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플랫폼]칼빈은 불관용자의 대표자인가?

양신혜 대신대학교 조교수 2015. 10. 24. 08: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1> '삼위일체' 교리거부로 화영당한 세르베투스, 사건의 책임이 칼빈에 있을까

[머니투데이 양신혜 대신대학교 조교수] [편집자주] ‘비평의 플랫폼’은 공연, 전시, 출판, 미디어에 대한 리뷰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이슈를 문화비평의 시각으로 의미를 분석하고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비평가들의 깊이 있는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평의 플랫폼’은 인천문화재단이 발행하는 격월간 문화비평웹진 '플랫폼'(platform.ifac.or.kr)에 게재된 글을 신문기사의 형식에 맞도록 분량을 줄인 글입니다. '플랫폼' 홈페이지에 오시면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11> '삼위일체' 교리거부로 화영당한 세르베투스, 사건의 책임이 칼빈에 있을까]

칼빈

한국은 불교, 기독교, 천도교, 원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종교적 관용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시민윤리로서의 척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한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의 사건은 우리의 사고로 이해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칼빈은 불관용자의 대표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그 후예인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그 비난의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의 사건을 바라볼 때 하나의 원칙을 유념해야 한다. 과거의 사건과 지금 우리 사이에는 시대적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사건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해석의 원칙에 따라서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이 벌어진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칼빈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칼빈은 파렐(Farel)의 권유로 제네바에 정착했을 때 이방인에 불과하였다. 당시 제네바 시의회에서의 기록을 보면, 칼빈이란 이름 대신 ‘그 프랑스인’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제네바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력도 크지 못했다. 게다가 제네바 토착 시민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제네바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후 그가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된 것은 1542년에 이르러서이다. 다시 제네바 시의회의 요청을 받았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라! 시의회의 요청으로 제네바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555년까지 제네바의 토착 시민 파랭파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553년에 세르베투스의 화형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 칼빈은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며 독불장군처럼 마음대로 판결을 내릴 처지에 있지 못했다. 그가 1559년에 가서야 제네바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둘째, 칼빈은 고문이나 억압,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교적 개종을 반대하였다. 그는 종교적 확신은 개인 양심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의 대표적 작품인 '기독교강요' 초판(1536)에는 이슬람교에 대한 관용의 입장을 취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외에 그는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수납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관용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주요교리’와 ‘주변교리’(adiapora)로 나누어 시대적 적용을 위한 해석의 공간을 만들었다. ‘주요교리’는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이자 핵심으로 불변의 영원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이 교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걸쳐서 지켜져야 할 교리이다. 이와 달리 ‘주변교리’는 상황에 따른 시대적 적용으로서의 해석의 장(場)을 요구한다. 세르베투스와의 논쟁에서 제기된 삼위일체-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은 하나이다.-라는 교리는 당시 교회의 기반을 형성하는 핵심교리였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 교회가 마르키온(주1)과 영지주의(주2)라는 라는 이단에 대항하여 합의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 기독교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한 것은 단지, 교리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와 국가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 받은 자가 화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시의 보편적 판례였다.

셋째,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은 칼빈 개인의 독단적 결정에 순응한 결과가 아니다. 제네바 시의회의 의원들은 세르베투스의 판결을 두고 고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세르베투스가 이미 비엔나에서 체포되어 가톨릭교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지 세르베투스를 추방시킴으로 로마가톨릭교회보다 더 관대하게 보이길 원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문제로 화형을 시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왜냐하면 많은 제네바 사람들이 프랑스 가톨릭 도시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 시의회의 망설임은 이해할만하다. 그래서 스위스의 시의회는 세르베투스에게 비엔나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를 거절하자 제네바 시의회는 다른 도시의 정부로부터 지지가 필요하였다. 물론 세르베투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네바 시의회는 주변의 비난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작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스위스의 개혁교회들은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에 동조하였다.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51)의 뒤를 이어 취리히교회를 이끌어 간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다소 관용적 입장을 취했던 루터의 후계자인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도 세르베투스의 화형은 “정당하게” 이루어졌다고 표명하였다. 칼빈과 예정론 논쟁으로 대립 갈등 구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칼빈의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 볼섹도 “나는 그런 괴문 같은 이단자의 죽음을 기쁘게 생각하며 이 글을 기록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악하며 사람 가운데 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세르베투스 자신도 이전에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완고하고 사악한 이단은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자는 화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시의 “공적인 규범”이였고 “지배적인 정서”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회가 세르베투스에게 화형을 선고하였을 때, 그는 화형보다는 덜 참혹한 방법인 참수형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인도적 차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칼빈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주요교리인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이단을 처벌하여 교리의 순수성을 담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결단을 중시하였고, 인도적 차원에서 화형보다는 덜한 참수형을 권고함으로써 근대사회로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으로 인한 현대의 칼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우리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임의적 해석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과 사료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필요하다. 만약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임의적인 비난으로 흐르기 쉽다. 그리고 감정적 차원에서의 임의적 비난이 난무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자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여 교회의 언어가 사회적 방언으로 머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하는 그룹 또한 감정적 차원에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기 보다는 기독교의 본질에 귀를 기울이는 성숙한 시민의 자세 또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주1> 마르키온은 하나님을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으로 구분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과 보복의 하나님인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으로 높이 경외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여 신약만을 높이 평가한다.

주2> 영지주의자들은 참된 지식인 그노시스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구조를 지닌다.

양신혜 대신대학교 조교수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