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 이란 기행] 세계 최초의 세계제국 페르시아 세계 첫 종교 조로아스터교 발상지

글·사진 월간산 박정원 부장대우 2016. 1. 2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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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궁전 등에 자취 남아.. 사막・소금호수 트레킹도 이색체험

이란은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제국이라는 세계 최초로 세계제국을 건설한 국가다. 페르시아제국 이후 몇 개의 왕조를 거치지만 페르시아의 화려했던 고대문명의 명성을 잇기 위해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BC 6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페르시아란 제국의 명칭은 계속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번성했을 시기는 BC 5세기 전후 다리우스 대왕 때다. 지금의 인도 서부와 그리스 동부 일부와 이집트까지 점령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월간산]이란 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강이 지나는 고대 도시 이스파한. 도시의 중심을 가르는 자이안데루드강이 흐르고 있다.

이란은 또한 세계 최초의 종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교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강력한 사상적 기반, 즉 통치이데올로기가 조로아스터교였던 셈이다. 조로아스터교 교리는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으로 요약된다. 페르시아제국의 가장 번성기였던 다리우스 대왕 때는 국교였다.

[월간산]폐허가 돼 고대문명의 자취를 전하는 페르시아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궁전 터에 황혼이 물들고 있다.

하지만 페르시아와 조로아스터교는 지금은 거의 전설로만 전한다. 그 화려했던 제국과, 그 제국의 사상적 기반이 됐던 종교의 두 축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왜 쇠퇴하게 됐을까?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아직까지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 이란 전역을 분주히 발굴하고 있다. 

[월간산]페르시아제국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 주는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거대한 진입로에 이어 웅장한 입구가 과거의 영화를 대변하는 듯하다.

페르시아란 명칭은 남부 파르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데서 유래했다. 1935년 팔레비 왕정에 의해 이란으로 국호가 개명되기 전까지 이란은 페르시아로 불렀다. 그 화려한 과거의 기억과 전설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천 년 간 불려온 페르시아라는 국호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로 나가려는 팔레비왕의 의지를 담아 아리안족의 후예라는 의미를 지닌 이란으로 바꿨다.

[월간산]페르시아제국을 거대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기초를 닦았던 키루스 대왕의 석관묘. 그의 고향 파사르가대에 세계유산으로 보존돼 있다.

‘아리안족’ 하면 잊을 수 없는 세계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히틀러가 아리안족의 순수혈통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유대인 대학살’을 일으킨 것이다. 나치의 심볼과 불교의 만(卍), 십자  모양의 문양 등은 조로아스터교의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나왔다. 영어로 조로아스터이지만 페르시아식 발음은 짜라투스트라다. 니체는 조로아스터와 불교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로 대변되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세계적인 철학서를 썼다고 한다. 영겁회귀로 순환되는 삶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고, 그 순환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나치의 심볼과 불교의 만, 십자 모양의 문양 등이다. 자연의 지수화풍도 영겁회귀로 순환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애초의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했으며, 이후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했다. 남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은 페르시아에 정착했고, 서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은 유럽 아리안의 원조가 됐다. 이들이 지금 독일인의 선조다.

[월간산]가장 화려한 페르시아제국을 열었던 다리우스 대왕의 묘를 자연 암벽을 이용해서 만들어 아직 보존하고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화려한 영광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페르세폴리스(Presepolis)를 중심으로 페르시아 고대문명을 한 번 살펴보자. 먼저 페르시아제국시대를 활짝 연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시라즈(Shiraz) 인근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건립하기 이전 페르시아제국의 중심지였던 파사르가대(Pasargadae)에 있으며, 이곳도 세계문화유산이다.

[월간산]1 페르세폴리스 궁전은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2 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을 태우는 화로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키루스 대왕 석묘 있는 세계유산 파사르가대

[월간산]키루스 대왕의 동상.

