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았다'고 느끼는 여성들의 추모

송지혜 기자 2016. 5. 3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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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10여 개를 올라가자 번호 키가 달린 남녀 공용 화장실이 나왔다. 서울 강남역 인근 서초동 상가 1층 ㅇ주점과 2, 3층 프랜차이즈 노래방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다. 김 아무개씨(33)는 5월16일 밤 11시42분 이곳 화장실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바지 주머니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인근 ㅅ식당 주방에서 일을 마치고 몰래 훔쳐온 흉기가 들어 있었다.

같은 시각, 박수지씨(가명·22)는 친구들과 함께 1층 ㅇ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5월17일 0시33분, 김씨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한 칸에 숨어 있었다. 34분 뒤인 오전 1시7분, 박씨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김씨는 박씨를 흉기로 여러 차례 찌르고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한참이나 오지 않는 박씨를 찾으러 간 친구가 변기 옆에 쓰러진 그녀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박씨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김씨와 피해자 박씨는 일면식이 없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화장실에 들어오는 여성을 상대로 일을 저지를 생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화장실에 숨어 있는 34분 동안 들어온 남성 6명을 그냥 보냈다. 김씨는 '여자들 때문에 힘들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무시당하고 있다'라고 진술했다.

ⓒ시사IN 신선영 : 5월19일 추모객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경찰은 여성에게 구체적으로 피해를 당한 사례는 없다고 밝혔다. 서초경찰서 한증섭 형사과장은 '피해 여성은 안타깝게도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의자 김씨는 지난 3월께 집을 나와 일정한 거처 없이 건물 계단과 화장실에서 쪽잠을 자는 생활을 했다. 그는 2008년부터 조현병(정신분열증), 공황장애 등으로 네 차례에 걸쳐 입원한 전력이 있다. 2008년 조현병이 발병해 1개월 입원한 뒤 퇴원했다가, 2010년과 2013년에 각각 6개월씩, 2015년 8월부터 지난 1월까지 6개월 동안 입원한 바 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2014년까지 서울 지역의 한 신학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교회에서 일을 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다음 날인 5월18일 아침부터 강남역 10번 출구에 몇 장의 메모지가 붙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시간30분여 동안 여성을 기다린, 명백한 여성 선택 살인이다’ ‘여성이라서 죽였나요’ ‘여성 폭력과 살해에 사회가 답해야 합니다’. 밤사이, 일부 온라인 카페에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피해자를 추모하자’는 제안이 불씨였다.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살아남았다’라는 ‘(해시태그) 살아남았다’가 달린 글은 SNS를 통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온종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강남역 10번 출구 유리 통로는 형형색색의 메모지로 가득 채워졌다. 국화가 길가를 따라 즐비하게 놓였고, 촛불은 어두워지는 거리를 밝혔다. 누구나 추모에 동참하지만 조직자는 없었다. 곱게 화장을 하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한쪽 손에는 노트북을 쥔 20대 여성 수십명은 읽고 또 썼다.

출입구 입구에 놓인,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단지 운이 좋아서입니다’라고 적힌 근조 화환이 이곳 상황을 알렸다. 여성들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아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 ‘나와 그녀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그곳에 없었다는 것뿐이다’ 따위, ‘나일 수 있었다’는 공포감을 추모 메시지에 주로 담았다. ‘남’이 아닌 ‘내’ 문제로 받아들인 것이다. 서강대 학생 두아인씨(21)는 '참혹한 여성 대상 범죄가 일어난 게 슬픈 한편, 많은 여성이 한자리에 모인 데 위안을 느낀다. 나만 느낀 두려움이 아니라는 공감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강남역 10분 출구에 붙은 메모지들은 여성들의 ‘일상적인’ 공포를 증언한다.

상당수 여성은 메모지를 쓰고 또 읽으면서 화장이 번지도록 울었다. 일부 여성들은 기자에게 '성별 대립이 아닌 여성 생존 문제로 바라보는 기사를 써달라'고 호소했다. 원하는 옷을 입고 술을 마시고 밤늦은 거리를 걷는, 당연한 자유와 권리에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구였다.

여성이 느끼는 공포는 일상적이다. 대학생 김 아무개씨(21)는 '매장 탈의실에서 옷을 입거나 공중화장실에 갈 때 천장이나 문고리에 몰래카메라가 붙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한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한 아무개씨(21)는 '음식을 시킬 때 배달원에게 혼자 사는 여성이라는 걸 들킬까 봐 꼭 누군가가 있는 척 말을 건다'라고 말했다. ‘사회적·생물학적 약자인 여성을 타깃으로 한 사회 범죄’라고 메모를 남긴 남성 한유일씨(22)는 '남자라서 그런 공포를 느낀 적이 없는데, 여자친구는 늦은 밤 귀가할 때마다 무섭다며 전화통화를 하기를 원했다'라고 말했다.

부산·대구·대전·춘천으로 퍼진 추모 물결

5월19일 오후 6시,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길거리 ‘필리버스터’가 시작됐다. 기온이 32℃까지 오른 무더운 날씨에도 200여 명이 자리를 지켰다. 일부 시민은 손수 마련한 초를 나누어주며 추모의 불씨를 붙였다. 20대 여성들은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던 폭력과 차별 경험을 각자 증언했다. 혼자 택시에 탔을 때 어디론가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늦은 밤 낯선 발걸음 소리에 움츠렸던 공포감, 아르바이트를 할 때 ‘좋은 데 가자’던 아저씨들의 성희롱, 병원에서 내시경을 받을 때 당한 성추행….

ⓒ시사IN 신선영 : 추모객 중 일부 여성들은 이 사건을 ‘성별 대립’이 아닌 ‘여성 생존’의 문제로 부각되길 원했다.

사연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여자라는 이유로 당한 피해 경험담이었다. SNS상에서 공유되는 추모와 피해 경험담은 셀 수 없을 정도다. 피해는 이렇게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사회적인 재발 방지 장치는 부실하다. 개별적으로 대처하기를 강요당한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만난 유 아무개씨(30)는 '지난해 11월 어느 날 밤 10시께 한 20대 남성이, 내가 혼자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쫓아 들어오려는 것을 막은 적이 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아서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했다'라고 증언했다.

5월18일 저녁 8시,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인 쪽지가 바람에 날려 떨어지려 하자 한 여성이 테이프를 덧붙였다. 그녀는 '내 피해 경험담을 나누고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서 관계가 형성되는 걸 느낀다'라고 말했다. 자발적으로 ‘여성혐오 범죄를 멈춰라!’고 쓴 피켓을 들고 나온 30대 여성에게 지나가던 시민들은 도넛과 각종 음료를 손에 쥐여주었다.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스물두 살 여성을 떠나보낸 ‘그들’은 비로소 ‘공포’에 대한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추모와 연대, 증언의 물결은 서울 ‘강남역’을 넘어 각 지역으로 퍼졌다. 부산 서면역 부근과 부산대, 대구가톨릭대학교 버스 정류장과 대구교대 지하철역, 울산 현대백화점 후문, 대전 시청역, 춘천 강원대 담벼락에도 추모의 쪽지가 나붙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누군가 나 대신해 죽는 일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메시지가 붙어 있다. 이곳은 2016년 5월17일 이후 새롭게 기억되었다.

ⓒ시사IN 신선영 : 이번 사건을 겪은 여성들은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던 폭력과 차별 경험을 각자 증언하기 시작했다.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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