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시안.. 주원장이 세운 종루와 고루, 시안의 랜드마크가 되다

2015. 12. 2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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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시기에 종루는 참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민국 말 국민정부의 비밀감옥이기도 했고, 시안 최초의 영화관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천문관이 되기도 했고, 찻집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아침 9시, 시안 성벽의 중심부 사거리 어딘가를 거닐고 있노라면 종루(鐘樓)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어느덧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면 들려오는 북소리, 종루에서 서북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의 고루(鼓樓)에서 울리는 소리다. 시안의 종루와 고루에서는 2007년부터 이처럼 ‘아침 종과 저녁 북(晨鐘暮鼓)’ 울리기가 행해지고 있다. 100여 년 전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전통의 부활이라 하겠다.

명나라 주원장 홍무(洪武) 17년(1384), 종루가 세워지던 당시에 그 위치는 장안성 중심에 있었다. 그 후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쪽과 북쪽 방향으로 성이 확장되면서 종루의 위치도 점점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신종 만력(萬曆) 10년(1582)에 종루를 이전하게 되는데, 그 자리가 바로 지금 종루가 위치한 곳이다.

종루는 말 그대로 종이 있는 누각이다. 지금의 시안 종루에 있는 종은 당나라 때 경운종(景雲鐘)의 복제품(1997)이다. 예종 경운 2년(711)에 주조된 경운종은 본래 황실의 도관(道觀)인 경룡관(景龍觀)에서 사용되었다. 이후 명나라 때 종루가 세워지면서 경운종도 종루로 옮겨져 사용되었다. 1953년부터는 시안 비림박물관에서 경운종을 소장하고 있다. 중앙인민방송국에서 ‘새해의 종소리’로 내보내는 종소리의 출처가 바로 경운종이다. 경운종은 출국금지문물에 속하는 국보급 문물이니, 비림박물관에 가게 되면 그 종을 자세히 보시길.

시안의 랜드마크 종루

종소리로 하루를 열고, 북소리로 마감

모든 도시는 자신의 상징물을 지닌다. 베이징에 톈안먼(天安門)이 있다면 시안에는 종루가 있다고 할 정도로, 종루는 시안의 상징이다. 36m 높이의 종루는 시안이 두루 내려다보이는 감제고지이기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신해혁명 당시 청나라 팔기군(八旗軍)이 신군(新軍)과 격전을 펼치며 끝까지 사수하려 했던 곳도 종루다. 이후 황제를 자칭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몰아내려던 호국전쟁에서,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군대가 위안스카이 측의 군대에 포위된 채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였던 곳도 종루다. 근현대시기에 종루는 참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민국 말 국민정부의 비밀감옥이기도 했고, 시안 최초의 영화관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천문관이 되기도 했고, 찻집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때 표어로 뒤덮였던 곳,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더불어 사인방을 성토하는 대자보가 붙었던 곳도 바로 종루 옆 성벽이었다.

종루와 더불어 시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고루는 종루보다 4년 먼저(1380) 만들어졌다. 종루와 고루를 합쳐서 자매루·문무루(文武樓)라고 부를 정도로 둘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그 옛날 종소리에 하루를 열고 북소리에 하루를 마감하던 이들에게 종루와 고루는 그들 삶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저녁을 알려주던 고루의 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고루에 있는 커다란 북은 1996년에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고루에는 24절기고(節氣鼓)라는 24개의 북이 또 있는데, 각 북면마다 예스러운 한자가 두 글자씩 적혀 있다. 바로 입춘(立春)·우수(雨水) 등 24절기의 명칭이다.

고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고루의 남쪽과 북쪽에 걸린 편액이다. 남쪽 편액의 ‘문무성지(文武盛地)’라는 글귀는 ‘천년고도(千年古都)’만큼이나 시안을 잘 대변한다. 문과 무가 더불어 성했던 천년고도 시안, 그 명성은 예로부터 익히 알려진 바다. 북쪽 편액의 ‘성문우천(聲聞于天)’이라는 글귀는 그런 시안에 대한 칭송일 것이다. 이 글귀의 출처는 <시경> ‘학명(鶴鳴)’이다. “학은 깊숙한 못가에서 울어도 그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린다(鶴鳴九皐, 聲聞于天).” 진리나 뛰어난 인재는 어떻게든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당나라 때의 경운종. 비림박물관 소장
‘문무성지’ 편액은 섬서순무도어사 조가회(趙可懷)가 명 만력 18년(1580)에 쓴 것이고, ‘성문우천’ 편액은 청나라 건륭제의 어필이었다. 지금 고루의 두 편액은 명·청 시기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된 문화대혁명 때 고루의 편액 역시 훼손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고루의 두 편액은 2005년부터 걸린 것인데, 원래의 글자체와 크기대로 전통적인 제작방법에 따라 만든다는 원칙 아래 그 옛날의 형태를 최대한 재현한 것이다. 이렇게 전통은 창조되고 파괴되고 재창조된다. 그 창조와 파괴와 재창조에는 각 시대의 사연이 담겨 있을 터. 어디서 무엇을 보든 그 사연에 최대한 귀기울여보자.

