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도 벗겨도 맛있다..궁극의 맛 양파
양파를 썰 때면 평생의 서러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가장 상처되는 말을 가족의 입에서 들었을 때 고아가 된 것 같았던 나, 그 사람을 뜨겁게 그리워하며 우주에 혼자 남은 것 같았던 나, 고약한 상사의 집요한 분탕질을 견디는 것이 월급 값이라 여기며 인고했던 나. 풀리지 않았던 궁상맞은 감정이 펑펑 솟는 눈물에 투영돼 나오는 듯하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고, 양파는 썰어야 한다. 양파는 요긴하게도 어떤 음식에나 들어가는 만능 재료다. 양파는 어떤 요리가 되었건 그 요리의 시작이기가 쉽다. 그래서 부엌의 온기가 있는 집이라면 냉장고에 양파는 한두 알쯤이나마 꼭 굴러다니기 마련이다.
4월의 시작과 함께 햇양파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밭에서 겨울을 나고 여름 시작께 수확하는 백합과(科) 파속(屬)의 알뿌리 식물이다. 그렇다. 줄기나 잎이 아니라 땅 속에 묻혀 있는 알뿌리다. 원래 제철이 5~7월 사이지만 조생종 양파는 한 발 빨리 시장에 당도한다. 4월부터 수확한 햇양파를 밭에서 사흘 정도 말려 저온창고에 보관해둔 것이 한 해 내내 공급된다. 전남 무안과 고흥, 제주 서쪽 지역이 양파 주산지로 꼽힌다.
전 세계 어느 부엌에나 있는 만능재료
흔히 먹는 노란 양파, 좀더 매운 맛이 강한 흰 양파, 노란 양파보다 살짝 부드러운 맛을 지녔으며 특유의 붉은 색소가 조리 중 희석되어 주로 생으로 사용하는 적양파 등 양파도 종류가 여럿이다. 맛에 따라 우리가 주로 먹는 매운 양파와 납작하게 생겨 아린 맛 없이 부드럽고 달달한 단 양파(mild onion)로도 나눈다. 한국에서 주로 재배되는 것은 노란 양파와 적양파. 양파와 거의 같게 생겼지만 금귤 크기로 조그맣고 부드러운 맛을 지닌 샬롯도 다른 음식 문화 유입으로 요즘 꽤 흔해졌다. 파와 마늘이 양파와 한 가족이며 락교를 만드는 염교(돼지파)와 양하, 리크, 명이 역시 다 백합과 종친들이다.
해롤드 맥기의 ‘음식과 요리’ 등 여러 도서와 자료들이 지목하듯이, 양파는 중동, 지중해 근방이 기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저 옛날 성경에 묘사된 시기,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건설 노예들의 식단에 마늘과 함께 포함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작물이다. 알뿌리 식물은 땅에서 파내 겉을 말려 두면 오래 보관할 수 있어 식량자원으로 전 세계에서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고작 조선 말기의 일이다.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종전 후로 본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일제시대 영향으로 다마네기라고 불렀고, 그 말을 그대로 한국어로 옮겨 둥근파로 부르기도 했다. 양마늘이라고 불렸다. 반 세기 역사를 가졌다는 이 나라 음식 문화에 편입된 지 고작 100여 년이 흘렀을 뿐인데 한식 곳곳에 양파가 들어가 활약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재빠르고 신기한 일이다. 그게 다 양파가 가진 마력 덕분이다.
