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컴퓨터 숙제 내주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파워포인트 강습 받아

성유진 기자 2016. 3. 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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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윤모(39)씨는 지난 겨울방학 때 딸에게 '파워포인트 단기 속성' 과외를 시켰다. 아이에게 컴퓨터 프로그램을 가르치지 않았다가 낭패를 봤기 때문이다. 작년 윤씨의 딸은 '나의 꿈'에 대한 발표를 준비해오라는 숙제를 받아왔다. 딸과 함께 발표 내용을 의논해 공책에 적어 들려 보냈는데 그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 표정이 시무룩했다. 알고 보니 반 아이 절반 이상이 파워포인트(PPT)를 이용해 발표했다고 한다. 윤씨는 "친구들은 애니메이션 효과까지 넣어 화려하게 PPT를 만들어 왔다더라"며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아예 PPT로 만들어오라고 한다기에 컴퓨터 과외를 시켰다"고 했다.

디지털 기기를 접하는 나이가 갈수록 어려지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는 아이가 늘고 있다. 현행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블로그에 글 올리기'·'파워포인트로 발표 자료 만들기' 등 컴퓨터 교육이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3학년, 빠르면 1학년부터 워드프로세서·파워포인트·동영상 편집 등을 배운다. 이치훈 서울교대부설초교 교사는 "선생님에 따라 다르지만 창의적 재량학습 시간을 이용해 2학년 때부터 PPT를 가르치는 분들도 있다"며 "초등학교 2학년 정도면 적어도 한글 프로그램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7년째 프레지(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강의를 하는 엄혜경 강사는 "처음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만 있었는데 요즘은 1학년 아이들도 와서 수업을 듣는다"며 "어린 아이들일수록 오히려 스마트폰 쓰듯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익힌다"고 했다.

엄마들 사이에선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고 컴퓨터 과제를 내준다며 결국 컴퓨터 숙제가 '엄마 숙제' 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대전에 사는 변지원(36)씨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과학자를 조사해오라는 PPT 숙제를 내주더라"며 "이제 겨우 타자 연습 정도를 한 아이가 혼자 만들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해 결국 내가 파워포인트 책을 사다 배워 만들어줬다"고 했다. 컴퓨터를 이용한 과제는 엄마가 대신 해줘도 잘 티가 나지 않아 '엄마 숙제'가 되기 쉽다고 한다. 컴퓨터에 능숙하지 않은 엄마들은 아이를 서둘러 컴퓨터 학원이나 방과후 학교 컴퓨터반으로 보낸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둔 한 학부모는 "어차피 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배워 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에 대해 교사들은 "알려주지도 않고 과제로 내는 건 일부 교사들 이야기"라고 했다. 한 교사는 "PPT 과제는 거의 조별 과제인데, 워낙 방과후 학교로 컴퓨터를 배우는 아이가 많아 보통 한 조에 한 명 정도는 PPT를 할 줄 안다"며 "교사들이 요구하는 수준도 PPT를 열고 간단히 글을 넣는 수준이지 화려한 자료를 원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오히려 모든 숙제를 컴퓨터로 해결하는 아이들을 두고 교사들도 고민이 많다. 전북 군산의 초등학교 교사 이모(31)씨는 "뉴스 형식으로 발표하도록 과제를 내줬더니 아예 뉴스 동영상을 만들어온 아이도 있었다"며 "동영상까지 만들었다며 칭찬을 해줘야 할지, 앞에서 직접 발표하지 않았다고 혼을 내야 할지 난감했다"고 했다. 갈수록 손글씨를 쓰지 않아 아예 컴퓨터로 숙제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사들도 있다. 서울 중랑구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한 교사는 "워드로 숙제해오는 걸 놔뒀더니 포털 내용을 그대로 긁어오는 아이가 대부분이었다"며 "심지어 일기도 타자로 쳐와 그 후부터는 컴퓨터로 숙제를 해오면 다시 손글씨로 옮겨 쓰게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이른 나이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정광순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는 "컴퓨터 수업이 5학년부터 시작되는 건 연령대별 발달 수준을 고려한 것"이라며 "초등학교 저학년은 직접 만져보고 종이에 글씨를 쓰며 표현을 배워야 하는 시기이고, 그것이 인지 능력을 기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반면 홍명희 서울교대 컴퓨터교육과 교수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를 접한 아이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최소한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부모 세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인 만큼 '디지털 세대'의 교육법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서정희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부장은 "연필을 쓰지 않게 되면서 잃어버리는 능력도 있겠지만 그 대신 컴퓨터로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울 수도 있는 것"이라며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았던 어른들의 기준으로 교육 효과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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