시안의 랜드마크인 종루와 고루뿐 아니라 시안 성벽 역시 주원장 때 만들어진 것이다. 시안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이도 주원장이다. 홍무 2년(1369)에 봉원로(奉元路, 원나라 때 시안의 명칭)를 함락한 뒤 봉원로를 서안부(西安府)로 개칭한 것이다. 서북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서안(西安)’이라는 명칭은 명나라 때 이곳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뒤 자신의 여러 아들을 번왕(藩王)에 봉하여 각지를 지키도록 했다. 이때 주원장은 둘째아들 주상을 시안의 왕인 진왕(秦王)에 봉해 서북 지역을 지키게 했다. 현재 산시(陝西)성 인민정부 소재지인 시안 신성(新城)은 본래 진왕부(秦王府)가 있던 곳이다.

산시성 인민정부 소재지가 된 진왕부

진왕부 역시 명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명칭도 여러 번 바뀌었다. 명나라 말 이자성(李自成)이 시안을 함락하고 대순(大順) 정권을 세운 뒤 진왕부는 대순 정권의 왕궁이 되었다. 청나라 때는 팔기(八旗)에 소속된 기인(旗人)의 거주지역인 만성(滿城)이 시안에 설치되면서 진왕부는 팔기군의 훈련 장소인 ‘팔기 교장(敎場)’이 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팔기 교장은 불에 타고 만성도 철거되었다.

진왕부의 옛터는 민국시기에 산시성 정부 소재지가 되는데, 1927년 1월에 ‘홍성(紅城)’이라고 명명되었다가 같은 해 6월에 다시 ‘신성(新城)’으로 개칭된다. 홍성에 혁명의 의미가 담긴 것은 물론 신성에도 혁명의 의미가 담겨 있다. “재신민(在新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고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 있다.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진실로 하루가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로워야 하고 또 날로 새로워야 한다. 바로 <대학>에 나오는 이 구절에 담긴 ‘신(新)’의 의미를 신성이라는 명칭에 담고 싶었던 것이다. ‘산시신성기(陝西新城記)’(1927) 비문에 의하면, 홍성을 신성이라고 바꾸면서 신성에 있는 네 개의 문도 새롭게 명명하고자 했다고 한다. 서문은 전진(前進), 동문은 분투(奮鬪), 남문은 노력(努力), 북문은 자신(自新)으로. 신성이라고 개칭하던 당시 신성의 동쪽·서쪽·남쪽 방향의 큰길 이름 역시 동신가(東新街)·서신가·남신가로 명명했는데, 이 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진왕부를 신성이라고 명명한 1927의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군벌이 할거했고 봉건질서도 여전했다. 당시 중국의 생존은 완전히 새로워지는 데 달려 있었다. 스스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전진·분투·노력해야 했다.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命名)에는 명명자의 의지와 소망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시안의 지명을 알아보는 것은 시안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신성·동신가·서신가·남신가처럼 말이다. 다음에서 시안의 지명과 그 역사를 조금 더 소개하기로 한다.

지명은 종종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때문에 권력의 향배에 따라 명칭이 바뀌기도 한다. 청년로(靑年路)를 예로 들어보자. 청년로의 서쪽에 해당하는 구부가(九府街)는 명나라 진왕 주상의 아홉째 아들의 저택이 있던 곳이고, 청년로의 동쪽에 해당하는 양부가(梁府街)는 청나라 무진사(武進士, 무과의 전시(殿試)에 합격한 사람) 양화봉(梁化鳳)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구부가는 아홉째아들의 저택이 있는 거리, 양부가는 양씨 저택이 있는 거리라는 의미다. 왕의 아들, 과거 합격자이기에 거리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봉건시대의 자취가 짙은 이들 명칭은 1947년에 바뀌는데, 삼민주의청년단 산시 지부가 양부가에 설립되면서 구부가·양부가 일대를 통합해 청년로라고 통칭하게 된 것이다.

