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사랑이 되살려낸 잃어버린 노래·전설의 가수

2016. 6. 9.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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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44년만에 음반 복원기념 콘서트 방의경씨

왼쪽부터 김지상씨, 방의경씨, 오정기씨.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70년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회관에는 청년문화 공간 청개구리가 있었다. 청개구리 창립멤버이자 ‘1세대 포크 싱어송 라이터’로 꼽히는 서울대생 김민기와 이대생 방의경이 노래로 시대의 아픔을 달래던 공간이다. 71년 어느날, 방의경은 회관의 강당에서 공연을 앞두고 경기여고 교복 차림의 후배 양희은에게 노래 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이대사대부중·고 3년 후배 오정기는 와이틴(Y-Teen) 회장으로 회관에 들렀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로부터 30년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동창회에서 두 사람은 우연처럼 재회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선배의 모습에 오정기는 마음이 아팠다. 노래도 무대도 잃어버린 채 이민 생활에 지쳐 있던 선배에게 ‘그 빛나던 젊은 날의 아름다운 꿈과 음악’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그때부터 인터넷에서 ‘방의경’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포크음악 마니아들이 모인 사이트 ‘바람새’에서 선배 음악을 찾아 부르는 동호인들을 발견했지 뭐예요.”(오정기)

“그때부터 거의 매일 정기가 나에 관한 자료를 팩스로 이메일로 보내줬어요. 아직도 나를 기억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요.”(방의경)

오는 11일 오후 5시 이대 김영희홀에서 44년만에 1·2집 음반 복원 기념 ‘방의경 콘서트’가 열리게 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공연을 위해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방의경씨와 팬 대표이자 후원자인 오정기씨, 공연 기획자 김지상씨를 지난 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함께 만났다.

1970년대 첫 여성 싱어송 라이터
김민기와 ‘청개구리’ 창립멤버 활동
유신정권 1집 판금…·2집 실종에 ‘좌절’
76년 미국 이민…희귀 명반 대명사로

2002년 후배 오정기씨와 재회
팬카페 ‘바람새 친구’ 인연 이어줘
‘내노래 1·2집’ 복원 11일 후원자 초청 공연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 세월은 가도 노래는 남는 법. 방의경의 이름은 잊혀졌지만, 그가 작사한 번안곡 ‘아름다운 것들’은 지금도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음악을 따로 배운 적은 없어요. 중학시절부터 시를 많이 썼어요. 마치 바람이나 비가 말해주는듯 영감이 떠올랐죠. 그러다 기타를 치며 제멋대로 연주하고 노래했어요. 그래서 늘 민기가 대신 악보에 옮겨주곤 했죠.”

남녀공학으로 유난히 학예 실습 교육을 권장하던 이대사대부중·고 6년간 그는 이미 ‘대표 가수’였다. 이대 장식미술과에 입학해서도 강의실보다는 청개구리에서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덕분에 72년 첫 음반 <내 노래 모음>이 나왔다. 19살 때 쓴 ‘겨울’을 비롯, 포크의 명곡으로 꼽히는 ‘불나무’, ‘풀잎’ ‘친구야’ 등 12곡이 담겼다. 혼자서 직접 작사·작곡·노래에 기타반주까지 해낸,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나라 첫 여성 싱어송라이터 독집음반이다. “모두 500장을 발매했다는데, 정작 저조차 갖지 못했어요. 발매 1주일쯤 뒤 광화문의 음반점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공안당국에서 압수해간 뒤였어요. 판매는 물론 방송 금지곡이 됐구요.”

외마디 항의조차 할 수 없었던 독재 시절, 그는 한층 깊어진 슬픔을 담아 74년 2집 음반을 준비했다. 하지만 비밀 아지트 같은 녹음실에 숨어 애써 작업한 음원들은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음반을 내주겠다는 지인에게 맡겼는데 그만 분실했다고 했어요. 악보도 없었요.”