들어서는 순간 4층의 기단에 높이 11m에 이르는 거대한 석묘가 보인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안내문에는 ‘키루스 대왕의 시신은 황금관 안에 있으며, 그 옆에 무기와 유품 등이 같이 매장돼 있다. 무덤 안 유일하게 ‘나는 아케메니드 키루스 대왕이다(I am Cyrus the king, on Achaemenid)’라는 글자가 석각으로 새겨져 있다’고 적혀 있다. 주변엔 키루스 대왕의 개인정원과 석탑, 궁전 등이 그의 자취를 전한다.

[월간산]이슬람국가에서 가장 넓은 이맘광장. 주변 건물은 이슬람사원과 바자르(전통시장)로 활용하고 있다.
페르시아제국의 키루스 대왕은 그의 고향인 이곳에서 거대한 제국의 기틀을 다진다. 키루스 대왕은 엄격히 말하면 키루스 2세다. 메디아왕조의 마지막 왕의 외손자로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자 키루스 1세의 손자다. 키루스 대왕은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며, 이란 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리디아・바빌로니아 등 주변국을 잇달아 점령했으며, 다양한 민족의 문화와 왕조를 존중하면서 통치했다. 키루스 대왕은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후 칙령을 내려 바빌로니아에 끌려온 유대인들을 풀어 준다. 나아가 예루살렘성이 재건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자신의 군인들에게 점령지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금지시켰다.

역사상 키루스 대왕처럼 여러 민족으로부터 칭송을 받은 왕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찬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국이었던 그리스에서도 오랫동안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았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키루스 대왕을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로 표현했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도 최고의 역사서 <역사>에서 ‘페르시아인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한다.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간산]고대 신전으로 이용했던 지구라트신전. 조용헌 박사는 “비봉포란형으로 봉황이 날아 알을 품은 자리”라며, “이곳에서 무녀가 접신했고, 시신을 조장(鳥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조차 그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 ‘하느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했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 대왕도 키루스 대왕을 위대하게 여겨 그의 무덤인 파사르가대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월간산]소금호수트레킹을 즐기고 있는 일행. 끝없이 펼쳐진 소금호수를 걷고 있다.

입구엔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이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젠 페르시아제국을 가장 번성시킨 페르세폴리스로 이동한다. 3대 다리우스 대왕 때 페르시아제국은 중심지를 파사르가대에서 페르세폴리스로 옮긴다.

[월간산]소금호수에서 소금을 채취해 운송하는 화물차가 지나고 있다.

이란 지역의 고도는 전부 2,000m 내외로 나온다. 수도 테헤란도 해발 1,500~1,700m를 나타냈다. 테헤란 바로 뒤 앨부르즈산맥의 정상은 다마반드(Damavand)산이다. 고도는 무려 5,604m. 테헤란에서 버스를 타고 수백 km 내려오는 길에 유심히 고도를 체크했다. 제일 낮은 고도가 1,500m였을 정도다. 페르세폴리스 가는 길에 2,500m 꼭짓점을 찍고는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이란고원이란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페르세폴리스는 해발 1,600m를 가리켰다.

[월간산]대상들의 숙소였던 카라반사라이가 마치 철옹성을 연상케 한다.

페르세폴리스는 세계 건축학적 유적

[월간산]사막트레킹에 나선 일행들이 힘들게 사막능선을 올라서고 있다.

드디어 페르시아제국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페르세폴리스에 이르렀다. 다리우스 1세가 건립한 페르세폴리스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파사르가대나 페르세폴리스의 공통점은 매우 넓은 평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적의 침입을 사전에 차단하는 천혜의 요새 같다.

[월간산]조로아스터교 교주 조로아스터.

페르시아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이곳의 원래 지명은 페르시아란 이름이 유래한 ‘파르사(Parsa)’였다. 페르세폴리스는 도시국가인 그리스인들이 페르세폴리스로 부르면서 이름을 가져오게 됐다고 안내문에서 설명한다.

