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표재순 감독(하) "'관객을 즐겁게'가 연출의 처음이자 마지막"

2015. 10. 20. 17:3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DMZ의 지뢰를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에, 전 세계 아티스트를 모아서 세계 평화 콘서트를 열고 싶어요. 자연 최대한 손대지 말고, 최소한의 무대와 길만 만들어서 콘서트를 열 수 있으면 통일도 좀 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역사적 사실의 뼈대에 상상력을 입히는 작업이 순수 창작보다 더 어려웠을 텐데요.

“그 당시에 허준의 ‘동의보감’이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의술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독일어, 불어 번역도 있는데 한국어 번역은 없었어요. 동의보감을 처음으로 경희대학교 노정호 선생님이 번역하셨을 때 그걸 보고 자신이 생겼어요. 스토리는 없었어요. 그 당시는 시신 훼손이 금지돼 있었어요. 근데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왜 인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겠어요? 몰래 했을 것이라고 가정을 하고, 해부에 관한 에피소드를 만들었죠. 허준은 족보를 찾아봐도 흔적이 없어요. 정실부인이 낳은 자식이 아닌 서얼이었기 때문이죠. 자료가 없기 때문에 90%의 픽션을 만들 수 있었어요. ‘허준’ 이야기는 ‘생명존중’을 주제로 정한 다음, 인물을 재창조해낸 겁니다.”

이은성 작가가 소설 <동의보감>을 쓸 수 있었던 것도 표재순 감독이 이야기를 발굴하고 함께 스토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밭을 가는 소의 역할을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분들이 꽃 피우고 열매 맺게 한 거지요. 제가 <집념>을 연출할 때 조연출을 맡았던 이병훈 PD가 드라마 <허준>, <대장금>으로 이어지는 한의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잘 만들어냈죠. 돌아가신 이은성씨하고 나하고만 아는 얘기가 많아요. 우리가 만든 허준 선생 영정을 국가영정위원회에 들고 찾아갔어요. ‘이게 허준 선생님 영정인데 인정을 해주십시오’라고 청했더니 도장을 파주었어요. 국가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거죠. 그걸 우정국에 가져가서 우표로도 만들었어요. ‘허준’이란 인물을 완전히 창조해낸 것이지요. 양천구에 구암박물관도 있잖습니까.”

드라마 <집념>이 인기를 끌면서 ‘허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요.

“드라마가 한창 인기 있을 때에도 허준에 대한 연구가 없었거든요. 산청 사람 유의태가 스승이라고 돼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유의태 선생은 100년 뒤 사람이란 게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어요. 허준의 무덤도 파주 쪽에 있다고 해요. 비문도 없고 생년월일도 없거든요. 지금 대중이 알고 있는 ‘허준’ 이야기는 픽션이 정사처럼 돼버려서, 인물에 대한 역사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어디서 나오면 좋겠어요. 사실을 토대로 진짜 허준 스토리를 다시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리메이크돼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인물이 ‘허준’이고, 지금은 5대 ‘허준’까지 나왔어요. 드라마 <허준>은 해외에까지 수출돼 한류열풍을 일으킨 역사 드라마의 시초가 되었어요. 허준을 비롯한 역사 드라마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지막은 허준이 돌림병 지대에 들어가면서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라’고 말하죠. 바로 살신성인을 보여준 인물이죠. 변치 않는 주제는 ‘생명존중’이에요. 과거 길도 마다하고 환자를 돌봐주고, 스승이 자기 몸을 내줘서 제자가 수술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에피소드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죠. 드라마 <허준>이 한류를 이끄는 드라마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문화를 초월해서 다 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인 ‘생명존중’을 다루었기 때문이에요. <대장금>이 성공한 이유도 그것이고요. 앞으론 생명사상을 문화 콘텐츠에 어떤 방식으로 잘 입힐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전통 역사 속에서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인물을 발굴해내서 시대의 트렌드에 맞도록 이야기를 만들면 됩니다.”

역사 드라마가 앞으로도 국제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보시는군요.

“광맥을 캐고 있는 중이랄까요?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자본주의가 아닌 생명이 문화 콘텐츠의 밑천입니다. 전 세계 문화를 관통하는 베스트셀러의 요소에 속하는 것들을 우리 문화는 다 가지고 있어요. <대장금>은 모든 문화권에서 좋아하는 신데렐라 스토리, 한국의 독특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화려한 모습에 한의학 에피소드를 더하고 생명존중 사상을 입혀서 문화를 초월해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 조합한 작품이죠. 바다를 낀 아름다운 자연 강산의 모습과 사계절을 영상에 담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이 역사 드라마를 재밌게 잘 만들어요. 앞으로도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봅니다.”

