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국채보상운동, 세계기록유산 등재 머지않다

정일태 2016. 9. 1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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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은 단순히 일제가 떠안긴 빚을 갚으려 한 운동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 학생운동, 대규모 언론 캠페인이 녹아있다. 그러니까 시민들이 솔선수범한 운동이다."

내년은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이고,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가 결정되는 해다. 이를 앞두고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국채보상운동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기획전을 열고 있는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한 말이다.


김 전 장관은 경제사를 전공한 교수답게 국채보상운동 전문가로서 국채보상운동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에도 앞장서고 있다.

십시일반 보탠 '국채보상운동'

일제가 침략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떠넘긴 돈을 갚기 위해 온 국민이 벌인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시작돼 1908년까지 활발하게 전개됐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부터 우리나라에 차관공여를 제기한 이래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했다.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편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제1차 한일협약 이후 1906년까지 일제가 우리나라에 공여한 차관금액은 1,150만 원에 달했다.

일제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의 차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좌) 김광제 (우) 서상돈


이 운동은 1907년 2월 중순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이 단연(금연)을 통해 국채를 갚아 나가자고 제창하면서 시작됐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가 중심이 돼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해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던 출판사였다.

이 출판사 부사장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이 발기 취지가 『대한매일신보』에 이어 『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도 보도되자 각계각층에서 광범위한 호응이 일어났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고종을 따라 고급 관료들도 한때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부녀자도 많이 참여해 각종 패물을 기부했고, 노동자ㆍ인력거꾼ㆍ기생ㆍ백정 등 하층민들도 적극 참여한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됐다.

한 자리에 모인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이번 전시회는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을 앞두고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고,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등재 분위기를 홍보하고 확산시키기 위해서 마련됐다.

전시회에는 경남 창원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을 권유한 '회문'과 '통문', 경북 고령과 경주지역에서 누가 얼마나 돈과 가락지 등을 냈는지를 기록한 '모금장부' 등이 전시됐다.

(좌) 국채보상운동 영수증 (우) 국채보상운동 취지문 [국채 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당시 기록물을 보면 국채보상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한 사람들은 여성, 학생, 상인 등 천대받고 힘없는 계층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앵무'라는 가명을 가진 기생이 당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100원의 거액을 기부하며 거국적인 참여를 촉구했다는 내용도 있어 눈길을 끈다.

국채 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바로 이 기생 '앵무'와 이름 없는 시민들이 1907년 당시 순수한 애국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것을 창작 뮤지컬로 만든 작품 '기적소리'가 지난해부터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대구에서 공연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기적소리



범국민적 경제주권 회복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배경으로 국채보상을 도모하는 기생 앵무와 광문사 사장 김광제, 이와는 반대로 국채보상을 반대하고 조선 수탈에 앞장서는 친일파 박중양 등 실제 역사 속 인물이 등장한다.

또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사랑과 우정을 버리지 않고 국채보상운동에 나서는 앵무의 딸 연희, 친일파의 아들 이재구, 감초 역할을 맡은 순금 등 허구의 인물이 등장해 극의 재미와 감동을 더하고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뮤지컬 기적소리


뮤지컬 '기적소리'는 지난해 12월 1차 공연을 시작으로 3차 공연까지 전 좌석이 매진되는 성황리에 공연이 진행됐다. 다음 달(10월)에는 대구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대구 대덕문화전당에서 4차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기적 소리 극중 인물 관계도


'대동보' 창간호 대구서 첫 발견

대구에서는 2002년 5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구성됏다. 사업회는 2015년 8월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록물 2,475건을 선정해 문화재청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1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대상으로 선정하고 국내외적으로 홍보와 분위기 조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기적소리'는 국채보상운동을 국내·외에 알리는 콘텐츠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가운데 며칠 전 국채보상운동 진행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기록한 월간잡지 '대동보(大同報)' 창간호가 이 운동 발원지 대구에서 발견돼 국채보상운동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희망을 더 부풀게 한다.

대동보 창간호 표지, [사진제공 : 한옥션 대표 조현제]


대동보 창간호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돼 3개월 정도 지나 전국적으로 동참 열기가 뜨거웠던 무렵인 1907년 5월에 발간됐다. 책 표지에는 태극 문양이 있고 가로·세로로 창간 일 등을 뜻하는 대한광무십일년(大韓光武十一年) 오월일시간(五月日始刊) 매월일발(每月一發)이란 글이 적혀있다. 책 크기는 가로 15㎝·세로 23.5㎝이고, 분량은 72쪽이다.

창간호에는 인천, 부산, 광주 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단체별 취지서, 의연금 납부자 이름, 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 등에 난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사 등이 담겼다.

마지막 장에는 의연금을 낸 분들의 이름과 금액을 편집 없이 기록해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다'는 창간 목적도 적혀있다. 창간호 발행 당시까지 모은 의연금 총액이 1,309원 89전 5리란 사실도 알리고 있다.

대동보 창간호 마지막 장, [사진제공 : 한옥션 대표 조현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 관계자는 "대동보 2·3권 등이 전시회에서 간간이 공개된 일은 있으나 보존 상태가 양호한 창간호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국채보상운동 초기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 등에서 가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금 모으기 시초 …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는 2017년 6월부터 8월까지 열릴 예정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회의에서 결정된다.

외환위기 발표하는 임창열 당시 부총리


1997년 11월 21일 임창렬 당시 경제 부총리가 특별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는 "나라 빚이 총 1,500억 달러가 넘고, 이 가운데 당장 갚아야 할 돈이 많은데 우리나라가 가진 외화는 40억 달러에 불과해 불가피하게 국제 통화 기금(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외환부족으로 IMF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국민들은 달러가 없어 나라가 부도날 지경이란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이때 누군가가 90년 전 국채 보상 운동을 기억하고 금 모으기 운동을 제안했다.

금모으기에 동참하는 국민


"나라를 살립시다. 금을 모읍시다."

금 모으기 행사에는 코흘리개부터 백발노인까지 10만여 명이 참여했다. 금 모으기 기간 행사장마다 금붙이를 손에 들고 나온 수많은 애국 시민으로 긴 줄이 생겼다. 금 모으기 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전국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많은 금이 모여 적지 않은 외환 빚을 갚는 데 기여했다. 국채보상운동의 90년 만의 데자뷔였다

'국채보상운동'의 데자뷔는 '금 모으기 운동'으로 충분하다. 다시는 국채보상운동의 데자뷔를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채보상운동에 나타난 그 정신만큼은 우리에게 늘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차제에 바람이 있다면 그 정신을 담은 기록들이 인류 정신사적인 평가를 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대한다.

정일태기자 (jimi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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