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자연에 길을 묻다] 부끄러운 흔적과 깨우침

김성호 | 서남대 의과대학 교수 2016. 2. 15.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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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살다보면 이런저런 슬픔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중 가장 큰 슬픔은 부모님께서 더 이상 뵐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해 봄 끝자락, 낮에도 밤에도 내 가슴에서 빛나던 하나의 별마저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고, 아픈 마음 어찌 보듬고 살아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나는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잊게 마련인 뇌의 속성도 한몫을 했겠지만 남겨진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적입니다. 계절을 따라 입으셨던 옷 몇 벌, 험한 곳 자주 오가는 것을 염려하며 써주신 편지, 두 분의 모습이 담긴 사진 등입니다.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자연에 깃들인 친구들과의 만남에도 비슷한 모습이 있습니다. 노루, 산양, 담비, 삵, 수달 같은 친구들은 보고 싶다하여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볼 수 있더라도 멀찌감치 얼핏 스쳐감으로 끝나기에 가까이서 그 맑은 눈을 마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을 찾아 완벽하게 위장하고 기다리면 되나 그 기다림의 끝은 기약이 없는 것인지라 먼저 지쳐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들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길은 언제라도 열려 있습니다. 남겨준 발자국, 배설물, 먹이를 먹은 흔적, 생활습관의 흔적 등이 그것입니다.

비나 눈이 온 뒤라면 저들과 가장 쉽게 대화할 수 있는 흔적은 발자국입니다. 우선 고양잇과의 친구들은 발가락이 모두 넷인데, 발톱을 숨긴 채 이동하기 때문에 네 개의 발가락만 흔적으로 남습니다. 아쉽게도 호랑이와 표범을 비롯한 고양잇과의 친구들은 우리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 삵만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물기 머금은 흙이나 눈 위에 발톱이 없는 네 개의 발가락이 찍혀 있다면 그 발자국을 따라 움직인 것은 삵입니다. 그러나 근래 야생 고양이들이 늘고 있어 서식지 환경이나 발자국의 크기 등을 꼼꼼히 챙겨 구별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습니다. 갯과의 동물 역시 고양잇과처럼 발가락이 넷입니다. 그런데 갯과의 동물은 항상 발톱을 내밀고 이동을 하기 때문에 고양잇과와 달리 발자국에 발톱이 함께 찍히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갯과의 늑대, 승냥이, 그리고 여우마저 우리의 땅에서 이미 멸종했다는 점입니다. 남은 것은 너구리입니다. 개가 있을 수 없는 곳에 네 개의 발가락과 함께 발톱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면 너구리가 다녀간 것입니다. 갯과와 고양잇과와 달리 족제빗과에 속하는 동물들은 발가락이 다섯입니다. 족제빗과에 속하는 오소리, 족제비, 그리고 수달은 다섯 개의 발가락에 발톱을 남깁니다. 또한 이들 각각은 크기와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잊지 않도록 쉽게 설명할 때는 ‘너구리 넷, 오소리 다섯’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물기 머금은 흙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너구리 발자국.

동물이 남길 수밖에 없는 흔적 중 발자국만큼이나 확실한 것이 배설물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사는 것이 동물이므로 배설물은 살아있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에 따라 배설물의 생김새가 조금씩이라도 다른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강가나 산속을 더듬다 특정 동물의 배설물을 만났을 때 마치 그 동물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또 어떤 동물이 무엇을 먹는지를 일일이 따라다니며 살필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배설물은 동물의 먹이습성을 고스란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무척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초식동물의 배설물은 대개 알 모양으로 깔끔하며 냄새도 없습니다. 육식동물의 배설물은 전체적으로 길쭉한 모양인데, 한쪽 끝은 뭉뚝하고 다른 한쪽은 가늘며 색깔은 거무튀튀한 경우가 많습니다. 수달의 서식이 확실한 지역이라면 수달의 배설물은 찾기가 쉽습니다. 자기의 영역임을 알리기 위해 눈에 잘 띄는 바위나 돌 위에 배설물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위가 없고 모래만 있는 곳에서는 모래를 긁어모아 볼록하게 탑을 쌓고 그 위에 배설을 하기도 합니다. 수달의 배설물에는 물고기의 뼈, 가시, 그리고 비늘 따위가 잔뜩 들어 있습니다.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동물인 것을 감출 길은 없습니다. 이 밖에 먹이를 먹은 흔적, 목욕을 하고 떠난 자리, 보금자리와 쉼터 등이 동물마다 독특하기 때문에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차분하게 저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겨울비 자박자박 내리고 멈춘 날,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학교에서 산 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흙길로 들어섰습니다. 푹신해진 흙길 위에 너구리의 발자국이 또렷이 찍혀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도 없던 흔적이니 지난밤 어두움에 기대어 너구리가 다녀간 모양입니다. 무릎 접고 발자국 따라가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그려봅니다. ‘겨울잠에 푹 빠지지 못하고 움직인 것을 보니 배가 고팠나 보구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왔었네. 겨울에 들어서며 서로 짝을 잘 찾은 것은 다행이야. 저기로 내려와 여기서 물 마시고 이쪽으로 돌아갔구나. 여기서는 발자국이 깊이 눌려 있는 것을 보니 한참 머물렀네. 가던 길 잠시 멈춰 하늘이라도 올려다볼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야. 이런, 여기서부터는 보폭이 확확 늘어나네. 그 밤에도 무언가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야 했구나.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발자국을 만나고 온 날이면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 또한 이 세상에 발자국을 남기는데, 그 중에는 부끄러운 발자국 몇 개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밤, 나 혼자만 꺼내 펼쳐볼 수 있는 발자국 들여다보며 이렇게 되뇝니다. 다시는 이런 발자국 남기지 말자고 말입니다.

<김성호 | 서남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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