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심리학자 김태형 "놀이 빼앗는 것은 자유 박탈 행위"

2016. 10. 10.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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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는 '자유'..아이는 놀 때 가장 행복"

"놀이는 '자유'…아이는 놀 때 가장 행복"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인간은 ‘호모 루덴스’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얘기다. 유희는 본능이나 다름없다. 맘껏 뛰놀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떤가. 특히 아이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일상생활에서 놀이와 함께하고 있는가. 놀이를 박탈당한 채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고 있진 않은가. 원인이 대체 뭐고 해법은 무엇일까. ‘

얼마 전 한 조사 결과는 어두운 현실에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렸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발표한 ‘2016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연구’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2개 회원국 중 가장 낮았다. 조사 대상 어린이와 청소년의 5명 중 1명은 자살 충동을 경험했다고 토로했다. 삶의 만족도에 성적이나 집안 경제 수준보다 부모와의 화목한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응답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과도한 교육열은 아이들의 미래까지 파괴"

심리학자 김태형(51·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씨는“현대 한국인의 과도하고 비뚤어진 교육열은 아이들에게서 놀이를 박탈하는 주범일 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행복, 나아가 아이들의 미래까지 파괴하고 있다”며 한숨짓는다.

올해 들어 잇달아 펴낸 저서 ‘실컷 논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갈매나무)와 ‘청춘심리상담’(다시·봄)을 통해서다. 김씨는 “놀이는 바로 자유”라며 “놀이를 빼앗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인간 본성이자 행복의 근원인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경계한다.

“아이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놀이를 선택하고, 육체적·정신적으로 놀이에 몰입하며 그 과정에서 기쁨과 행복 같은 감정을 체험합니다. 아이들은 놀 때 가장 즐거워하지요. 이 자유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만큼 이를 박탈당하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무력감이죠. 이게 일상화하면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의 말처럼 ‘학습된 무력감’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김씨는 연합이매진 10월호와 인터뷰에서 놀이를 빼앗는 것, 다시 말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 유린 행위라고 단언했다. 최근 한국사회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해왔고, 이는 무력감이 만연하는 현상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통제 욕구를 상실한 채 외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선택 장애’에 빠지게 됐다고 안타까워한다. 대표적 현상 중 하나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인 “몰라요”를 꼽았다. 주체적인 자기 선택을 하지 못하고 객체로서 그저 외부 선택만 기다리는 피동적 존재로 전락한다는 얘기다.

놀이란 과연 뭘까? 김씨는 놀이가 아무 의미 없는 단순 유희가 아니라 성장 이후 생존에 필요한 사냥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으로 본다. 어린 시절의 놀이를 통해 훗날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갈 능력, 즉 원만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새끼였을 때 또래들과 놀 기회가 없었던 원숭이들은 성장 후에도 다른 원숭이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지요. 어린 시절에 또래들과 놀이를 통해 대인관계 능력을 기르게 되는데 이를 위해선 놀이가 필수라고 하겠습니다. 놀이 경험이 없을수록 정상적이고 건강한 대인관계를 맺기 어렵고, 원만한 사회 활동 역시 어려울 가능성이 커요. 저희 세대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저도 어렸을 때에는 아침 먹고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았습니다. 적어도 고교 시절 이전까지는 공부와 관련된 부모님의 압박을 경험한 적이 없고요.”

김씨는 한국사회에서 놀이와 자유를 상실한 결정적 계기가 1990년대 후반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고 말한다. 이 시기 이후 한국인들은 경쟁에서 낙오해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무시당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됐다는 것. 그 결과가 자식에게 ‘공부해라’, ‘그래서 부자가 돼라’는 압력으로 나타났다. 1960~70년대 출생자는 비교적 행복해하는 편이나 1980년대 이후 출생자의 행복도가 이보다 떨어지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라는 얘기다.

◇ "'돈이 곧 행복'은 현대판 미신에 불과"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에게서 자유롭게 놀 권리를 빼앗는 근원적 이유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장차 불행해질 것이라는 믿음 탓이라고 김씨는 강조한다. 그는 “‘돈이 곧 행복’이라는 한국인들의 뒤틀어지고 맹목적인 신념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범”이라면서 “하지만 상당수 한국인이 그토록 맹렬하게 믿는 이 같은 신념에는 현실적,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으며 병적인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현대판 미신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돈이 부족해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어요. 하지만 많은 연구는 돈이 행복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공통적으로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산업화한 여러 나라에서 지난 50년 동안 부의 수준이 두세 배 높아졌는데도 사람들의 행복 수준과 만족 수준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울증만 더 흔해졌습니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특히 소득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유층의 자살 시도가 최근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 한국인의 자살 시도 증가폭은 정체 상태인 반면, 부자들의 자살 시도는 급증 추세를 보이는 것이지요.”

