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입장벽 지킨 의사만 건재..비웃음 당하는 '노력의 가치'

이상덕,전정홍,정의현,이승윤,나현준,황순민,부장원 2016. 9. 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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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급국가 바이러스 ② ◆

명문 외국어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이현진 씨(27·가명)는 작년 한 공기업에 입사했다. 명목상 세전 연봉은 3600만원. 하지만 4대보험 등을 떼고 받은 첫 월급은 200만원 안팎이었다. 대졸 초임치고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교육에 투자한 돈을 고려할 때는 적은 액수였다. 올 상반기 서울시내 평균 아파트값은 5억5000만원 안팎으로 15년 이상 월급 전부를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반면 1961년생인 그의 부친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8년 시중은행에 입사해 첫 연봉으로 500만원 이상을 받았다. 당시 강남 '은마아파트' 한 채 값은 5000만원이었다. 그만큼 대학 졸업장의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이씨는 "부모님과 살고 있어 월세를 낼 필요는 없다"며 "그래도 지방 출신 동기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한민국 경제토양이 척박해지고 있다. 30년 전과 같은 투자나 노력을 하더라도 그 과실은 3분의 1밖에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격적인 '저결실(低結實)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는 매일경제신문이 에프앤가이드·현대경제연구원과 분석한 상장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ROE), 주택투자수익률, 전문대 및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수익률에서 잘 나타난다.

사라진 대학 졸업장의 가치

1982년 4년제 대졸자의 평균 순임금(대학 졸업을 위한 비용분 고려)은 고졸자보다 13.0% 높았지만, 2015년에는 6.7%로 낮아진 상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 교육에 투자를 하더라도 자녀가 예전 대졸자만큼 급여를 받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노동시장 진입 연령인 24~34세를 대상으로 학력별 급여를 분석한 결과 1982년 대졸자 평균 월급(명목 기준)은 35만8274원, 고졸자는 22만9205원이었다. 그 격차가 56.3%에 달했다. 하지만 1992년에는 80만3086원과 64만4009원으로 24.7%로 좁혀졌고, 작년에는 259만7011원과 218만3411원으로 18.9%로 줄었다.

졸업에 필요한 등록금 등 비용까지 감안한 대학 졸업장의 가치인 '대졸자의 투자수익률'을 살펴보면 1985년 13.5%로 정점을 찍은 뒤 1988년 11.2%로 줄었고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7.6%까지 떨어졌다가 작년에는 6.7%로 하락했다. 이는 1990년대 무분별한 신규 대학 인허가에 대학생 수는 급증했지만 그만큼 대학 교육의 질은 따라오지 못한 데다 청년인구 감소에도 정부가 대학 구조조정을 제때 하지 못한 탓이 크다. 정부는 대학 구조개혁 평가 기본계획을 세우고 점수를 충족하지 못하는 대학에 대해 단계적 구조조정을 통해 2023년까지 정원을 16만명 감축하겠다고 밝힌 상태지만 이미 대학생 수는 폭증한 상태다. 일반대학, 대학원, 전문대학 등을 포함한 전체 고등교육기관 재적 학생 수는 1980년 64만명에서 작년 360만명으로 6배나 늘었다.

경쟁 치열해진 변호사·회계사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의사 약사 등 이른바 '사' 자가 붙은 라이선스 직업 사이에서는 대학 정원이 동결돼 있는 의사의 '초임 급여 증감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졸자의 '2008~2013년 연평균 초임 급여 증감률'을 보면 전체 평균 증감률은 1.7% 수준이었다. 회계사 세무사 등은 0.7%, 변호사 등 법률가는 1.2%로 평균 증감률보다 낮았다. 회계사·세무사는 IT 발달로, 변호사는 로스쿨 도입 이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상태다. 이에 비해 의사는 증감률이 무려 3.4%에 달했다. 다만 의사는 인턴 기간이 있어 절대액수에서는 변호사 등 법률가(429만원), 회계사·세무사(348만원), 의사(331만원) 순이었다.

오준범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고소득 직군의 대졸자와 일반 대졸자 간 급여 격차는 여전히 크지만 향후 격차는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의사의 초임 급여 상승폭이 유난히 높은 이유는 대학과 의료계의 반발로 의대 정원이 2007년부터 10년째 3058명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의료계에서는 공급 과잉을 주장하고 있다. 그 여파로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의료법은 2014년 발의됐지만 결국 불발됐다. 그러나 보건사회연구원은 의사의 경우 2024년부터 공급 부족 현상이 발생해 2030년 4267~9960명이 부족할 것으로 관측한 바 있다.