[월간산]

궁전으로 들어서는 순간 페르시아제국의 화려했던 자취에 잠시 숙연해진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에 건립한 궁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대규모 입구에서 양쪽으로 올라가는 111개의 기념비적인 계단, 날개달린 거대한 소들, 공물 바치는 외국 사신들, 웅장한 진입로, 공식 알현실, 접견실 등 영광의 흔적을 그대로 전하는 메인 건물과 부속 건물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쿠이라마트(Kuh-i-Rahmat, 자비의 산) 산기슭에 있는 궁전은 자연을 그대로 살린 인공의 궁전이다. BC 518년 다리우스 1세가 건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단의 남쪽 면에 ‘다리우스 대왕이 페르세폴리스를 창건했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유네스코 등재이유도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대문명의 독특한 자질을 보여 주는 증거로 평가된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계속 고고학적 탐사를 하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기단에는 다리우스 1세(BC 522~486),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Xerxes, BC 486~465),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BC 465~424)가 3세대에 걸쳐 왕궁복합단지를 세웠다’는 것이다. 3대 100년에 걸친 왕궁이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특히 유적 입구 천장 대들보가 교차하는 지점 바로 위, 두 쌍의 황소 조각이 맞대고 무릎을 꿇고 있다.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한다. 황소는 몸통으로, 얼굴은 사람, 날개는 독수리의 형상이다. 이는 사람의 지혜로 땅을 통치하고, 독수리는 하늘의 힘을 상징하고, 소는 땅의 힘을 나타낸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그 옆에는 상상의 새도 있다. 독수리 머리에 귀는 소의 형상, 뒤 몸체는 말이다. 가이드는 “이 형상은 이란인의 심볼이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상상의 새”라고 소개한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상징으로 왕조도시의 걸출한 도시다. 그 때문에 BC 330년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세폴리스를 불 태웠다고 전한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그들은 2만 마리의 노새와 5,000마리의 낙타에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을 실어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세계 최고의 고대문명을 간직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전 지역을 정복하고 페르시아문명을 대체할 새로운 그리스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다. 도시는 불에 타 사라졌지만 문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케메니드 페르시아 제국이 다스렸던 통치방법은 다른 왕조에 의해 수없이 모방 변형되면서 다양한 인종과 종교, 언어, 풍습을 가진 대제국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페르시아란 개념이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고 회자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페르시아제국은 아케메니드 페르시아에 이어 파르티아왕조, 사산조 페르시아까지 651년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아케메니드 페르시아가 세계에 끼친 영향, 그 이름의 유래, 거대 궁전의 자취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어, 세계인들이 페르시아제국이라 하면 페르세폴리스만을 기억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란의 세계 최초의 세계제국과 함께 세계 첫 종교로 알려져 있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는 관련박스에 소개하기로 한다(관련 대박스 참고).

소금호수 트레킹 지역이 해발 750m로 안정적

이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트레킹이나 등산이 아니라 사막트레킹과 소금호수트레킹을 꼽을 수 있다. 테헤란 북동쪽 앨부르즈 산맥(Alborz Mountains)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다마반드산 트레킹도 하지만 실크로드를 따라 걷는 사막트레킹과 소금호수트레킹이 이색트레킹으로서 외국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카샨(Kashan)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진다. 카샨은 테헤란의 남쪽, 이스파한(Esfahan)의 북쪽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테헤란에서 버스로 4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스파한은 셀주크(1051~1220년) 왕조와 사파비드(Safavid) 왕조시대의 수도로서 중부 이란의 핵심도시다.

이란 지도를 보면 카샨은 사막과 접해 있다. 카샨은 원래 대상(隊商)들이 쉬어가는 도시였다.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이 ‘이제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짐도 재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마지막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사막트레킹을 체험하기 위해선 대상이 다니던 시절 오아시스로 활용했던 캐러반사라이에서 하루 숙박해야 한다. 버스로 40분쯤 간다.

사막의 모래 때문에 모래먼지를 견딜 수 있는 엔진을 장착한 다른 버스로 갈아탄다. 버스 안으로 모래먼지가 날아온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입 안에 모래가 씹힐 정도다. 버스가 정차했다. 사막의 운행수단인 낙타가 버스 앞을 가로막고 선다. 낙타를 보는 재미도 있으나 ‘메르스’ 걱정이 앞선다. 낙타의 침이 공기를 통해서 메르스를 전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나마 모습을 담는다.