시안의 지명 중에는 1966년에 개칭되었다가 1972년에 원래 이름을 회복한 경우가 꽤 많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극단적인 전통 부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거원항(東擧院巷)과 서거원항(西擧院巷)은 분발항(奮發巷)·도강항(圖强巷)으로 개칭되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거원(擧院)’은 과거 시험장이었던 공원(貢院)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험장이었던 만큼 경계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 공원의 사방 담장 위에는 대추나무 가시를 꽂아 두었다. 공원 근처에 있는 ‘조자항(早慈巷)’은 여기서 유래한 명칭이다. 원래는 조자항(棗刺巷), 말 그대로 ‘대추나무 가시 거리’였는데 1917년에 발음이 같은 조자항(早慈巷)으로 순화한 것이다. 1966년에 부강항(富强巷)으로 개칭되었다가 1972년에 다시 조자항(早慈巷)으로 돌아왔다. 명나라 때 죽기가 대규모로 거래되던 죽파시는 혁명가(革命街)로 개칭되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지금도 이곳에서는 죽기와 목기 제품을 취급하고 있다. 오미십자(五味什字, 십자(什字)는 십자로(十字路)를 의미한다)는 명·청시대부터 민국 초에 이르기까지 약방이 밀접해 있던 곳이다. 중국 약재의 단 맛, 매운 맛, 신 맛, 쓴 맛, 짠 맛, 이 다섯 가지 맛의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1966년에 오성가(五星街) 중단(中段)으로 개칭되었다가 1972년에 원래 이름을 회복했다.

시안 고루

역사를 담고 있는 시안의 지명들

물론 옛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채 그대로 사용되어 온 지명도 많다. ‘하마릉가(下馬陵街)’는 하마릉이 있는 거리라는 의미인데, 하마릉은 동중서(董仲舒)의 무덤을 가리킨다. 동중서는 한 무제 때 유가의 국교화를 추진했던 유학자다. 무제는 동중서의 무덤을 지날 때면 말에서 내려 걸어감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으며, 이곳을 지날 때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빙교항’은 얼음 저장고가 있는 골목이라는 의미인데, 이곳은 명·청시대 왕족과 관리가 여름철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거리,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지명이 생겨나기도 한다. 통제방(通濟坊)은 1936년에 통제신탁공사가 이 일대의 땅을 대량으로 구입해 길을 내고 여러 건물을 세우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통제방에 세워졌던 건물 가운데 4층 높이의 ‘통제대루(通濟大樓)’는 당시 시안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자 시안 최초의 서양식 시멘트 건축물이었다. 안타깝게도 통제대루는 보호 문물로 지정되지 못해 1990년대 초에 철거되고 말았지만 통제방이라는 지명은 여전히 남아서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시안에 종루와 고루를 세우도록 한 주원장, 사실 그는 시안으로 천도할 마음이 있었다. 만약 시안이 명나라의 수도가 되었다면? 이후 중국의 역사는 송두리째 달라졌을 것이다. 시안의 문화지형이나 지명 역시 지금과는 무척 달라졌을 것임은 물론이다.

주원장이 시안 천도를 본격적으로 검토했던 것은 홍무 24년(1391)이다. 감찰어사 호자기(胡子祺)가 관중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지세를 갖추고 있다는 상서를 올리자 주원장은 태자 주표(朱標)를 보내 관중을 살피게 한다. 주표는 난징으로 돌아와서 주원장에게 섬서 지도를 바치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듬해 주표가 병사하고 만다. 일흔 가까운 나이의 주원장은 태자의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았고, 천도라는 큰일을 진행할 힘도 마음도 사라졌다. 당시 주원장은 “본래 천도하고자 했으나 이제는 연로하고 피곤하며 천하가 안정되었는데 다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해서 시안이 명나라의 수도가 될 뻔했던 기회가 지나갔다.

주표가 병사하지 않았다면 난징에서 시안으로 천도했을 것이고, 주표는 주원장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을 것이고, 주표의 아들 주윤문(건문제)은 기반을 더 다진 뒤에 제위를 이어받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주체(영락제)가 제위를 뺏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그랬다면 명나라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문 가정일 뿐이다. 아무튼 주표는 병사했고, 결국 주체는 조카의 자리를 빼앗아 황제가 되었고 그는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역사의 연쇄반응. 모든 순간과 사건은 막중한 무게를 지닌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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