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묵직한 슬픔이 숨겨진 유쾌한 농담..연극 '왕과 나'
(서울=뉴스1) 박정환 기자 = 연극 '왕과 나'(이수인 작·연출)는 장희빈 이야기다. 궁녀 장옥정이 조선 19대 왕 숙종의 원자를 출산해 희빈을 거쳐 왕비가 되지만 왕의 사랑이 식자 사약을 받아 죽게 된다.
지난 3일 서울 종로 대학로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TV드라마, 영화 등으로 수없이 만들어진 '지겹고 뻔한' 사극을 '묵직한 슬픔이 숨겨진 유쾌한 농담'의 음악극으로 바꿔놨다.
이 작품은 가볍고 유쾌하다.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배우들이 무심한 듯 툭툭 뱉는 욕설 섞인 농담이 아슬아슬한 음란함과 합쳐지기 때문이다. 관객이 유쾌하게 극을 따라가다 보면 웃음 뒤에 길게 드리운 슬픔의 그림자를 마주친다. 휘발성 웃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사랑의 숨겨진 작동 원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군상이 드러난다.
배우 12명이 때로는 등장인물로서, 때로는 해설자로서 배역을 바꿔가며 짧고 분절적이며 함축적인 대사들을 주고받는다. 이 과정은 마치 다양한 음색과 연주를 들려주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흡사하다. 배역을 배우들이 바꿔가며 연기는데도, 기본적인 줄거리는 완벽하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장희빈을 연기하는 배우만 3명이다. 숙종을 처음 만난 장옥정을 연기하는 배우를 대신해 갑자기 다른 배역을 하던 여배우가 장옥정 행세를 한다. 의아해하는 관객들에게 그 여배우는 "배우가 바뀌었습니다, 물론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요"라는 대사를 해설자처럼 무심하게 한다.
이야기의 흐름은 기존 작품들과 비슷하다. 조선 19대 왕인 숙종은 신참 나인인 장옥정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장옥정은 왕의 총애를 받아 금세 후궁이 되고, 원자까지 출산한다. 그리고 마침내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숙종의 총애는 거기까지다. 장희빈 때문에 쫓겨났던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의 자리에 복귀하고, 장희빈은 궁 밖으로 쫓겨나 결국 사약을 받는다. 이 과정에 서인과 남인의 이전투구식 당쟁이 깔려 있다.
식상한 이야기도 연극 무대에 오르면 새롭게 달라진다. 텅 빈 무대에 놓인 서구식 소파가 궁중의 권위를 상징한다. 배경 음악도 재즈나 왈츠, 탱고, 트롯풍의 라이브 연주다. '우산',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뜨거워서 싫어요',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당신의 첫 사랑', '꿈 속의 사랑을', '쿠쿠루쿠쿠 팔로마', '청춘고백' 등의 노래가 상황에 맞게 흘러 나온다.
배우들의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스페인 영화 '그녀에게'의 주제곡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rucucu Paloma)가 흐르는 가운데 궁중식 한복을 차려 입은 여자들과 서구식 검은 바지에 흰색 드레스 셔츠 차림의 남자들이 무도회에 등장하듯 열을 맞춰 들어온다.
무대 앞, 스탠딩 마이크 2대의 쓰임새는 극의 컨셉트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극이 진행되는 도중 배우들이 마이크를 쓰는 순간은 단 두 번이다. 한 번은 숙종에 의해 숙청된 사람의 이름들이 흘러나오고, 또 한 번은 숙종이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들이 나열된다. 이 기록된 이름은 권력과 사랑에 대한 인간 욕망의 상징이자 흔적이다.
한바탕 춤과 말의 향연이 흘러간 자리에서 욕망은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결국 희미하게 사그라든다. "세월은 흘러갑니다, 강물보다 빠르게" "사랑은 식어갑니다, 용암보다 신속히"와 같은 해설 속에서 장옥정의 격렬한 춤사위가 펼쳐지고 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눈 앞에 펼쳐지는 농담 같은 삶에 낄낄거리고 웃다가도 막이 내리면 인간의 삶과 사랑에 대한 애잔한 감상이 관객의 마음에 고인다.
황택하·이영수가 숙종 역을 맡았고, 황은후·정새별이 젊은 장옥정 역을 번갈아 출연한다. 이들을 비롯해 김승언, 이종무, 박창순, 송은지, 김정, 강명환, 고애리, 황정윤, 김재겸, 장승연 등이 출연한다.
오는 31일까지. 입장료 3만원. 문의 (02)742-7563.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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