목적지인 마랑자브 캐러반사라이에 도착했다. 사막 한가운데 철옹성 같은 성(城)이다. 가이드 마리안은 “2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군인 500여 명이 지키며 카자흐스탄・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오는 외부 침입을 막았고, 대상들을 보호했다”고 말했다. 캐러반사라이 옥상엔 외부를 감시할 수 있는 초소 같은 전망대와 벽을 높이 쌓은 중간마다 구멍을 내놓았다.

어디서든 물이 중요하지만 사막에서는 특히 그렇다. 캐러반사라이 바로 앞 오아시스 같은 우물에 물이 나온다. 양동이로 물을 떠서 사용하고 있다. 여장을 풀고 사막트레킹에 나섰다. 발이 모래에 푹푹 빠진다. 산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 생애 첫 경험이다. 해수욕장에서 뛰어다니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신기하다. 사막의 광활한 평원에 나 혼자 선 기분이다. 발이 푹푹 빠지며 조금씩 오른다. 일부는 아예 양말까지 벗고 걷는다. 혹시 전갈이라도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발을 그대로 신고 간다. 산을 오르는 것과는 완전 색다르다.

황량한 거친 사막에 자라는 나무가 있다. 잎은 없고 줄기와 가지만 앙상하다. 이름 모르는 나무지만 대단한 생명력이다. 모래 산이 저만치 앞에 있다. 그곳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온다. 모래 산 능선 너머엔 뭐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살짝 든다. 앞장서서 간다. 언덕 위에 다다르자 마찬가지 광활한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산과 똑 같은 느낌이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듯 모래 능선 하나를 넘어서니 또 다른 모래사막이 기다리고 있다.

일부는 모래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사람들은 색다른 트레킹에 지친 줄도 모르고 따라간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대부분 60대 이상이지만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듯하다.

마침 해가 서쪽으로 넘어간다. 원래 빨간 사막을 더 뻘겋게 물들인다. 온 세상이 뻘겋게 변한다. 2시간가량 모래사막에서 트레킹과 일몰을 즐기다 카라반사라이로 돌아왔다.

사막 한가운데의 밤은 더욱 춥다. 해가 떨어지자 기온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두꺼운 옷을 있는 대로 꺼내 입었다. 밤이 될수록 더 춥다. 카라반사라이 최고의 시설이라고 해도 절대 방심하지 말라. 최고 시설이라고 해도 전기불과 화장실 정도만 갖춰져 있다. 절대 난방이나 보온시설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카라반사라이 자체가 난방이 안 된다. 우리의 토담집을 성으로 둘러쳐서 만든 집으로 생각하면 된다. 담요도 1인당 2개. 물론 돈을 주면 더 주겠지만. 오리털 재킷을 포함해서 윗옷만 5개 껴입고 잤다.

아침에 몸이 찌뿌듯하다. 그래도 사막의 일출이 궁금하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일찍 깼다. 카라반사라이 옥상에 올라가 사막의 장엄한 일출을 본다. 별로 색다를 것 없는 일출이었지만 사막의 일출을 봤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전날 사막트레킹에 이어 솔트레이크트레킹으로 하루를 보낸다. 우리말로 소금호수트레킹이다. 색다른 체험의 연속이다. 사막트레킹을 하는 동안 사막 저 멀리 흰 게 보였다. 뭔가 궁금했다. 그게 바로 소금이라고 한다. 소금이 사막에 널려 있다. 소금을 그냥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소금은 이란의 주요 특산물 중의 하나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소금호수 한가운데 희미한 산이 보인다. 가이드는 “원더링 아일랜드(Wondering Island)”라며 “우리말로는 신기루”라고 말한다. 날씨가 흐리면 안 보이고, 좋을 때는 나타난다고 해서 이름 붙였다고 설명한다. 

소금호수에서는 고도가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GPS를 봤다. 750m가 나온다. 이란에서 가장 낮은 장소이지 싶다. 그래서 그런지 훨씬 안정감이 있고 공기감촉도 좋다. 실제로 사람 살기 가장 좋은 고도가 700~800m다. 저기압과 고기압이 만나 기압이 가장 안정적이어서 사람이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위치다. 더욱이 소금바람은 마치 바닷가에 와 있는 느낌을 줘 마음을 확 트이게 한다.

