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금 봉투 쓸 때마다 부끄러운 내손.. "악필 벗어날래" 필사 열풍

"진심 어린 사과의 마음을 전할 기회를 놓친 것을 계속 후회하며 죄송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제 진심이 전달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광복절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욱일기 디자인이 들어간 문구를 올려 대중의 공분을 산 소녀시대 티파니는 두 차례에 걸쳐 자필 사과문을 올리며 용서를 구했다. 배우 최여진은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보신탕을 먹는다는 양궁 대표 기보배 선수에게 비난을 퍼부어 논란이 된 어머니를 대신해 자필로 사과문을 적었다. 두 사람뿐 아니다. 대중 비난의 중심에 서거나 용서를 구할 때 연예인과 정치인들은 자필 사과문을 내밀며 고개를 숙인다. 디지털 시대 그들은 왜 직접 손으로 사과문을 써내려가는 걸까. 티파니의 사과문대로 '진심'을 '전달'하는 데 손글씨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톡톡', 키보드로 '타다다' 두드려 쉽게 쓰고 지울 수 있는 글은 가볍다. 손으로 꾹꾹 눌러 새긴 글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진심'을 읽고 느끼고 싶어 한다.
내가 쓴 손글씨가 작품?

숨 가쁘도록 팽팽 돌아가는 디지털 시대에 어눌하지만 진심 어린 마음이 그리웠던 걸까. 손글씨가 아날로그 감성을 북돋우는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각종 손글씨 대회가 성황이고, 필기구 판매량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올해 두 번째 열린 '교보 손글씨 대회'는 경쟁률이 116대1에 달했다. 책에서 감명받은 문장을 발췌해 각자의 필체로 정성 들여 써내려간 손글씨 작품을 공모했다. 박보검 신드롬을 일으킨 사극 '구르미 그린 달빛'도 제목에 대한 캘리그래피(Calligraphy, 개성 있는 글자체)를 공모해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구그달'뿐 아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 제목은 물론 광고 카피, 상호, 제품명은 캘리그래피로 작업하는 것이 대세다. 관련 서적도 불티나게 팔린다. 예스 24에 따르면 캘리그래피 관련 도서 판매량은 2013년(2899권)에 비해 올해 10월 기준 10배(2만264권) 가까이 늘었다.
이 분야 베스트셀러인 '내 손글씨로 완성하는 캘리그라피'의 저자 정윤선씨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글자라는 의미와 아날로그적인 느낌 때문에 배우려는 사람들이 느는 것 같다"고 전했다.
캘리그래퍼 공병각씨는 "글씨 쓰는 일 자체가 줄어들면서 잘 쓴 글씨는 어느새 '희소성'을 갖고 특별해졌다"고 했다. "글씨가 기록이라는 본연의 기능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바뀌면서 캘리그래피와 손글씨가 주목받는다"는 것! 실제로 공씨는 13년 전 한 캔커피 지면 광고에 손글씨를 본격 사용했다. 캘리그래피라는 용어가 생소했던 시절 컴퓨터 서체를 벗어난 새로운 시도였다. 색연필의 질감이 살아있는 특유의 글씨체는 '공병각체'라는 폰트로도 만들어졌다.

도구의 제약이 없다는 점에서 SNS에 손글씨를 올려 자랑하는 아마추어도 많다. 인스타그램에만 캘리그래피 관련 게시물이 110만개가 넘는다.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조희영(32)씨는 "손글씨가 작품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며 "호기심에 캘리그래피 강좌를 수강한 뒤 혼자서 연습하는데 쓸 때마다 스트레스도 풀리고 예쁘게 쓴 작품은 SNS에 올리거나 선물하기도 한다"고 했다. 대학생 이성훈(27)씨는 "캘리그래피를 연습하면서 글씨체가 단정해졌다. 정성 들여 글씨를 쓰고 나면 힐링이 된다"고 말했다.
문장 따라 쓰다 보면 힐링!
필사(筆寫)도 인기다. 예스24에 따르면 2013년(162권)에 비해 필사 관련 도서 판매량은 올해 10월 기준 100배(1만6204권) 가까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작가 지망생들이 문장력을 늘리기 위해 고전이나 작품을 따라 쓰던 필사와는 다르다. 최근 출간되는 필사 책들은 문장을 따라 쓸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고 시나 짧은 문장들을 쉽게 따라 쓸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직장인 서미주(39)씨는 지난해 서점에서 우연히 필사책을 접하고 취미로 한두 권씩 써내려 간 것이 벌써 11권째다. "차분히 앉아서 문장을 읽고 천천히 손으로 따라 쓰다 보면 복잡하게 얽힌 일들이 한올한올 풀리는 것 같아요."
뇌과학자 구보타 기소우 교토대 명예교수는 저서 '손과 뇌'에서 "손으로 하는 단순한 반복은 신경계를 활성화해 정신의 안정이 유지된다"고 했다. 소설가 조정래는 "필사는 '열독 중의 열독'"이라며 필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필사는 좋은 글씨체를 연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필사의 기초―좋은 문장 잘 베껴 쓰는 법'의 저자 조경국씨는 "꾸준히 필사하면 그걸 응용해 자기만의 글씨체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세요
손글씨 바람은 대학가와 취업 전선에도 불고 있다. 서류 전형에서 자필 자소서를 요구하는 기업들이 하나둘 늘고 있는 것. "손글씨로 직접 쓴 자기소개서를 보면 지원자의 성격과 글쓰기 내공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가에는 자필 과제가 부활했다. '자필 과제 하다 손 떨어졌어요' 같은 어리광 섞인 게시글이 SNS에 올라온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는 "리포트를 손으로 쓰는 동안이라도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며 "생각의 흐름과 흔적이 손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사고가 더욱 깊어진다"며 자필 과제를 내는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로 손으로 필기를 하면 기억력과 이해력이 높아진다. 미국 워싱턴대학교 교육심리학과 버지니아 버닝거 박사팀의 연구 결과는 흥미롭다. 초등학교 2~5학년을 대상으로 프린트하기, 영어 필기체 쓰기, 자판 치기 등 방법으로 단어 암기 실험을 했더니 손글씨로 단어를 외운 아이들이 프린트물을 보고 외거나 자판을 쳐서 외운 아이들보다 더 많은 단어를 더 빠른 속도로 암기하고 더 많은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국립연구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연구 결과도 비슷하다. "손으로 글을 쓰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특별한 신경회로가 있어 배움이 더 쉬워진다"는 것. 손은 뇌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는 운동기관일 뿐 아니라 뇌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기관이기 때문이다. 손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전두엽에 가해지는 자극이 커지고 그 과정에서 인간 두뇌의 중추인 전두엽은 자극을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창의적 활동을 한다. 구보타 교수는 "손을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의 진화도 멈출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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