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예술의전당에선 합창단석에 앉아라

2016. 2. 2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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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는 바로 이 자리가 명당이다. 푯값도 대체로 가장 저렴하다. 1층의 구석이나 2·3층의 아득하게 높은 자리들보다 이 합창단석이 해당 곡의 본질을 의외의 각도에서 날카롭게 응시할 수가 있다.

서초동 예술의전당 같은 상당한 규모의 공연장에 갈 때면 대체로 예약을 하면서 좌석을 정하게 되는데, 어느 자리가 음향적으로 좋은 곳인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대개는 무대에 가까운 곳을 선호하게 된다. 비록 지휘자의 뒷모습을 2시간 가까이 올려다 보게 되지만, 그래도 좌우에 걸쳐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는 관객들이 적고 열연하는 연주자들의 생생한 표정을 볼 수 있으니 그렇게들 한다.

그런 자리가 가격도 비싸다. 오래전에는 A석만 해도 꽤 좋구나 했는데, 요즘은 그 위로 S석이 있고 또 그 위로 R석이 있고 또 그 위로 VIP석도 있다. 고급 호텔에서 귀빈 의전을 할 때 VIP로는 마땅치 않아 VVIP였다가 아예 하나를 더 붙여서 VVVIP라고까지 하는데, 공연장도 그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의 경우 1층 한가운데에서 조금 뒤쪽으로 두 줄 정도가 VIP석인데, 진짜 VIP가 갑자기 찾아오거나 혹은 아주 당당하고도 심각하게 불평을 제기하는 관객을 급히 안정시켜서 공연을 무난히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가급적 비워두기도 한다.

예술의 전당 관람석

콘서트홀 2500석 중 어디에 앉을까 공연장의 좌석 등급은 전반적으로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날그날의 레퍼터리와 예상 관객과 소요된 비용 등에 의해 대관하는 쪽이 아니라 공연 주최 측에서 정한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경우 정통 클래식 쪽의 오페라는 물론 대형 뮤지컬도 공연하는데, 이때 공연 주최 측에서 푯값, 즉 좌석의 등급을 치밀하게 예상하여 결정한다. 꽤 인기 있는 공연일 경우 A석이라고 해서 그럭저럭 괜찮겠거니 싶다가도 막상 들어가 보면 1층의 측후방이나 2·3층의 구석으로 찾아갈 때가 많다.

가격을 떠나서 좌석을 선택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의 공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공연뿐만 아니라 ‘3·1절 기념식’ 같은 국가 행사까지 너끈히 치르도록 설계된 세종문화회관의 대극장은 과거에 3895석이었다. 2003년 1월,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여 무려 14개월 만인 2004년 2월 28일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으로 새출발하였는데, 그래도 좌석 수는 3075석에 달한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좌석도 2500석이 넘는다.

이런 곳에서 독주 연주나 실내악을 듣고자 한다면 가급적 가까운 자리를 선택하는 게 좋다. 1999년 가을에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들었는데, 근대 이후의 개량된 첼로가 아니라 18세기의 바로크 첼로를 연주하는 안너 빌스마의 연주였기에 더욱이 그 소리들은 저 멀리서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일렁거렸다. 음악평론가 장일범은 그날의 공연에 대해 “자유로운 운궁을 추구했고 전통적 보잉의 족쇄를 풀어버렸다”고 했는데, 아마도 조금은 가까운 자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원래 이 곡은 바로크 귀족사회의 살롱이나 당시 귀족 자제들의 조금은 널찍한 공부방 같은 곳에서 연주하는 곡인데, 이를 2500석이 넘는 곳에서 들어야 하니 가급적 다가가는 게 좋은 것이다. 그 기억 때문인지 2003년 전설의 보로딘 현악4중주단 내한 공연 때는 최대한 무대에 밀착하여 들었는데, 그래서 그날 나를 포박했던 그들의 선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이나 협주곡이라면 이런 콘서트홀이 최적이고, 따라서 그에 걸맞은 자리, 즉 가급적 1층의 뒤쪽이나 필사적으로 2층의 앞자리를 선택하는 게 좋다. 풍만하게 펼쳐지는 소리의 폭을 귀가 아니라 전신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이렇게 물러나야 한다.

