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이 칠천량해전 대승 뒤 전라도 길목에 축성

2015. 11. 1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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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11) 마산·고성·남해 왜성

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 춘원마을에 가면 나즈막한 언덕 아래 소나무숲에서 오래된 무덤 하나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옛 해안선까지는 900m가량 떨어져 있다. 비석이 없어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무덤’이라고 부르며, 임진왜란 때 전사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무덤이라 믿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실록’을 보면,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패한 칠천량해전에 참가한 선전관 김식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지역 추원포로 후퇴했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순천부사 우치적과 간신히 탈출해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군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칠천량해전 결과와 원균의 최후를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정해룡 <고성군지> 상근집필위원은 “춘원마을의 조선시대 이름은 춘원포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이를 ‘추원포’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춘원마을은 조선시대 때 고성현에 속했다가, 1900년 고성에서 분리됐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통영군이 생길 때 통영에 편입됐다”고 말했다. 춘원마을 이장은 “원균 장군 무덤이 우리 마을에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정확히 어딘지는 모른다. 가끔씩 사람들이 찾아와 여기저기 풀숲을 뒤지면서 조금 불룩하게 솟아오른 것만 봐도 ‘여기가 원균 장군 무덤이 아니겠느냐’고들 한다”고 말했다.

‘원균 장군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원균 장군 무덤은 그의 고향인 경기도 평택에 있는데, 이 무덤은 가묘이다. 춘원마을에 원균 장군의 진짜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원균 장군의 진짜 무덤을 찾는 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왜군이 조선 조정에 거짓 정보 흘려
이순신은 유인책 간파해 출동 거부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돼 전투 나섰다
칠천도서 조선 수군 9000여명 궤멸

마산왜성을 ‘왜구 방어용’으로 소개
구청, 본사 취재뒤 누리집 정보 수정
고성·남해왜성 성벽과 터 훼손 심각
개인주택 담장·밭 등으로 이용되기도

이순신에 이어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그해 7월 중순 조선 수군 전병력을 이끌고 왜군 본거지인 부산을 치러 출전했다. 하지만 왜군의 기습에 휘말려 거제도 북서쪽 칠천량까지 후퇴했다가 사실상 궤멸되는 수준의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칠천량해전 패전으로 원균 등 9000여명의 조선 수군이 전사했고, 1592년 7월 한산대첩 이후 조선 수군이 쥐고 있던 남해안 제해권은 5년만에 왜군 수군에게로 넘어갔다.

남해안 제해권을 확보한 왜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로 밀고 들어가며,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면서 동시에 본거지인 부산과의 연결망을 확보하기 위해 마산·고성·남해·진주·사천·순천 등에 잇따라 성을 쌓았다. 막강한 조선 수군 때문에 발을 딛지 못했던 전라도에 들어갈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조선 수군, 남해안 제해권을 빼앗기다 “전라도를 철저히 섬멸하고, 충청·경기도와 이외 지역은 가능하면 공격하라. 작전이 완료되면 점령지에 성을 쌓고 성주를 정하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7년 조선을 다시 침략하며 장수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전라도를 주요 공격목표로 삼은 이유는 1592년 침략 당시 전라도 공략에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조선을 정복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군은 전라도를 섬멸하기 위해서는 조선 수군이 틀어쥐고 있는 남해안 제해권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왜군이 사용한 전술은 이순신에 대한 선조와 조선 조정의 불신을 부추기는 ‘이간질’이었다. 1597년 1월11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협상차 가있던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통역관 요시라(要時羅)를 보내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7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일에 이미 대마도에 도착하였는데 순풍이 불면 곧 바다를 건넌다고 한다”라고 정보를 흘렸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수정실록’은 요시라가 이보다 더 상세하게 “모월 모일에 가등청정이 어느 섬에서 잘 것이니, 귀국에서 만약 수군을 시켜 몰래 잠복해 있다가 엄습하면 결박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알려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정적 관계라는 것은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즉각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왜군의 유인책이라는 것을 간파한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라며 출동하지 않았다.

