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꿈은 없다, 오직 기억하라

2016. 5. 27. 15: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21] 5·18 피해자들의 ‘그룹 꿈 분석’ 처음 작업한 고혜경 박사

류우종 기자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이문재 시 ‘마음의 오지’ 부분)

광주. 그곳은 그날 ‘인간성의 오지’였다. ‘바위섬’처럼 고립된 광주. 폭도는 국가였고, 국가가 폭도로 몰았던 사람들은 인간이고자 했다.

2016년 5월 광주는 뜨거웠다. 조각구름 하나 없는 햇살. 그러나 36년째 그날의 기억을 먹구름처럼, 아니 맷돌처럼 마음에 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5·18 피해 생존자들이다. 국가는 이들의 내면을 외면해왔다. 매일 밤 찾아드는 악몽과 가위눌림 등 극심한 수면장애는 ‘무기 형벌’ 같은 고문. 20년 가까이 이틀에 한 번꼴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야만 했던 피해자도 있다.

2012년 문을 연 광주트라우마센터 들머리에 내걸린 문구. ‘살아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는 국가폭력에 무참하게 무너졌던 ‘광주’에 대한 위무이자,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거기로 한 사람이 들어갔다.

‘살아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5월17일 광주 5·18기념문화센터. ‘2016 광주 아시아 포럼’ 행사장에서 고혜경(53) 박사를 만났다. 고 박사는 국내에 ‘그룹 투사 꿈 작업’을 들여온 인물이다. 2013년 2~4월 그는 매주 광주행 열차를 탔다. 5·18 피해자 7명을 만나 그들의 꿈을 듣고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과정(‘5월의 꿈’ 그룹)이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함께한 국내 첫 꿈 작업이었다. 일차적으로 그들의 극심한 수면장애를 완화해주려는 게 목적이었다. 8주의 꿈 작업을 거치며 그들의 증상은 기대 이상으로 개선됐다.

그러나 녹록지 않았다. 고 박사는 말했다. “굉장히 힘들었다. 내가 초토화됐다.” 결과물이 지난 2월 출간된 <꿈에게 길을 묻다>(나무연필 펴냄)이다.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압도하는 충격이 가해졌는데 소화하거나 망각하거나 삶의 경험으로 통합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충격이다. 이미지상으로는 포탄 같은 게 날아와서 마음에 박혔는데 빠지지 않고 옹이처럼 남아 있는 상태다.

시간이 정지된 상태인가.

그렇기도 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8월의 광시곡>(1991)이 있다. 히로시마 원폭이 터지는 날, 구름 위에서 커다란 눈을 본 인물이 죽는 날까지 눈만 그리다 간다. 고착이다. 시간이 멈춘 거다. 그 사람 입장에선 그걸 소화하거나 이해하고 싶은 열망은 계속되는데, 넘어가지를 못한다.

마음에 찍힌 하나의 스냅사진 같다.

그렇다. 그때 나한테 그 경험이 어떤 거였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표현될 거다. 그게 보이는 게 꿈인 것 같다, 꿈세계.

1990년대 중반 고혜경 박사가 만난 스승 제러미 테일러는 ‘가장 경험 많고 통찰력 뛰어난 꿈 탐험가’로 일컫는다. 이론적 틀은 분석심리학의 비조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에 닿는다. 핵심 개념은 ‘원형’(Archetype)이다. 꿈은 무의식이 의식에 보내는 신호이며, 여기에는 인류 원형의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길흉화복 운운하는 해몽과는 완전히 다르다. 꿈은 분석심리학에서 ‘완전’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꿈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체된 에너지가 자극을 받아 변화가 일어난다”고 고 박사는 말한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입구에 ‘살아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그걸 봤을 때 ‘이분들(5·18 피해 생존자)을 위해서 격려하는 말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의 고통을 더 가까이 만나면서 내가 이런 경험을 하거나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봤다. 그 생각을 하면 그걸 버티고 지금까지 오신 게 정말 감사하다.

2013년에 작업했는데, 책은 3년 만에 출간됐다.

작업할 때 굉장히 힘들었다. 그때는 내가 초토화됐다. 이번 겨울에 다시 쓰는데도 여전히 힘들더라. 3년 전에 썼으면 날것이었을 것 같다. ‘발효’시키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 사회가 5·18 피해 생존자들의 집단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이 유치원 단계라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 대형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마음 안의 일은 ‘개인의 몫이니 그냥 견뎌야지’라는 쪽이 우세했다. 베트남전 참전자들 같은 경우에도 각자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고, 알코올중독 이런 데로 흡수됐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전체적으로 국가적 매뉴얼이 필요하다.

남의 신발 신고 걸어보기

꿈 분석가 고혜경 박사는 말한다. “이번 작업은 잃어버린 혼을 불러들이는 현대판 넋드림이었다.” 류우종 기자

‘현대판 넋드림’이란 표현을 썼다.

제주에서는 넋이 3개 있다고들 한다. 조그마한 교통사고도 그렇고 몸에 충격이 가해지면 넋이 빠진다고 한다. 근데 우리는 더 큰 충격을 겪었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넋을 다시 우리 안에 불러들이지 못하고,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파편화한 상태다. 사고는 났는데 수습은 안 되는 상태.

‘그룹 투사 꿈 작업’에서는 타인의 꿈을 일인칭으로 바꿔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걸 제일 가까이서 할 수 있는 게 상대의 꿈을 듣는 거다. 남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는 것(미국 원주민 속담). 실제로 가위눌리는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다가갈 수 있다.

