롭게 더해야 할 것’을 서류(우리는 이를 ‘마음준비서’라 불렀다)에 적도록 했다. 그리고 선착순이 아니라 서류 심사를 통해 동반자를 선정했다. 이렇게 나름 낮지 않은 문턱을 넘어온 분들이라 그런지 다들 진지하게 50+인생학교에 참여했다. 마치 ‘범생이’들이 모인 학교 분위기다. 학장인 내가 정숙한 분위기를 깨려고 일부러 “중간에 화장실 가고 물 먹으러 가는 사람도 없나요? 이거 너무 범생이 분위기인데요?”라는 말을 던질 정도였다.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비 개인 5월의 봄날, 입학식을 했다. 나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의전이나 겉치레, 의례적으로 하는 말 따위를 걷어내고 알맹이 중심으로 가겠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너무 좋은 교육 환경이 되지 않도록 신경 쓰겠다. 너무 좋은 교육 환경은 학습자의 열정과 창발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강의를 들으러 온 수강생이 아니라 50+의 삶을 함께 만들어갈 동료인 만큼 부족한 부분을 함께 메우고 해결해나가자.”

우리는 이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 애썼다. 아홉 번째 워크숍 때 박원순 서울시장이 모두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평소 저녁은 커뮤니티별로 김밥을 먹곤 했는데, 시장님은 따로 접대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또 시장님의 동선과 예측할 수 없는 대화 내용을 걱정하는 말도 많았다. 하지만 협의 끝에 우리는 처음 표방한 원칙을 견지하기로 했다. 그래서 박원순 시장과 내가 나무젓가락을 들고 커뮤니티별로 돌면서 김밥을 얻어먹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시작과 끝 시간만 정했다. 실제 박원순 시장과 인생학교 동반자들이 김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눈, 그 자리는 정말 예술이었다. 각본이 있었다면 얼마나 어색하고 삐거덕거렸을까? 짬이 나서 각 커뮤니티와 사진도 찍었다. 나는 50+인생학교 구성원들의 문화와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새삼 느꼈다. 아마 시장님도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리라.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승민과 서연

2016년 7월 서울 불광동 서북 50+인생학교 캠퍼스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이 탱고를 추고 있다(위쪽). 지난 5월 1기생들이 다함께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정광필 제공

본격적인 워크숍은 연극과 영화로 시작했다. 60명을 30명씩 나누어 각각 2주씩 진행했다. 연극이라는 명칭 때문에 처음에는 겁먹고 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연극놀이에서 아들 노릇도 하고 엄마 노릇도 하면서 자기 방어의 두꺼운 벽이 무너졌다. ‘나’를 몸으로 표현하면서 여기저기 굳어 있던 몸이 풀렸지만 굳게 닫혀 있던 마음도 풀렸다. 김창호 총무는 자치회 사회를 보면서 “연극 덕분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회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영화 수업에서 우리는 첫사랑의 추억을 담은 영화 <건축학 개론>을 다시 보면서 남자 주인공 승민의 찌질함을 마음껏 ‘씹어’댔다. 그리고 여주인공 서연이 세인들의 욕망을 따라가다 좌절하고, 첫사랑을 다시 만나 제주도에 자신의 집을 개축해가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자기 얘기를 섞어갔다.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하는 지금, 다시 찾는 나는 누구일까?

일곱 번째 워크숍 뒤 우리는 서울시 중구 덕수궁에서 번개 모임을 가졌다. 모임 후 뒷풀이에서 변영수, 현길용 두 분이 하는 말씀이 재미있다. “옛날엔 영화가 그냥 재미있냐 없냐, 주인공이 예쁘냐 별로냐였는데 말이죠. 요즘엔 영화를 그냥 보기가 힘들어요. 한 장면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고, 저 멍한 시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다보면 옛날 기억들이 떠올라요. 다음에도 여기 계신 분들이랑 영화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인생학교 후반에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다른 삶에 도전한 다섯 분을 모시고 ‘사람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중 이재흥 서울혁신파크 비영리IT지원센터장의 책장을 열었을 때를 스케치해보자.

‘정보기술(IT)을 통한 세대 간 협력하기’가 주제였다. 책장을 열자마자 바로 “비영리기구(NGO)나 벤처기업을 하면서 많이 망했는데 그 이유가 뭐냐?”는 돌직구 질문이 나왔다. 그러자 온라인 소통 능력이 부족해서, 기관에 밉게 보여서, 모금 능력이 부족해서, 그리고 구성원끼리 서로 미워해서 망했다고 답했다.

이어 “청년세대와 함께하는 50+세대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힘주어 말했다. “우선, 너무 경직되어 있다.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둘째, ‘자식같이 생각하니까’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자기 생각을 강요한다. 젊다고 무시하지 말고 젊은 대표를 대접해야 한다. 셋째, 문서 정리나 회의록 작성 같은 일을 남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다. 노티 내지 말고 자기 완결적으로 일처리해야 한다.” 모두들 뜨끔한 표정이었다.

자치회 구성이 처음 계획보다 한참 늦어졌다. 초반에 연극, 영화를 두 조로 나뉘어 진행하니 구성원들이 서로를 알 수가 없었다. 구성원들이 서로 파악할 시간을 기다린 측면도 있지만 1기 자치회 구성이 50+인생학교의 미래라 여겼기에 신중해진 탓도 있다. 그런데 막상 회장 선출에 들어가니 초반 4주 동안 함께한 조별로 표가 갈려서 결선투표까지 갔고 결국 2표 차로 결정 났다.

회장, 부회장, 총무가 선출되고 6개 커뮤니티별 대표까지 정해지면서 조직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시장 간담회, 졸업식 준비, 졸업여행 준비, 동문회 회칙 제정 등 캠퍼스 실무진과 학장단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한꺼번에 쏟아졌지만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각 성원들이 가진 열정과 에너지를 자치회가 분출할 테니까.

역시 자치회가 굴러가기 시작하니까 그동안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궁금할 만큼 역동적인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제 그 힘으로 커뮤니티가 굴러가고, 동문회가 자리잡아 이후 후배들에게 전통을 전하리라.

그래도 2기부터는 자치회 구성 시기를 너무 빨리는 아니지만 조금은 당겨야겠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어깨동무

마지막 워크숍은 온전히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다. 나는 50+인생학교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출사표를 들어보자는 말로 마지막 워크숍의 문을 열었다. 그때 들은 주옥같은 이야기 중 몇 개만 소개한다.

“현직 고등학교 교감이다. 무기력했다. 인생학교 중간부터 에너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모 교장에 도전해서 마지막 인터뷰 중이다.”

“몸과 마음을 비운다. 숨을 깊이 쉬고 받아들인다. 자세를 낮추고 어깨동무한다. 그리고 느리게 느리게 숲길을 걷는다.”

“욕심은 많이 버리지 못한 거 같고 용기는 생긴 거 같다. 몸으로 마음으로 익히는 후반을 살아야겠다.”

“내가 잘하는 건 항상 회사일. 여기 와서 몸, 마음, 손끝으로 하는 일이 진짜 잘하는 일이구나를 느꼈다. 남이 만들어준 명함 반납하고 빨리 퇴직하고 싶다.”

“비슷한 사람들 60명을 동창생으로 갖는 게 연애하는 만큼 재미있었다.”

8월에 자치회 대표들과 함께 1기 평가회를 마쳤다. 졸업식과 다음날 이어진 1박2일의 졸업여행, 그리고 평가회까지 마쳤으면 1기를 마무리했다고 봐야 하는데 1기 모임은 계속 이어진다.

정광필 50+인생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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