눈물을 자아내는 양파 특유의 괴로운 향은 아닌 게 아니라 양파의 자기 보호 기제다. 동물들이 자신을 먹지 않고 기피하도록 무력한 식물이 풍기는 쓰거나 떫거나 매운 맛 중 하나인 것이다. 그 향은 휘발성이 강해 최루탄처럼 도마 위에서 날뛰곤 한다. 고등동물씩이나 되어, 고작 양파 하나 썰다가 눈물의 주마등을 보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많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양파 조각을 입에 물고 써는 방법이 있다. 모양새를 희생한 만큼의 보람은 없다. 입 안에 물을 머금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좀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물에 담가두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고통이 희석된다. 통째로 뜨거운 물에 잠깐 넣었다 빼는 것도 방법인데, 얼음물이 좀더 효과적이다. 양파를 얼음물에 30분~1시간 담가 양파의 체온을 낮추면 그 휘발되는 성질이 억제된다. 덤으로 양파 겹 사이의 투명한 막이 수분을 흡수해 질겨져 제거하기도 쉬워진다. 양파를 썰 때 뿌리에서 위쪽 방향으로 써는 것도 도움된다.
가열의 마법…양파는 맛의 분자 폭탄
이 모든 번거로움을 극복하고 양파가 전 세계 부엌의 ‘완소’ 재료가 된 이유는 양파가 부리는 마법 덕분이다. 가열을 통해 생성되는 프로필메캅탄이 핵심이다. 골치 아픈 화학성분명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맵싸한 양파가 달콤한 마법의 세계로 승천하는 키워드라는 점만 기억하자. 동량의 설탕 50~7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단맛을 낸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킹스크로스 기차역 ‘호그와트행 9와 4분의 3 승강장’ 정도의 의미가 있다.
양파는 이 성분 외에도 압도적으로 많은 분자들로 이뤄져 있으므로 동량의 양파가 그 정도로 심각하게 달지는 않으나 요리에 단맛을 내기에는 충분하다. 거기에 설탕으로는 낼 수 없는 감칠맛까지 더해져 설탕을 들이부은 것보다 한결 섬세한 맛을 완성할 수 있다. 이 단맛을 끄집어 내기 위해서는 양파를 약한 불에 오래 가열하거나, 강한 불에 빠르게 가열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후자는 서양과 동남아 음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양파(혹은 샬롯) 튀김이, 전자는 동서양 막론하고 갖가지 음식에서 활용하는 캐러멜라이즈 양파가 대표적이다. 드라마틱한 마력은 전자가 훨씬 강하다.
오랜 시간 조리하는 찌개, 찜 요리에 양파를 듬뿍 넣으면 설탕을 대체할 만한 훌륭한 단맛을 낼 수 있다. 재료를 재워뒀다 사용하는 볶음 양념에 물 대신 양파를 갈아 즙을 넣어도 부드러운 단맛을 얻을 수 있다. 육수를 낼 때 양파껍질을 모아뒀다가 넣으면 훌륭한 육수재료가 되기도 한다.
양파는 아무래도 요리의 부재료로 사용될 때가 더 많지만 주재료가 되기에도 손색이 없다. 특히나 양파 튀김은 다른 튀김이 범접할 수 없는 불가침의 고유 장르다. 묽은 반죽을 묻혀 양파 튀김을 할 때 튀김옷에 가람 마살라 같은 향신료를 살짝 섞으면 좀더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단지 카레 가루를 조금 섞어도 색과 맛이 확 나아진다. 맥주가 끝 없이 들어가는 안주다.
양파가 가장 저렴한 이 시기, 간장 달이는 냄새가 골목에 확 퍼지는 것은 양파 장아찌를 담는 후각적 광경이다. 진간장에 소금, 설탕, 식초, 매실청을 넣고 달여 손질해둔 양파에 뜨거운 채로 부어 밀폐하고 사나흘 숙성시키면 되는 간단한 장아찌다. 안 담그면 봄이 섭섭하다.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한 뒷맛을 더하면 없던 입맛도 돌아오게 한다. 전국 양파 생산량의 20% 가량을 감당하는 전남 무안에서는 여린 양파로 김치도 담는다. 다 익히지 않고 아삭할 때 먹는데, 군내 나는 젓갈을 줄이고 새우젓으로 시원한 맛을 내는 것이 어울린다.