1월23일 선조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부산 다대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선조는 명령에 따르지 않은 이순신에게 격노했고, 조선 조정은 1월23일, 27일, 28일 잇따라 어전회의를 열어, 28일 원균을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했다.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은 국가의 중임을 맡고도 오히려 조정을 속이고 적을 토벌하지 않아 가등(가토 기요마사)으로 하여금 편안히 바다를 건너게 하여 마침내 용서받지 못하고 잡혀와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적과 대진하고 있는 때이므로 공을 세워 죄를 갚도록 하라. 평소에 경(원균)의 충용을 알고 있는 바, 이번에 경을 경상우도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삼으니 경은 더욱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힘쓰고, 이순신과 협심하여 전날의 감정을 풀고 왜적을 섬멸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을 벌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선조는 2월6일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은 2월26일 한산도에서 체포돼, 3월4일 한양에서 하옥됐다. 원균은 이순신의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이순신은 4월1일 풀려나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수군 7200명 등 12만1100명의 군사를 조선에 출병시켰다. 당시 울산 서생포왜성, 부산 증산왜성·죽도왜성·가덕왜성, 진해 안골왜성 등 남해안 5개 왜성에 주둔해 있던 병력 2만여명까지 합하면 왜군의 규모는 14만1500명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봉장이고 가토 기요마사는 2군 사령관이었으나, 정유재란 때는 바뀌어 가토 기요마사가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2군 사령관을 맡았다.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는 1597년 1월14일 전함 130척에 1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 다대포에 상륙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2군이 상륙해 진해 웅천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병력은 7월 초 조선으로 건너왔다. 7월에 이르러 부산에 정박한 왜군 전함은 600여척에 이르렀다.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도 이순신에게 했던 것처럼 왜군의 부산 본진을 공격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원균은 진해 안골포, 부산 가덕도 등에 주둔한 왜군을 먼저 섬멸해 후방을 든든하게 한 뒤에 부산을 공격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육군과 수군이 합동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원균은 3월29일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가덕도·안골포·죽도·부산을 드나드는 적들의 거리가 서로 가까워 성세는 서로 기대고 있는 것 같으나, 그 수가 수만에 불과하니 병력도 외로운 듯하고 형세도 약합니다. 그중 안골포·가덕도 두 곳의 적은 3000∼4000명도 되지 않으니 형세가 매우 고단합니다.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 등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어리석은 신하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을 추리더라도 30여만명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물며 가을이 다 지나고 난 뒤에는 바람이 점점 세지고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질 것이니 배를 부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때는 수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이른바 4∼5월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 입니다. 또한 행장(고니시 유키나가)·요시라 등은 거짓으로 통화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 있겠습니다. 조정에서 속히 선처하소서”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원균의 수륙 합동작전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수군만으로 먼저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수군 단독작전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원균을 도원수 권율은 7월11일 곤장까지 때리며 출전하라고 다그쳤다. 원균은 “이미 장마가 시작되어 출항이 용이하지 않으니, 장마가 그치면 출전하겠다”고 했으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원균은 7월12일 또는 13일 휘하의 모든 수군을 이끌고 삼도수군통제영인 한산도를 출발해 7월14일 부산 영도 인근에 도착했다. 이미 조선 수군의 동향을 꿰뚫고 있던 왜군은 맞대응을 피하며 회피 전술을 펼쳐 조선 수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때마침 거센 풍랑까지 일었다. 조선 수군은 해질 무렵 가덕도 앞바다로 물러나 땔나무와 물을 구하러 섬에 상륙했다가 매복해 있던 왜군 육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급히 거제도로 후퇴해 거제도 북쪽 영등포에 상륙하려 했으나, 이곳에서도 왜군 육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육군과 수군이 합동해 중요지점마다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 수군은 부산에서 거제도까지 후퇴하는 과정에 400여명의 병력을 잃었다.

다음날은 비가 내리면서 기상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조선 수군은 15일 오후 거제도 북서쪽 칠천량으로 이동했다. 칠천량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좁은 바다로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지휘하는 왜군 수군은 이날 밤부터 조선 수군을 포위하기 시작해 16일 새벽 총공격을 펼쳤다.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왜군 장수들은 경쟁하듯 전장을 누비며 조선 수군의 함선을 파괴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시마즈 타다츠네(島津忠恒) 부자는 병사 3000명을 칠천도 해안에 미리 배치해 조선 수군의 상륙을 막았다.

결국 조선 수군은 칠천도 앞바다에서 160여척의 전함을 잃으면서 사실상 궤멸했다. 일부 조선 수군은 동쪽 진해만과 남쪽 한산도 등 두 방향으로 달아났다. 이 가운데 진해만 쪽으로 달아난 조선 수군은 뒤쫓아온 왜군 수군에게 섬멸됐다. 원균도 왜군에게 쫓기다 고성 춘원포에 상륙해서 전사했다. 한산도 쪽으로 달아난 경상우수사 배설은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을 불사르고, 전함 12척을 수습해 전라도로 대피했다.

칠천량해전을 계기로 남해안 제해권은 조선 수군에서 왜군 수군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한산도가 격파되자 왜군은 거침없이 서쪽을 향해 쳐들어가니 남해, 순천이 차례로 함락됐다. 왜군은 두치진에 이른 다음 육지로 올라 남원을 포위했다. 이렇게 되자 호남 호서 지방이 모두 전란에 휩싸이게 됐다”고 칠천량해전 직후 상황을 설명했다. 칠천량해전의 승전으로 기세가 오른 왜군은 육군과 수군 동시에 전라도로 진입해 8월16일엔 전북 남원의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7월22일 칠천량해전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복직시켜 위기를 수습하도록 했다.