소금에 있는 염화나트륨을 호흡하면 콩팥기능을 회복시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고 말한다. 일부는 “용존산소량도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다”고 주장한다. 보통 도시에서 대기 중 산소량은 21% 정도지만 숲 속에서는 24~25% 나온다. 실제 소금호수에서 대기 중 산소량이 더 높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느낌을 주는 건 분명하다. 또 불과 몇 시간 있지 않았지만 콧속이 시원해진다. 도시에서는 코가 좋지 않아 자주 아프곤 했는데, 콧속의 상태가 한결 좋아진 것 같다.

소금호수는 고도감에서 주는 심리적 안정감과 바닷가에 와 있는 듯한 정서적 안정감, 염화나트륨이 주는 신체적 안정감까지 포함해서 여러 모로 걸어볼 만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좋다며 조금 더 걷자고 했지만 일정상 소금호수를 뒤로하며 발길을 돌렸다.  

세계 첫 종교 ‘조로아스터교’
3,753년 전 개교… 페르시아제국 때 국교로 번성하기도

조로아스터교는 세계 최초 종교로 알려져 있다. 교주 조로아스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전해지는 바가 없다. 알려진 바로는 테헤란 북쪽 우루미예 출신이라는 주장과 이란 동부 박트리아(현재 아프가니스탄 지역)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의 출생도, 활동시기도 불확실하다. 이란 관련 책에서도 설이 분분하다. 어떤 책에서는 BC 1,000~500년 전에 태어나 활동했다고 하는 반면, 다른 책에서는 BC 7,000년 전이라는 주장도 한다. 이란에서 만난 조로아스터교 모베드(Moubed・목사나 신부, 승려와 같은 성직자)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753년 전이라고 전한다.

그의 출생과 활동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불교 등 세계 주요 종교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은 시작과 끝이 없고 무한대로 순환한다’고 여긴다. 니체가 언급한 영겁회귀와 순환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는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결혼식 때 주고받는 반지에 나타난다. 반지는 링으로, ‘영원히 사랑으로 순환하면서 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 문양도 자연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요소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를 신성시하고 잘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2,500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 이란의 전통마을 아비아네(Abyaneh)에는 십자가 문양이 문과 벽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어떤 종교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테헤란 조로아스터교 신전에서 모베드와 일문일답한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간호사로 이란에 취업하러 와서 이란 남자와 결혼한 뒤 40여 년간 이란에 살고 있는 경북 고령 출신의 한국인 가이드 이성주씨의 통역으로 진행했다.

Q 조로아스터교 교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연혁을 파악하나?

“조로아스터가 살았던 시기를 BC 8,000~6,000년 혹은 BC 600년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그의 탄생은 BC 1768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하다. 이는 페르시아에 서사시가 많이 있는데, 거기서 유추해 보면 이 시기가 나온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는 천문이 매우 발달해 있다. 천문에 대한 지식으로도 이 시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란 국내외 자료들을 비교 연구했을 때도 이 시기가 타당하다.”

Q 조로아스터교의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며, 그중에서 지수화풍이 왜,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는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쪽이 바르다는 것도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다. 조로아스터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이란인들은 ‘물・불・땅・바람’을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신성시했다. 이 네 요소를 더럽히지 않고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4요소 중에서도 특히 불을 더 중시했다. 불은 모든 불결한, 정(淨)하지 않은 것들을 깨끗이 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오염되지도 않는다. 이리저리 삐뚤어지지도 않고 똑바로 위를 향해 타오른다. 인간에게 따뜻함과 깨끗함을 주고 어둠을 밝히고, 음식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이로움이 매우 많다. 그래서 불을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지금 야즈드(Yazd)의 불사원(Fire Temple)에 모셔진 불은 1,500년 이상 됐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기도할 때 한 곳을 바라본다. 야외에서는 아침에 동쪽, 오후에 서쪽을 향한다. 빛이 있는 태양과 같은 방향이다. 실내에서는 빛이 있는 방향을 향한다. 예전에는 집에 불을 모신 곳이 기도하는 방향이었다. 이슬람 도래 이후엔 불을 쉽게 모실 수 없어 각 직종별로 모시던 불 16가지를 한데 모아 지금의 성지 야즈드에 모시게 됐다. 테헤란 불사원에 있는 불은 야즈드에서 갖고 왔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됐다. 불은 상징이지 불 자체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아니다. 나치의 심볼, 불교의 만(卍)자, 십자 모양 등이 4요소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조로아스터교를 한자어로 ‘배화교(拜火敎)’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때 우리 교과서에도 배화교로 소개됐다.