양파를 생으로 사용할 때는 특히 양파가 가진 두 가지 질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파는 도넛 모양으로 썰면 단단하게 아삭거리는 질감을 느낄 수 있고, 결대로 썰면 탱글탱글하게 씹히는 맛을 즐길 수 있다. 익히지 않은 양파를 먹을 때 아린 맛을 줄이고 단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썬 채로 차가운 물에 담가 뒀다 사용한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자연의 화학작용이 만들어내는 달콤한 마법
양파의 마법은 요즘 제 이름을 찾아 ‘캐러멜라이즈(Caramelize)’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 길어서 그렇지, 전혀 어려운 말은 아니다. ‘캐러멜이 된다’는 투명하고 단순한 의미다. 당을 지닌 재료를 오래 가열하면 당이 분해되어 갈색을 띠는, 달콤한 동시에 잘 구운 고기 맛까지 나는 진득한 액체로 변한다. 설탕으로 만들 수 있지만 꼭 설탕이 아니어도 만들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재료가 양파다.
양파를 뭉근한 불에 끈질기게 볶으면 달콤한 잼을 얻을 수 있다. 최소 1시간, 권장하기로는 2시간이 적당하며, 그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양파는 10분의 1 분량으로 압축된다. 이때 설탕을 넣는 약식 조리법도 있긴 하지만 언제나 지름길보다는 돌아가더라도 정도를 걷는 편이 낫다. 설탕이 캐러멜라이즈의 진행을 도와 빨라지지만, 시간을 들인 것과 똑 같은 맛이 나지는 않는다.
이 마법을 이용한 대표적인 레시피가 프랑스 해장 음식 프렌치 어니언 수프다. 치즈를 듬뿍 얹은 비주얼부터가 식욕을 자극한다. 캐러멜라이즈한 양파가 듬뿍 든 이 수프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고기 맛이 물씬 난다. 겨울에 차게 식은 몸을 덥히는 데도 제격이지만 한 여름에도 당기는 마성의 맛이다. 청담동 프렌치 레스토랑 ‘레스쁘아 뒤 이부’와 신사동 가스트로펍 ‘루이쌍끄’가 이 메뉴를 잘 하기로 이름 났다.
정직하고 올곧은 프렌치 어니언 수프가 가정에서 만들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를 활용할 음식은 어디나 있다. 일본의 배우 다카하시 가쓰미가 오래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캐러멜라이즈 양파 카레 레시피가 블로거들 사이에서 조용히 통용되다가 작년 백종원씨에 의해 한국 방송에도 소개됐다. 평소와 똑같이 카레를 만들되,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를 재료 볶을 때 함께 넣는 것이 두 레시피의 핵심이다. 완전히 다른 카레가 된달 정도로 깊은 맛이 난다.
파스타 소스에도 물론 활용할 수 있다. 시판 파스타 소스에 생양파를 더해 맛을 보태기도 하지만 조금 더 수고를 들여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를 넣으면 시판 소스 특유의 향을 누르고 레스토랑 못지 않은 풍미를 낼 수 있다. 굳이 시판 소스를 찾지 않더라도 요즘 제철을 맞아 쏟아져 나오는 생 토마토와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를 함께 오래 끓이는 것만으로도 꽤 근사한 소스를 얻을 수 있다.
맛이 빈약한 한국의 토마토로 시판 소스처럼 두터운 맛을 내기 위해서는 지중해식 멸치 젓갈인 앤초비를 함께 사용하면 좋다. 꼭 앤초비가 아니어도 멸치 액젓이나 참치 액젓, 심지어 밴댕이젓이나 갈치속젓 등 무침젓갈이 아닌 젓갈이라면 어떤 것이든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한국식 젓갈이 서양의 것보다 군내가 심해 특유의 향이 느껴지지 않는 정도로 소량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를 그대로 잼처럼 빵이나 차가운 햄에 발라 먹어도 잘 어울리며, 토르티야에 얹어 오븐에 구우면 양파 피자가, 식빵에 얹어 구우면 양파 토스트가 된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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