칠천량해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고 심정을 밝혔다.

왜군,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성을 쌓다 왜군은 칠천량해전 직후 전라도로 쳐들어가며 부산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인 마산, 고성, 남해에 잇따라 성을 쌓았다.

마산왜성은 마산만을 향해 길게 뻗은 용마산의 끝부분 독립된 구릉에 세워졌다. 1958년 옛 마산시가 펴낸 <시세일람>에는 마산왜성이 “임진왜란 때 왜장 사노 료하쿠(佐野了伯)이 축성을 하다 미완성 상태로 두고 회군한 것을, 정유재란 때 창원 방면에 주둔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勝茂) 부자가 절도사 영지인 환구산과 신병영의 합성에서 석재를 가져와 완성한 성”이라고 소개돼 있다.

성벽 둘레는 280m에 이르렀다. 용마산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용마왜성이라고도 불린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조선총독부는 마산왜성을 고적(마산일본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고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주변지역까지 포함해 8만8945㎡에 이르렀다.

창원시(옛 마산시)는 1994년 이곳을 산호공원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군 장수의 지휘소였던 마산왜성 천수각 자리에는 1965년 5월25일 충혼탑과 위령각이 세워졌다.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했으나 주검을 찾지 못한 마산 출신 전몰군경 2039명을 추모하는 시설이라는데, 정작 현장에는 누구를 추모하는 시설인지 아무런 설명이나 안내가 되어있지 않다.

충혼탑엔 “여기 양지바른 남쪽 바다를 굽어보며 향토의 영령들 잠들다. 꽃다운 목숨 조국의 하늘에 바치고 이제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조용히 쉬도다. 이 탑은 당신의 피어린 충혼을 새긴 우리의 마음, 세세연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할 높푸른 얼이 이 속에 살다”라는 누구를 추모하는 것인지 애매한 문구가 적혀있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이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린다.

산호공원을 관리하는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청은 누리집(masanhp.changwon.go.kr)에 “산호공원은 일명 용마산성이라 불리며 선조25년(1572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착공하여 선조 30년에 완공된 것”이라며 누가 언제 왜 성을 쌓았는지에 대한 엉터리 설명을 하다, <한겨레> 취재 직후 바로 잡았다.

마산합포구청 담당부서 관계자는 “산호공원에 왜성이 있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이옥정 전몰군경유족회 마산지회장은 “196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둘러보고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좋다’며 이곳에 충혼탑과 위령각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성왜성은 1597년 10월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가쓰라 모토쓰나(桂元網)가 고성읍성 남부 구릉에 세운 것이다. 이 성엔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다치바나 무네토라(立花總虎), 다치바나 나오쓰구(立花直次), 츠쿠시 히로카도(筑紫廣門) 등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왜군 제7군에 편성돼 조선에 쳐들어왔다가 휴전기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왜성을 지키며 조선에 남아있었던 장수들이 옮겨와 번갈아 주둔했으며, 병력은 6000~7000명에 이르렀다.

왜군은 세종30년(1448년)에 세워진 길이 1644m의 석축성인 고성읍성 남쪽 성벽에 붙여서 남북으로 길게 성을 쌓았는데, 왜성 북쪽 성벽은 읍성의 남쪽 성벽을 그대로 이용했고, 나머지 성벽은 읍성의 성벽돌을 뽑아와 쌓았다. 고성왜성은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돼 있지만, 현재 마을에 파묻혀 성벽 대부분이 사라졌으며, 일부 성벽은 개인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이용되고 있다. 천수각 자리에도 개인주택이 올라앉아 있다.

남해왜성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板安治)가 선소마을 뒷산에 세운 것이다. 선소마을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배를 정박하는 부두시설을 이곳 바닷가에 설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지금도 바닷가에 당시 선소 시설 유적이 일부 남아있다. 남해왜성은 남해섬 동쪽으로 튀어나온 해발 44m 구릉에 본성이 있고, 남쪽의 해발 22m 구릉에 외성이 있다. 가운데 도로가 나면서 본성과 외성의 연결은 끊긴 상태이다. 본성은 구릉 본래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꼭대기에 천수대를 두고 주변에 계단처럼 층층이 배치된 성곽터가 천수대를 둘러싸고 있다. 현재 성곽터 평지는 모두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해왜성 아래 바닷가에는 바위에 가로 131㎝ 세로 253㎝ 크기의 직사각형 비석 모양으로 파서 글을 새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장량상 동정마애비’가 있다.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 직후 명나라 장수 장량상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군 이여송과 진린의 승리를 기념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도움말 :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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