모차르트나 하이든 같은 소편성의 교향곡이라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지만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나 특히 브룩크너, 말러 같은 ‘우주가 흔들린다면 바로 이런 소리가 날 거야’ 하고 작곡한 교향곡들은 무조건 뒤로, 할 수만 있다면 2층 앞자리를 선택해야 한다. 이건 일차적으로 음향적 판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합창단까지 포함하여 200명가량의 연주자들이 최후의 소실점을 향하여 온갖 비명과 절규와 기도와 주술을 드리는 그 음악적 의미를 제대로 조감하기 위해서다. 브룩크너 8번의 경우 2층 앞자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들으면 거대한 알프스, 그 지독히도 높은 곳까지 천, 천, 히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는 선율의 대장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다가 잠시 눈을 뜨면, 아니 저 자리는? 하고 문득 보이는 좌석이 있다. 합창단석이다. 무대 뒤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 배치된 자리다. 협주곡이나 합창이 수반되지 않는 교향곡 연주회 때 수십명의 연주자들 위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관객들이 있다. 물론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나 말러의 2번, 3번, 4번, 8번 같은 합창이 수반되는 교향곡 때는 매표하지 않는다.

음향적으로는 사실 큰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장엄하게 펼쳐진 연주자들을 폭넓게 완상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선호도가 높지 않고, 그래서 푯값도 대체로 가장 저렴하다. 모든 공연장에 다 설치된 것은 아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는 없고 음향 수준이 국내 최고라는 고양 아람누리 음악당에도 없다. 몇몇 곳에 있는데, ‘다행히’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는 아주 훌륭한 합창단석이 있다. 시야의 사각도 아니고 청각의 외진 곳도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바로 이 자리가 명당이다. 1층의 구석이나 2·3층의 아득하게 높은 자리들보다 이 합창단석이 해당 곡의 본질을 의외의 각도에서 날카롭게 응시할 수가 있다. 우선 지휘자의 난폭한 쌩얼을 볼 수가 있다. 지휘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주 이 자리를 선택한다. 악기 전공자들도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을 보고 배우기 위해 이 자리를 찾는다. 음악 애호가들은 어떤 곡들을 의외의 관점에서 예리하게 듣기 위해 이 자리를 일부러 찾는다.

예술의 전당 외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휘자의 난폭한 쌩얼을 볼 수 있다

지난 1월 17일, 나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합창단석에서 ‘트라이앵글’을 들었다. 그날은 나로서는 ‘상중’(喪中)이었다. 성공회대 신영복 선생님의 장례기간이었는데, 이 또한 참례하지 않을 수 없어 검은 옷을 입고 합창단석에 앉아 있었다. 레퍼토리는 고약하게도 필멸의 몸부림으로 가득찬 말러 6번 교향곡 ‘비극적’.

말러의 교향곡이 대개 그렇듯이, 이 6번 교향곡에는 여느 곡에서는 들을 수 없는 온갖 타악기들이 등장한다. 필멸의 불안에 흔들리는 현악기들, 절규하듯 울부짖는 관악기들, 그리고 그 뒤로 팀파니를 비롯하여 큰북, 작은북, 탐탐, 글로켄슈필, 종, 루테, 심벌즈, 베이스 드럼, 스네어 드럼, 그리고 악마적인 육중한 해머 타격에 이르기까지 온갖 타악기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비극적’의 극한을 추구한다. 말러의 지시에 따라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와 김미연은 무대 바깥으로 나가서 카우벨(소방울)을 흔들다가 들어오기도 했다. 이런 곡은 이렇게 일부러 합창단석을 선택하여 듣는, 아니 보는 것이다.

그리고 트라이앵글이 들렸다. 아니, 보였다. 그 가늘고도 투명한 소리! 아차 하면 들리지도 않을 소리, 그것이 보였다. 그래서 들렸다. 묘혈을 열고 나온 시신들의 행렬 같은 콘트라베이스, 천상의 장막을 찢어버릴 듯한 트럼펫, 마지막 한 즙이라도 쥐어짜내는 듯한 현악기, 이 모든 소리들을 압도해 버리는 팀파니! 그런 날카롭고도 육중한 소리들이 80분 가까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뒤흔드는 동안, 트라이앵글은 무대 오른쪽 구석에서 비 맞는 작은새처럼 흔들렸다. 저 2층이라면 소리만 들리고 그보다 높은 3층이라면 그조차도 듣지 못할 트라이앵글을, 합창단석에서 바로 내려다보았다. 트라이앵글은 팀파니의 육중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흔들어 여린 소리를 냈고, 심벌즈의 와장창 하는 격렬함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애틋한 비명을 질렀다. 그 작은 악기가 6번 교향곡 ‘비극적’의 비극성을 온몸을 떨며 웅변했다.

그때, 상중의 나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떠올렸다. ‘나침반 이야기’ 말이다. 그날의 트라이앵글이 꼭 그러했다. 일점, 더하거나 빼지 않고 옮긴다.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날, 한없이 작은 몸으로 떨었던 트라이앵글이 내게는 나침반이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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