자기자본 회수하는 데 2년→10년

지난 30여 년간 코스피 상장사의 평균 ROE 변화를 분석한 결과 1982년 46.17%에 달하던 ROE가 꾸준히 떨어져 지난해에는 10.13%까지 추락했다. ROE는 기업이 타인자본(부채)이 아닌 자기자본(주주 지분)으로 얼마만큼 이익을 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수익성 지표다. 30여 년 전에는 자기자본을 1단위 늘려서 회수하는 기간이 2년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10년이 걸리는 셈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1980년 100으로 시작한 코스피가 현재 약 20배가 됐는데 ROE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결국 주식 평가에 있어 분모에 있는 할인율(자기자본비용)이 낮아졌기 때문"이라며 "경제에 결코 좋은 지표는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윤 교수는 "한마디로 1980년대는 어디다 투자해도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지금은 허투루 투자하면 원금 되찾기도 힘든 저성장 시대"라고 설명했다.

1956년 한국거래소가 문을 열 때 상장한 최고령 상장사의 지난해 ROE는 한국 기업의 낮아진 수익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최고령 상장사 4곳의 ROE는 각각 한진중공업홀딩스 -11.17%, 유수홀딩스(전 한진해운홀딩스) 10.42%, CJ대한통운 2.01%, 경방 2.55%에 그쳤다.

구정모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는 "예전에는 중국에 중간재를 팔면서 수출 덕에 수익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다"며 "지금은 중국 스스로 부품부터 조립까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저무는 아파트 불패 신화

한국인을 사로잡아온 '아파트 불패 신화'도 저물고 있다. '자고 나면 오른다'는 말로 대표되는 한국 부동산 시장의 급속한 성장은 투기의 전형으로 질타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산층의 보편적인 안전 재테크 수단으로 재산 증식에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매일경제신문이 1987년부터 2015년까지 전체 주택 투자수익률을 분석한 결과 1980년대 16.4%에 달했던 주택의 연평균 투자수익률은 2010년대 들어 평균 4.52%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에는 주택을 산 뒤 가격의 두 배를 버는 데 5년 조금 넘게 걸렸다면, 2010년 이후에는 주택을 산 뒤 16년이 넘어야 비슷한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아파트 투자수익률의 하락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1980년대 아파트의 연평균 투자수익률은 21.7%였지만 2010년대에는 5.38%로 떨어졌다. 주택시장은 과거만큼 매력적인 재산 증식 수단이 될 수 없는 셈이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의 진단

김세직 서울대 교수(사진)는 19일 "지난 2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장기(잠재)성장률이 5%마다 1%포인트씩 규칙적으로 떨어졌다"며 "구조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내·외부 충격이 온다면 0%대 추락시점이 더 앞당겨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사회 전반의 경쟁 약화가 전반적인 투자 효율성을 떨어뜨리면서 제로성장 위기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잠재성장률 추락의 근본적 원인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의 핵심인 '경쟁'이 급속도로 약해지고 있는 것을 짚었다. 2000년대 이후 이미 대기업으로 성장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기업들이 시장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강화함에 따라 경쟁기업의 숫자 자체가 제한됐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창업기업가가 출현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점점 더 쉽지 않은 환경이 계속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LG경제연구원에서 한국·미국·일본의 각각 설립 5년차 이하 젊은 기업의 비중을 비교한 결과 2015년 기준 미국의 젊은 기업 비중은 11.5%에 이르는 반면 한국은 3.3%, 일본은 1.8% 수준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 차원에서 경쟁하는 교육에서도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 재력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김 교수가 서울시 구별 소득 자료, 부모 잠재력과 자녀 잠재력의 상관관계 등을 이용해 타고난 잠재력 차이가 불러오는 서울대 입학 확률 차이를 추정하고, 이를 실제 데이터와 비교한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타고난 잠재력, 즉 인적자본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입학확률 차이는 2배를 넘지 않았지만 실제로 관찰된 소득수준에 따른 구별 입학률 차이는 10~20배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부모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경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입시제도를 개혁하고 우수한 잠재력을 가진 창업가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개혁방향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 = 이상덕 기자 / 전정홍 기자 / 정의현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 / 황순민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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