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책 첫걸음은 정부가 국민들에게 믿음 주는 것"

2015. 12. 31. 18: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제 대가에게 듣는 2016 한국경제] ①조순
“천하의 일은 잘되지 않으면 잘못되고, 나라의 대세는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고 했습니다.” 새해 경제 전망을 부탁하자 구순을 바라보는 경제학자 조순(87)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뜸 조선의 석학 이율곡의 명언을 읊었다. 나이 서른에 당대 왕인 명종(재위 1545∼1567)에게 올렸다는 직언으로, 천하는 잘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것이지 중간은 없다는 의미다. 조 교수는 “꼭 비관할 것만은 아니지만 큰 흐름으로 봐서는 2015년보다 더 쉬워지리라 전망할 수 없다”면서 “거의 비슷한 상태로 갈 텐데 그러면 결국 더 나빠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전망에 국한한 메시지가 아니다. 조 교수가 440여년 전 석학이자 정치가의 명언을 인용한 것은 보다 넓고 깊은 함의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인 듯했다. 이율곡의 명언의 핵심은 “잘되고 잘못되고,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실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율곡 선생의 말씀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들어맞는 진리”라며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겨냥해 “진정성과 성의를 갖고 대책을 마련하고 국민들이 믿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 이게 경제 대책의 첫걸음”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지도자들이 참 진지하게 생각하고 애쓰고 있구나’라고 국민들이 느끼기만 해도 그게 좋아지는 시초”라는 것이다.

문맥에서 읽히는 조 교수의 걱정은 발언 이상이었다. “더 쉬워지리라 전망할 수 없다”는 건 완곡한 표현이었다.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지목된 지 오래인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늦었다”고 했고, 2017년 부동산·가계부채발 위기설에 대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한 것이냐”는 물음에도 “극복하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정부가 위기의 본질, 원인도 파악하지 못한 채 돈 풀어 부동산 경기를 띄우는 옛날식 대책만 써왔다”는 게 그의 평가다. 조 교수와의 세밑 인터뷰는 서울 행운동 조 교수 자택에서 한 시간 반가량 진행됐다.

경제석학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 서울 행운동 자택에서 진행된 세계일보와의 세밑 인터뷰에서 새해 한국경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 교수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 이게 경제 대책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재문 기자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을 평가한다면.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이후 뉴노멀(새로운 정상)시대가 됐는데 노멀한(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혼란 자체가 노멀이 됐다. 나라마다 각자 갈 길 가는 시대, 이게 뉴노멀이다. 한국도 뉴노멀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명박·박근혜정부 모두 아직도 한국이 처한 불황의 성격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게 제일 큰 문제다. 대책이란 게 옛날식 그대로다. 금리 내리고 가계빚으로 부동산 경기 활성화하고 추경(추가경정예산)하고, 이런 거 다 해묵은 옛날 정책이다. 뉴노멀에는 하나도 통하는 거 없다.”

-지금 한국이 처한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수입해서 불황 요인을 들여오는 수입불황, 둘째는 국내에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국산 불황이다. 수입 불황 요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외국 총수요가 줄어서 수출이 줄어드는데 어쩌겠나. 그런데 국내에서 만들어진 불황 요인, 이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냈으니 스스로 대책을 마련해야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국산 불황 요인은 경제만이 아니다. 총체적인 것이다. 나라는 하나의 유기체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모두 연결돼 있는 거지. 우리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기적에 취한 나머지 수출만 잘되고 성장률만 높으면 모든 다른 문제가 해결된다고 속단하고 낙관했다. 그렇게 굴러가면서 정치, 교육, 사회가 모두 나빠졌고 그 부메랑으로 경제도 악영향을 받게 됐다. 지금부터 교육, 정치 시스템을 바꾸고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왜 신뢰 잃었나.

“정부가 남 탓하지 말고 책임지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 ‘벅스 스톱스 히어’(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여기에서 멈춘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이런 문구를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걱정 말고 추진하라는 거다. 그런 책임감 있는 리더십이 제일 중요한데 보이지 않는다.”

-뉴노멀 시대에 경제 인식도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출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말해 왔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너무 경도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무슨 자유무역협정(FTA)만 체결하면 경제가 사는 것처럼 호들갑 떠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 경제는 우리 내부에서 잘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로 좋은 제품 만들어내면 FTA 없어도 얼마든지 수출할 수 있다. 우리는 A 아니면 B,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잘못됐다. FTA는 무조건 좋다, 경제영토 넓어진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럼 경제영토를 무조건 잃는 나라도 있나.”

-2017년 이후 가계부채와 부동산발 경제위기설이 나오고 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가계부채는 너무 늦었다. 정부가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 가계부채 문제는 한 지역에서 부실화하면서 차압이 일어난다든지 하면 난리가 시작되는 거다. 도미노 효과로 다른 지역으로 전파할 것이 분명하다.”

-가계빚 늘려 경기를 부양한 게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인가.

“그렇다. (정부는 내수 부양을 성과로 내세우고 있는데) 정부가 스스로 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자위하는 것도 심리적으로는 필요하겠지. 자기가 자기를 위로해 주지 않으면 누가 위로해 주겠나. 그러나 그 정책의 효과를 보면 낙관할 수가 없는 거다.”

-우리는 결국 2008년 이후 금융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것인가.

“극복하지 못했다. 원인을 모르고 있다. 원인을 모르니 대책이 부실할 수밖에 없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거기에 비전과 전략, 신념이 생긴다면 국민을 계속해서 설득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했다. 경제학이라는 게 지금 그래야 한다. 경제학도 결국 끝에 남는 건 철학의 문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지난 대선의 시대정신이었는데 여전히 유효한가.

“여전히 유효하고 해야만 한다. 경제민주화는 낭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다. 복지도 반드시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노인과 가난한 이들에게 돈 주는 것만이 복지가 아니다. 가령 중소기업을 제대로 육성해서 고용이 늘면 이게 복지다. 양질의 고용이 늘면 소득도 평준화한다. 그러니 복지다. 국민생활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만들 것인가 고민하면 좋은 정책이 나올 수 있다. 대통령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대화도 해보고 그러는 게 경제정책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안 하니까 못하는 거다. 나도 정계 입문해서 대중연설을 어찌 하나 걱정했는데 해보니 되더라. 국민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2017년 대선의 어젠다는 뭐가 될까.

“국민단결의 공고화,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하고 이걸 중시해야 한다. 그게 취약하니 다른 게 다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찾지 못하고 있다. 사분오열돼 있다. 한국인은 뭐냐, 이게 불분명하다.”

-한국경제는 위기를 피할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충격이라도 줄여야 할 텐데.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게 참 어려운 문제란 말이야. 일본 사람들 격언에 급하거든 돌아가라, 이런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런 문제를 장기 안목을 갖고 해법을 찾고 실천해야 하는데,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 내 답변조차도 뾰족한 해법이 아니다.”

◆ 조순 명예교수는…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초대 민선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의 이력은 화려하다. 정·관·학계를 아우르는 광폭 스펙이다. 어떤 호칭을 원하는지 궁금했다. “교수라고 해주세요. 원래 교수였으니.” 그가 “원래 교수”라고 강조하듯 그의 큰 족적은 한국 경제학계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경제학자로서 충고를 잊지 않았다. “작금 경제학이 자꾸만 미시적으로 가고 있어 천하 대세를 잘 보지 못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인터뷰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조 교수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금융위기가 왔을 때 유명 경제학자들에게 ‘당신들은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왜 몰랐느냐’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큰 흐름을 읽는 경제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쇠퇴하는 인문학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인문학이 죽으면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도 결국 철학 문제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