김씨는 아이들이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맘껏 놀아보지 못한 이른바 ‘공포세대’가 자신의 불안을 자식 세대에게 투사하는 데 있다고 상기시킨다. 1990년대를 지나며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화하자 기존의 공동체가 급격히 무너지는 대신 개인주의적 경쟁이 강요되면서 그 자리를 시장지향적 성격이 차지해버렸다는 것. 이에 따라 자존감 훼손과 내면의 상처를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는 불안심리가 팽배해진 가운데 아이들은 집이나 학원에서 공부만 해야 했고 성적 경쟁은 그만큼 치열해졌다.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심각한 비교 스트레스를 초래해 행복감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놀이를 잃은 가장 큰 원인이 어른 개인이라기보다 그 사회라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에 점령당한 병적 한국사회가 부모들이 자식을 건강하게 사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정신건강을 파괴했다고 하겠다.

“어린 시절 놀이를 박탈해 창의성 발달의 결정적 시기를 놓치게 하고, 학창 시절에는 획일화한 주입식 제도 교육으로 창의성을 질식시켜왔어요. 창의성은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 아니지요.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하고 발휘할 수 있는 마음은 평화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이 갖는 고유의 특성입니다. 지나친 공부 강요로 인한 스트레스는 부모 자식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모두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주범이지요. 영화 ‘헝거 게임’에서 승자가 혼자이듯, 잔인한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승자는 결국 고독해지기 마련입니다.”

과거에는 성적과 상관없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했으나 사람이 상품으로 전락한 요즘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조건부 사랑이 팽배해졌다. 인간 본성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품 가치에 매몰되다 보니 아이들은 공부가 좋아서라기보다 부모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한 불안감으로 책상에 붙어 있게 된다. 부모의 건강한 사랑,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타인의 사랑을 잃을까 봐 근심 걱정하는 삶을 살기 쉽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거의 놀지 못하고 공부만 강요당했던 아이들은 설령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부정적인 감정들을 잔뜩 갖게 된다는 게 김씨의 설명. 이런 아이는 항상 기분이 나쁘고 삶을 점점 더 버거워하고 싫어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먹어갈수록 정신건강이 악화하고 성적도 그에 따라 뚝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김씨는 “특히 서울 강남 지역 학부모들의 비뚤어진 교육열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그 결과는 이 지역의 소아정신질환 발병률이 전국 최고라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전국 최고 수준의 놀이 박탈과 학업의 강요가 정신건강의 황폐화를 야기한다”고 안타까워한다.

◇ 행복하려면 건강한 '관계'와 '공동체' 필요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이런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법은 뭘까? 김씨는“맹목적 경쟁만을 우선시하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이 불행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자고 설득한다. 그저 가난했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행복을 기준으로 볼 때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넉넉했던 지난날처럼 서로를 존중하는 화목한 사회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의 행복도 그런 분위기에서 양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참고로, 국회 입법조사처가 최근 내놓은 ‘OECD 사회통합지표 분석 및 시사점’에 따르면 ‘곤경에 처했을 때 기댈 가족과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은 조사대상 36개국 중 최하위를 면치 못했다.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관계와 공동체입니다. 건강한 관계, 건강한 공동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만 병적인 관계나 공동체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이 점에서 본받아야 할 곳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히는 덴마크입니다. 지역사회 유대나 환경, 삶의 만족도, 일과 생활의 균형 등에서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낫지요.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돈’이 아닌 ‘관계’에 숨어 있는 셈입니다. 어른들의 불안을 아이들에게 떠넘기지 않고요. 관계가 곧 행복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돈이 적건 많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행복은 오직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건강한 사회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에게서 놀 권리를 빼앗아선 안된다면서 놀이의 박탈이 단지 어린 시절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현재의 행복 없이는 미래의 행복도 없다는 게 그의 지론. 어린 시절 실컷 논 아이는 미래에도 행복하겠지만 놀이를 박탈당한 아이는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은 불행해야 해’라는 잘못된 생각을 과감히 버리고 우리 아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질 수 있게 도와주자고 권유한다.

“상당수 부모들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면서, 그것이 자식을 위하는 옳은 행동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식을 위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식을 불행한 삶으로 몰아가는 행동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자녀 교육을 묻는 말에 김씨는 “공부와 관련해 어떤 회유나 압박을 가한 적이 없다”며 “아이들이 원할 경우 과외나 학원에 보내기도 했지만 금방 하기 싫다면서 그만뒀다”고 들려준다. 대학진학과 관련해 그는 “학문을 하고 싶다면 가야겠지만 취직을 위해서라면 갈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왔다”면서 “첫째 아들은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지만 둘째 아들은 공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정서 상태는 양호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어떤 갈등이나 다툼도 없었다고 한다..

고려대 심리학과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김씨는 한때 주류 심리학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심리학계를 떠나 사회운동에 몰두하다가 중년의 나이가 돼 심리학자의 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2005년부터 심리학과 사회학을 결부시킨 관련서 집필과 강의 등에 매진하고 있다. 지금까지 펴낸 저서는 ‘불안증폭사회’,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 ‘사이코패스와 나르시시스트’, ‘베토벤 심리상담 보고서’ 등 무려 25권. 이 가운데 공저가 아닌 단독 저서는 22권에 달한다. 일선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현장 경험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실 밀착형 심리 관련서 집필에 든든하고 풍부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요즘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는 우리나라의 심리적 근저를 파헤치는 ‘한국형 자살(가제)’의 집필에 전력하고 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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