Q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을 이원론으로 나눈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하느님을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h)’라 부른다. 아후라는 ‘생명을 주다’, 마즈다는 ‘학식, 지식’이란 뜻이다. 그래서 아후라 마즈다는 ‘큰 지식의 창조자’란 의미다. 선하고 참되며 공평하고 지혜로운 아후라 마즈다는 세상을 질서정연하게 창조했다. 아후라 마즈다가 계획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에게 바른 사람으로 살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조로아스터교의 역할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주의 질서를 지키는 역할로, 두 가지의 보석 같은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준다. 바로 선(善)과 악(惡)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나 우주에도 서로 끌거나 미는 힘, 또는 반대의 힘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 두 반대의 힘은 창조주의 질서에 꼭 필요한 것이다. 아후라 마즈다의 창조에 나쁘거나 못나거나 악한 것이라고는 없다. 다만 사람 생각의 선택에 따라 선과 악이 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로 사는 일에 노력한다. 무지한 사람은 바르지 못한 나쁜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한다. 자연을 신성시하므로, 거스르지 않는 그대로의 자연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도 선한 일에 속한다.”

Q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이슬람 도래 이후 많은 불 신전들이 파괴됐고, 신도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이스파한이 수도였던 사파비왕조 때만 해도 400만 명이 됐다. 당시 이란 총인구를 1,0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요즘은 이란에 15만 명, 인도에 20만 명, 전 세계 합쳐 약 40만 명으로 추정한다(책에는 전 세계적으로 15만 명 정도 되며, 테헤란에 1만 명, 야즈드에 4,000명 등 이란에 2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 신전은 영국에 하나, 미국에 6개, 캐나다에 2개 있다. 이슬람 도래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인도로 넘어갔다. 그들을 인도의 페르시안이라 부른다. 인도의 상류층에 속하며, 이란 국내에 있는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Q 이슬람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유지하는 힘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지배적인 힘 아래에서 개종하지 않는 게 쉽지 않다. 지금까지 유지하는 힘은 각 개인 가정에서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잘 지킨 덕분이다. 7세까지는 주로 어머니 중심으로, 그후는 아버지 중심으로 자녀교육을 한다.”

이란 탐방 가이드

이란은 국교를 한국과 일찌감치 맺었다. 수교 기념으로 강남에 테헤란로를, 테헤란에 서울로를 서로 만들었다. 최근엔 한류 열풍으로 서울공원까지 건립했다. 현지 가이드는 “몇 년 전 대장금을 방영할 때 길거리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류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제재로 운항하던 직항을 없앴다. 지금은 두바이를 거쳐 테헤란으로 가야 한다. 비행시간이 최소 5시간 이상 소요된다.

이란에서는 즐길거리가 많다. 테헤란은 6개월이 겨울이다. 테헤란 바로 뒷산이 이란 최고봉 다마반드산. 여기서 스키와 트레킹을 즐긴다. 카샨에서는 사막트레킹과 소금호수트레킹까지 체험할 수 있다. 동시에 대상들이 다니고 묵었던 캐러반사라이 체험도 가능하다. 론리플래닛에서 나온 <이란> 안내서에는 테헤란~카샨~나탄즈~이스파한~야즈드~파사르가대~페르세폴리스~시라즈까지 고대 도시들을 두루 즐기는 일정을 2주로 잡았다. 사막트레킹과 소금호수트레킹도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 코스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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