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그 겨울 발트해 연안에서 먹은 시리아 가지 피클

나카가와 히데코·요리연구가 2016. 3. 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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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유학시절 만난 학생 하산 고국 시리아서 가져온 피클을 기숙사 침대 밑에 간직해둬 음식이란 살기 위한 에너지.. 기억이며 사모이며 애정 일상의 기쁨까지 깨닫게해줘

내전 중인 시리아 정세를 전하는 CNN 보도를 볼 때면 28년 전 유학 생활을 함께한 시리아인 하산이 떠오른다. 추억 속의 하산은 고향에서 가져와 기숙사 침대 밑에 숨겨뒀던 가지 피클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던 나는 동독이라는 국가가 존속했던 마지막 1년을 교환학생 신분으로 발트해에 접한 항만 도시 로스톡에서 보냈다. 1419년 설립돼 독일에서도 오래된 대학 중 하나였던 로스톡대학에서 일본에서 같이 간 대학 동기 3명과 함께 독일어를 전공했다. 독일어과에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호기심 왕성한 미국 예일대·브라운대 학생들,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학생들, 나와 함께 온 일본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동독 학생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다. 로스톡대에는 우리 말고도 외국인이 많았다. 소련 지배 당시 증설된 조선(造船)학과에 북한, 시리아, 남예멘, 중국, 쿠바 등에서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소수파였기 때문일까. 아랍계와 아시아 학생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어느 날 내 독일인 룸메이트, 일본인 유학생 3명, 시리아인 하산과 이름을 잊어버린 남예멘 학생이 기숙사의 공용 부엌에 모여 각 나라 요리를 만들게 됐다. 당시 배급제였던 동독에서 겨우 손에 넣은 식자재와 각자 가져온 향신료나 조미료로 고향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뜨거운 우동을 만들었다. 대파를 못 구해 양파를 넣었다.

며칠 후 하산과 대화 중에 일본의 저장 음식인 우메보시 얘기를 꺼냈더니 "시리아에도 그런 발효 식품이 있다"며 천에 둘둘 말려 있는 항아리를 갖고 왔다.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듯 조심스레 가져다준 항아리 안에는 올망졸망 작고 동그란 가지가 들어 있었다. 하산이 한 개만 맛보게 해준 가지는 홍고추와 고수 씨 등에 담가 둔 피클이었다. 하산은 "수도 다마스쿠스에 계시는 어머니가 담가 주신 것을 가져왔지. 이 가지는 말이지…"하며 자랑스럽게 가지 피클 담그는 방법을 설명했다. 하산의 가지 피클은 알맞게 짰고, 고수 향이 은은했다. 그때 레시피를 들어뒀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산에게 추운 기숙사 침대 밑에 고이 간직하고 꺼내 먹던 가지 피클이 있었다면, 내겐 아버지가 남겨주신 수많은 레시피가 있었다.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섬인 사도(佐渡)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버지는 1950년쯤 우연히 양과자 책을 손에 넣었다. 매일같이 책장을 넘겨보던 아버지는 언젠가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가 일본 최고의 파티시에가 되리라는 꿈을 키웠다. 마침내 파리로 건너간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사가 돼 78세까지 소스를 졸이고 스테이크를 구웠다.

내게 요리는 아버지가 마음으로 써서 건네주신 손편지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음식 앞에 겸허하고 자신에게는 매우 엄한 분이었다. 식재료를 존경하는 마음, 오감을 갈고 닦는 노력 등등 요리사로서 지켜야 할 기본과 마음가짐을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곁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나는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다양한 나라를 떠돌다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 땅에 정착하고서야 요리의 길에 들어섰다. 요리를 생업으로 하겠다고 결심하자 운명인 듯 계시인 듯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조리대 앞에 서서 무심한 듯 읊어주시던 스테이크 굽는 법, 샐러드드레싱 만드는 법, 애플파이 사과를 졸이는 법도 함께였다. 일부러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가슴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책을 통해서나 요리 교실에서 가르치는 레시피는 모두 아버지의 목소리로 내 가슴의 도화지에 새긴 것들이다. 그 도화지 위에 다양한 나라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배운 레시피, 요리로 생업을 이어가면서 터득한 방법 등을 더해 그려넣은 것이 내 요리책이 됐고, 에세이가 됐다.

그러나 레시피는 레시피일 뿐이다. 손에 쥐는 식재료에 따라, 만드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입김이 불어넣어 진다. 먹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요리는 살아있다. 오감을 이용해 눈앞의 재료를 아낌없이 버무려 만들어 먹는 것. 그러한 것들에 일상의 기쁨까지 각인될 때 "맛있다!"는 감탄사가 나오는 게 아닐까.

하산이 추운 발트해 도시의 기숙사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꺼내 먹었을 가지 피클. 그것은 살기 위한 에너지였음이 틀림없다. 내림 음식이라는 형태로 할머니로부터, 어머니에게로 내려온 레시피를 전해주는 내 한국 요리 선생님은 "음식이란 기억이며 사모이며 애정"이라고 했다. "기억과 애정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에너지의 근원이 된다"고. 고국을 떠나 긴 세월을 해외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버지가 주신 손편지, 기억 속의 요리 덕분이라는 것을 날이 갈수록 절실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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