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아의 트렌디하게]'위약' 권하는 사회

조경아 칼럼니스트 2016. 9. 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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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한다. 비타민을 주고는 금방 나을 거라고 말한다. 아이는 약을 먹고 정말 아프지 않다고 말한다. 위약에 의한 플라시보가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위약 효과는 환자의 심리상태가 병세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는 예로 자주 쓰인다. 위약 효과는 환자가 의사에 대한 신뢰가 클수록, 자신이 먹어서 효과를 본 약과 같다고 생각할 때, 약값이 비쌀수록 커진다고 한다. 플라시보는 기쁨을 주다, 즐거움을 선사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기원한다.

징그럽게 더웠던 올해 여름, 우리는 주말마다 한 움큼의 위약을 집어삼켰다. 이 주말을 끝으로 폭염의 기세가 꺾인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들었다. 매주 토요일은 여전히 더웠고 일요일도 변함없이 더웠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이 되면 어쩐지 선선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꺾였나? 그러나 수치로 확인되는 더위의 실상은 여전히 광폭할 폭, 불꽃 염의 온도였다. 잠깐이라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결국 기상청은 인디언들의 기우제보다 더한 지구력으로 몇 주간 빌고 빌어 기어코 시원한 월요일을 맞이하게 했다. 기상청의 예보는 위약인 줄 알았지만 기대해보고 싶은 말이었고 계절이 숫자를 바꿔 돌아오자 그래도 숨은 쉴 수 있는 날씨가 이윽고 돌아오긴 했다.

누진세는 예방주사였다. 너무 떠들었다. 몇 백만원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고작 깎아주는 금액이 몇 만원이라고 했다. 전기요금 고지서를 합격통지서처럼 떨며 기다린 것은 이상한 체험이었다. 온 국민이 그 얘기만 하기로 정한 것처럼 누진세를 걱정했던 것치고는 ‘괜찮은’ 요금이 나왔다. 사실, 전년, 전월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이 높은 금액이었는데도 백 몇 만원이 아니어서 괜찮은 마음이 생겨났다. 예방주사를 너무 맞은 덕이었다. 예방주사의 미덕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해외여행 간 셈 치면 얼마 되지도 않는다.” “쌩쌩 틀었는데도 백만원이 안 나왔다. 다행이다.” 누진세 폭탄 얘기가 온 나라를 뒤엎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얘기들이다.

헬조선, 숟가락 계급론 등 청년들은 자조하고 걷힐 것 같지 않은 어둡고 탁한 기운은 청소년, 장년층에까지 금방 스며들었다. 여러 가지 유행어를 거느리며 등장한 단군 이래 최고라 해도 아쉽지 않을 이 자조의 기운은 수긍해 동조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수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되며 2016년의 자조 시리즈는 엉뚱하게 힘을 얻었다. 그래도 나는 이것보다는 나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다. 흙수저이지만 아르바이트는 있다, 헬조선 같지만 준비하고 있는 시험이 있다, 시험에 계속 떨어지고 있는 흙수저지만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를 보니 살 만한 것 같기도 하다 등. 최악의 상황을 사회가 먼저 특정해주고 나니 나는 그 계급은 아닌 것 같은 안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현실을 현실로 볼 수 없는 사회. 소통이 안될 때 덩달이 시리즈가 유행했고 미래가 암울할 때 허무 시리즈가 우리를 웃겼다. 지금은 시리즈 대신에 기준을 낮춰 억지로 힘을 내야 하는 사회를 건너가는 중이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너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다음주에는 시원해질 것이며 나온다는 전기요금은 생각보다 덜 나왔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으냐는 긍정적 자조가 유행하는 상황이다.

노시보. 플라시보의 반대 효과를 의미한다. 진짜 약을 처방해도 그 약이 해롭다고 생각하거나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환자의 부정적인 믿음 때문에 약효가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플라시보에 속다 보면 진짜 약이 듣지 않는다. 유행이 그러니 핑퐁게임하듯 최악을 특정해 웃고 있긴 하지만 이 유행이 길어지면 웃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조경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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