세계 속에 한국적인 콘텐츠를 알리는 데 가장 능력을 갖춘 분이 표재순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주시와 이스탄불시가 공동 개최하는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은 23일 동안 터키 이스탄불 시내에서 열렸는데요, 40개국이 참가하는 국제적인 행사의 총감독을 맡아서 성공적으로 치르셨어요.

“많은 분들이 아이디어를 냈고, 저는 열심히 교통정리를 했죠. 46개 프로그램을 가지고 가서 이스탄불 전 시내에 펼쳐놓고 공연·전시 행사를 열었고, 485만명 정도가 관람했어요. 이스탄불은 1500~18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이고, 경주는 1000년 역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인구도 경주는 27만명밖에 되지 않지만, 이스탄불은 1200만명이나 됩니다. 이스탄불과 경주가 문화교류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많은 분들이 굉장히 의아심을 갖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이스탄불시에서 2013년에 화답으로 예술가 350명이 경주에 와서 <이스탄불 in경주 2014> 행사를 열었어요.”

이스탄불이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 자국의 문화를 선보인 것이었다고 하던데요.

“민속공연, 연극, 문화 전시관, 음식까지 27개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서 120억원을 경주에 투자해서 행사를 꾸몄어요. 올해도 <실크로드 경주 2015>가 한창 열리고 있습니다. 실크로드로 이어진 역사를 토대로, 문화와 소통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경북과 이스탄불의 우정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감독님의 천재적인 창의성은 타고난 것일까요.

“천재는 무슨(웃음). 천직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했을 뿐이죠. 대학 2학년 때 산에 가려고 친구를 모으다 보니 친한 친구가 안 보여요. 연극 연습하러 갔다길래 찾아갔더니, 연출자들이 ‘야, 너도 앉아서 대본 읽어’ 그러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덜컥 배역을 맡아서 연극에 입문하게 된 겁니다. 작은 키에 빈대코, 외모도 배우감이 못 되고 배우로는 재능이 없으니까 연출을 하게 된 거고, 산에 다니고 연극하느라 학점은 F가 잔뜩 있으니까 회사에 취직할 생각은 애초에 못한 거고요. 연극만 해서는 밥을 못 먹고사니까 장사와 연극을 겸하다가 나이 30에 뒤늦게 방송사에 들어갔어요. 과정을 보세요. 천재가 아니지요. 재능이 많고 돈이 많아서 꿈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불만족스럽고 시원찮아도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성실하게 하다 보면 길이 보이고, 그걸로 밥 먹고살 수 있어요.”

지난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소중한 경험은 무엇인가요.

“소년 때 장돌뱅이 한 거, 대학 때 명동 한복판에서 자전거 타고 다니며 배달하고, 중앙시장에서 식품점 차려서 새벽부터 밤까지 장사한 경험요. 연극을 할 때도 엑스트라를 하더라도 밤새 전기선 설치하는 것 하나까지 같이했어요. 원작을 꼼꼼히 읽고 번역하고, 대본 쓰는 것도 함께했죠. 그 과정을 통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인생 경험은 버릴 게 없이 다 거름이 돼요. 인생을 두 배로 열심히 살긴 했어요. 장사할 때에도 연극을 놓지 않았고, 방송국에서 일할 때도 연극·오페라·국제행사 연출을 쉬지 않고 했으니까요. 부지런히 시간을 잘 활용하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잠을 4~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재능이 없고, 운도 없다고 좌절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재능 없는 사람은 없어요. 자신의 재능을 발굴 못할 뿐이지.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서 얘기를 듣습니다. 경청하되 귀가 얇아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하는 생각 말고, 누구도 하지 않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경청하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나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좌충우돌 많이 부딪혔어요. 인생도 이벤트예요. 과정 자체가 즐거워야 합니다. 즐겁게 일을 하다 보면 운도 따르는 것 같습니다.”