현대의학의 의사-환자 관계와는 다른 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

서로 대등한 관계다. 리더 없이 우리 함께 ‘반상회’ 하듯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든 게 내 스승(제러미 테일러)이다. 꿈을 말하는 건 자기 고백이다. 각자 자기 꿈 얘기를 한다. 분석가나 전문가가 아니라, 꿈꾼 사람이 꿈의 주인이다. ‘꿈의 민주화’라고 할까.

고혜경 박사는 10년째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뒷골’에 산다. 멧돼지가 출몰하는 산골짜기. 그만의 안식처다. 그는 크리스찬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그룹 투사 꿈 작업을 하는 ‘신화와 꿈 아카데미’( blog.daum.net/mythsndream·2년 과정)를 운영한다. “꿈 작업은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꿈은 개인에게 해방을, 공동체엔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는 게 꿈 작업의 전제다. 그는 우리 안의 다양한 내면을 고대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연결한 책을 조만간 집필할 참이다.

그룹으로 작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융은 ‘꿈은 그룹으로 다룰 수 없다’고 했다. 융의 몇 안 되는 오류 중 하나다. 외국에선 그룹으로 작업을 많이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잘 안 하는 것 같다. 꿈은 한 가지 뜻이란 게 없다. 건강과 ‘참자기’를 알려주려고 꾸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정보가 꾸깃꾸깃 담겨 있다. 꿈은 양파 껍질처럼 수많은 층위를 동시에 얘기하는 거다. 한 사람이 꿈을 말하면 다 함께 ‘만약 내 꿈이라면’이라는 일인칭으로 접근하면서 이해와 공감, 치유를 이끌어낼 수 있다.

꿈이야말로 ‘부작용 없는 로또’라고 했는데.

힌두 전통에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을 할 때도 스승 없이 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내면으로 들어가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꿈은 그럴 일이 없다. 꿈에는 사는 데 도움되는 주옥같은 게 많은데 우리가 귀한 거라는 생각을 안 한다. 알면 로또다.

좋은 꿈, 나쁜 꿈이 없다고도 했다.

꿈은 언제나 건강과 꿈꾼 사람의 성장에 도움을 준다. 절대명제다. 악몽은 나쁜 꿈이 아니다. 시급한 메시지가 있을 때, 경각심이 필요할 때다. ‘119 삐뽀삐뽀’ 같은 것.

아침에 꿈이 기억나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빨리 적으면 된다. (웃음) 꿈의 두 성질이다. 의식을 자꾸 확장하기 위해서 무의식이 자꾸 말을 거는 거다. 또 하나는 원위치하려는 무의식의 속성이다.

꿈에서 음식 맛이 느껴진다면

인간의 도 중에서 제일 높은 도는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5·18 피해자들은 감정 조절이 안 돼서 폭발하고 어떨 땐 폭력을 쓰기도 한다. 근데 이 사람들이 트라우마 희생자다. 자기들이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아프니까 이랬구나’ 생각해야 하는데, 내 폭력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했을 때는 자기 비난이 더욱 심해진다. 아파서 그런 걸 두고 ‘너는 이거밖에 안 돼!’ 이러면 잔인한 거다. 자기에게 좀 너그러워져야 한다.

꿈에 대한 낭설도 많다.

꿈에서 음식을 먹으면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한다. 꿈에서 먹는 음식은 영적 자양분이다. 중요한 순간이고 맛있게 잘 먹어야 한다. 맛이나 식감이 다 느껴지면 굉장히 중요한 영성적 체험이다. 꿈을 실제로 공부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되는데, 사람들이 다 꿈 전문가들이다. (웃음)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는 말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인가.

그 사람의 꿈을 들으면 ‘아 이런 상태니까 이런 행동을 하겠구나’라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된다. 용납이 안 되지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깊은 이해가 생긴다. 전두환의 꿈 좀 들어봤으면 좋겠다. 이명박·박근혜 꿈도 궁금하고. 엄청난 악몽을 꾸고 많이 시달릴 거라고 생각한다. ‘꿈 그림’이 훨씬 정확하다.

‘광주 치유’에 최소 30년 걸린다

어떤 사람은 꿈을 잘 기억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꿈을 꾼다. 원래 꿈은 컬러다. 흑백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주로 감정·정서가 매우 억압된 경우다. 꿈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을 만나기 시작하면 살아난다. 그러면 컬러가 등장한다. 무의식이 말을 거는데 계속 무시하는 건 내면의 소리를 억압하는 것뿐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소외하는 거다. 현대인들 대부분 그렇게 산다. 꿈은 가장 정직한 내면의 거울이고 삶의 가장 중요한 나침반이다.

1980년 5월 광주가 치유되려면 최소한 30년은 걸릴 거라고 했는데.

좀 길게 잡고 갔으면 좋겠다. 완전한 치유가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1~2년 했으니까 그만하자는 말이 너무 많다. 5·18은 이 땅 전체의 생채기로 남은 것 아닌가. 단지 광주를 다루는 것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서 깊은 부분을 만나는 게 우리의 성장과 직접 연관되는 거다. 깊은 자기 치유가 ‘광주’에서 일어난다면 세상이 좀 바뀌지 않겠나.

꿈의 ‘기록’이 중요한 이유

‘딥마인드’(Deep Mind·깊은 마음)는 구글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본연의 자기를 찾기 위해 만나야 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다. 분석심리학의 통찰이다. 꿈은 깊은 마음으로 가는 ‘만남의 광장’인 셈이다. 고혜경 박사가 “꿈을 믿고 따라가라”며 꿈의 기록을 강조하는 이유다. 꿈은 무의식의 첨병으로서, 밤마다 의식에 ‘신호’를 보낸다. 융은 말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광주=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카카오톡에서 <한겨레21>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