그 바람에 그의 1집은 지금 ‘컬렉션의 끝’이라 불리며 ‘희귀음반의 대명사’로 남았다. 음악적 완성도뿐 아니라 대중음악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아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그에게 음악을 빼앗아간 결정타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이었다. “난 그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했을 뿐인데 ‘저항 가수’가 돼 있었어요. 내가 만든 노래를 부르던 친구들이 끌려가고 갇히고 심지어 죽어가는 현실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더라구요.”

76년 그는 약혼자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장식미술 전공을 살려 액세서리 제조사업을 하며 낯선 땅에 정착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그 사이 독재자는 죽고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뤄진 고국에서 그는 ‘포크의 전설’이 됐다.

1971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청개구리의 집에서 공연중인 방의경(왼쪽 둘째)과 김민기. 방의경씨 제공

“자기가 직접 만든 유일한 음반조차 없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히더군요. 바람새 동호인들에게 선배의 근황을 꾸준히 알리고 다시 노래를 만들고,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가톨릭 의대 간호학과 때 만난 의사 남편과 81년 이민을 간 오씨는 뉴욕을 거쳐 동부 조지아주에 살고 있었지만 서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방씨와 긴밀히 연락하고 만나며 고국 팬들과 이어주는 매신저를 자처했다. 이성길씨가 만들었던 ‘바람새’ 사이트가 저작권료 문제로 문을 닫은 뒤 2006년 오씨를 비롯 2천여명의 회원들은 다시 뭉쳐 ‘다음 카페 바람새 친구’를 열었다. 마침 2009년 한국으로 역이민한 오씨는 2008년과 2011년 방씨의 귀국 콘서트를 이뤄내기도 했다. 2005년무렵부터 목소리를 되찾은 방씨가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며 다시 노래도 만들게 된 덕분이었다. 공ㅇ

“가장 기뻤던 순간은 1집 음반을 찾았을 때였죠. 카페를 통해 선배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대구서문복지재단의 사무국장 신동혁씨가 2014년 재단 기부 물품인 오디오 시스템과 200여장의 엘피(LP)음반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1집을 미국 출장길에 만나 선배에게 직접 전해줬어요.”

1971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청개구리의 집에서 공연중인 방의경과 양희은(왼쪽)
1971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청개구리의 집에서 공연중인 방의경

한층 고무된 오씨와 팬들은 폐기된 1집과 분실된 2집을 다시 만들어 ‘한국포크음악의 유산’으로 남기기로 했다. 바람새 친구의 활동가 김지상씨가 기꺼이 제작과 기획을 맡았다. 작은 모바일사업체를 운영하는 그는 피시통신 시절부터 방의경 노래의 열혈팬이었다고 했다. “순수한 팬의 마음으로, 좋아하는 노래와 가수를 되찾은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음반도 제작 기금 펀딩 후원자에게만 주는 한정판으로 만들었구요, 공연도 후원자들에게 답례로 마련한 자리예요. 물론 현장에서도 후원은 가능합니다.”

이번에 복원된 ‘내 노래 노음 1, 2집’에는 1집 엘피판의 잡음까지 그대로 살렸고, ‘하얀나비’, ‘마른풀’, ‘종이꽃’ 등 분실된 2집 음원 가운데 방씨가 기억하는 노래와 미국에서 새로 만든 곡까지 30여개를 모았다. 성공회대 김창남·박경태·김진업 교수로 이뤄진 더숲트리오가 유일한 초대손님으로 공연을 함께 한다.

“저더러 ‘저항 가수’라고들 하는데, 그저 아름다운 세상을 기다리는 염원을 노래할 뿐입니다. 기적같은 인연으로 함께 꿈꿀 수 있는 팬들도 만났으니, 못다한 노래 열심히 부르며 살 겁니다.”

방씨가 이번 콘서트의 제목을 ‘꿈을 이루는 세상을 바라보며’로 정한 이유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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