대학 강단에도 오래 서셨어요. 감독님의 ‘연출 철학’을 학생들은 가장 궁금해 할 것인데요.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순간 연출자는 객이 돼요. 관객이 주인공이에요. 그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지 못하면 실패한 거죠. 그래서 연출은 완벽할 수도 없고, 완성도 없습니다. 관객을 더 즐겁게 하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매일 갱신해 나가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발상, 그리고 호기심은 어떤 거름을 먹고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까요.

“나는 호기심이 과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이 들면서 호기심도 게을러질까봐 걱정이 돼요. 궁금한 건 바로 가서 보고, 궁금한 사람은 반드시 만나며 살아왔는데, 이젠 바로 가지 않고 동작이 둔해지죠. 나는 과거 얘기하는 걸 안 좋아해서 인터뷰도 안 했어요.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것도 과거의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죠. 그래서 책 쓰는 일도 사양해 왔어요. 나는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직 나는 더 할 일이 많거든요.”

그럼 현재진행형인 ‘민족혼 부활 프로젝트’ 얘기를 해보지요. 감독님의 인생철학과 예술철학이 고스란히 녹아난 결과물 같아요.

“꼭 하고 싶은 일이 우리나라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국민을 깨우쳐 주셨던 어른들의 생애를 연극 무대에 올리는 일이었어요. 제가 무대에 올리고 싶은 분들은 우리의 사표(師表)가 되고 스승이 된 분들이죠. 그래서 그분들의 생을 널리 알리는 데 사명감과 의무감이 생겨서 민족혼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한 거예요. 의미 있는 공연을 연출하는 데 마지막 힘을 쏟고 싶어서 다시 순수연극을 시작했어요. 역사를 모르면 국민의 정체성이 없어집니다. 100년에서 120년 전 인물을 선택했어요.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대한국인 안중근>,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의 면암 최익현 선생, 월남 이상재 선생, 네 분의 삶을 연극으로 올렸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과서에 나온 윤동주 시인의 시만 알 뿐 윤동주의 삶은 잘 모르지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척살한 이유도 15개 법정에서 나오는 증언이 있어요. 우리 연극을 본 후에야 사람들은 알게 되죠.”

부끄럽지만 저도 연극 <월남 이상재>를 보고서야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 초창기 총무를 맡으셨고 독립운동을 했던 선각자인데, 우리는 그분의 업적을 잘 모르죠. 월남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 20만명이 참석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분인데 말이지요. 월남 선생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힘 쓰신 분이에요. 싸우는 동안 동료와 가족을 모두 잃었고, 싸움은 매번 실패로 끝났지만 죽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미래에 헌신한 분이죠.”

표재순 총감독이 연출한 ‘실크로드 경주 2015’ 개막식 행사에서 출연진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전석 무료 공연이어서 놀랐습니다. 무료 공연을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런 분을 동상으로만 세워놓을 게 아니라, 대중과 가까운 무대에 세우는 이유는 우리에게 나침반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공연은 국내외를 다니면서 전석 무료로 관객을 초대합니다.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서 국가의 지원은 받지 않습니다. 기업 등 후원자를 구해서 더 많은 대중들이 볼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윤봉길, 신채호, 이봉창 등 여섯 분 정도 더 하고 싶어요. 전혀 이름 없는 들풀처럼 살아간 분들, 작은 일에 충실했던 분들의 이야기도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민족을 사랑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들춰내서 널리 알리고 싶어요.”

의미 있는 일이지만, 대가보다 품이 더 드는 일이에요.

“나더러 다 미친놈이라고 해요.(웃음) 그 구닥다리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그래요. 유관순 열사 이야기는 꼭 만들어야 하는데, 돌아가실 때의 과정이 너무 처참해서 내 감정이 추슬러지질 않아요. 말을 못하겠어요. 아스팔트 만드는 뜨거운 재료를 머리에 부어서 머리를 다 뜯어내는 극형을 받았던 사람이에요. 그 양반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대본을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미래 이야기를 해보지요. 170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하셨는데, 꼭 해보고 싶은 공연이 있나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5000년 만에 전 국민의 기를 모았던 88올림픽,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해봐요. 다시 기를 모을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는 이 땅에 여전히 있어요. 불만 붙여주면 다시 일어납니다. 남은 건 통일인 것 같아요. DMZ의 지뢰를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에, 전 세계 아티스트를 모아서 세계 평화 콘서트를 열고 싶어요. 자연은 최대한 손대지 말고, 최소한의 무대와 길만 만들어서 콘서트를 열 수 있으면 통일도 좀 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VIP 좌석은 100만 달러에 팔아서 전 세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이벤트 연출을 하고 싶어요.”

통일을 준비하는 이벤트군요. 두 번째는요.

“바그너 오페라의 성지인 독일의 바이로이트가 강원도 고성군과 결연을 맺었어요. 그런데 활용을 못해요. 고성에서 사람을 모아서 해마다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에 가고, 그들을 초대도 하는 이벤트를 해야죠. 아이디어도 많이 냈지만 예산문제로 안 되더라고요. 지방도시를 살릴 수 있는 문화기획을 계속 시도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면, 통기타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 세계에서 10만명쯤 통기타 가진 사람들을 모아요. 인터넷에 20곡 정도 악보를 올려서 연습을 한 다음, 입장료 대신 기타를 들고 오면 입장을 시켜요. 거기 다 모여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 거예요. 클래식 기타 연주자 두 명 정도가 무대에 올라서 메인 연주를 하게 하고요. 그렇게 3박4일을 노는 거예요. 세고비아 같은 세계적 기타 회사들의 협찬을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이죠. SBS 프로덕션 사장을 할 때 여의도에서 50만명 모아서 하려고 기획을 했지만, 1991년도 그 당시엔 다들 비웃었어요. 결국 못했죠. 난지도 하늘공원에서 그 이벤트를 한 번 하고 싶어요.”

50만명이 연주하는 통기타 소리는 상상만 해도 황홀합니다. 마지막은요. “전기 안 쓰는 연극을 해보자. 횃불 켜놓고 마이크 안 쓰고 마당에서 신명나게 노는 공연을 해보자. 돈 없어서 공연을 못한다는 푸념만 할 게 아니죠. 옛날엔 가면극 할 때 횃불을 켜고 했지요. 불빛이 일렁일 때마다 배우의 표정이 달라져요. 지금도 그런 공연을 할 수 있죠. ‘MBC 마당놀이’ 만든 것도 내가 원조인데, 실내에서 하는 건 한계가 있죠. 진짜 마당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가장 ‘표재순’은 어떤 분인가요. 가족 전체가 예술가더군요.

“아내 덕분에 장사를 접고 연출자의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아내는 제 뒷바라지하느라 전공인 미술을 하지 못했죠. 큰딸은 가야금, 둘째아들은 영화음악, 막내딸은 성악을 했어요. 애들은 나 때문에 늘 손해보고 힘들어하죠. 작은 일을 해도 아버지 덕을 보는 줄 아는 시선들 때문에요. 저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어요. 막내사위는 목사예요. 의료사고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죠. 딸은 남편을 도와서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어요. 신앙심이 깊어요. 가족에겐 늘 미안하고 마음만 가득해요. 가족은 조용히 표 안 나는 삶을 살고 있어요.”

역사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하고 싶은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별하며 살아야지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소처럼 밭을 일군 내 노력을 밭은 알아줄 것이라는 마음으로 일했는데, 오늘 긴 얘기를 하다 보니 밭이 내 마음을 몰라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열심히 한 것으로 족합니다.”

말이 적은 표재순 감독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는 문화나눔네트워크 ‘시루’의 대표도 맡고 있다. 에쓰오일이 ‘시루’에 공연예술 후원금을 지원하고, ‘시루’는 동네사람들에게 시루떡을 나누듯, 지역주민과 직장인들을 위한 무료공연을 올리고 있다.

자꾸만 위그든 아저씨의 사탕가게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 색도 맛도 다양하고 무한한 삶이 전시된 이야기 나라에 들어앉은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하기보다 경청하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실천하는 부지런함이 그의 성공 비결이 아닐까. 맛보지 못한 사탕들 앞에서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삶의 골짜기에서 만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실력을 쌓고, 그 결과물을 멋지게 연출해서 지금 ‘표재순’이라는 대작을 만들어낸 연출가.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온 아저씨가 구름처럼 희고 고운 백발 위에 벙거지 모자를 얹고, 실크로드 경주가 열리고 있는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생 찍은 사진이 몇 장 없으니, 이번에 찍은 사진은 영정사진으로 써야겠다며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엔 아직 호기심 가득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주간경향 공식 SNS 계정 [페이스북] [트위터]

모바일 주간경향[모바일웹][경향 뉴스진]

- ⓒ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