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엔 화끈한 맛, 골목길엔 풍성한 스토리 진짜 대구가 묻는다 "이 정도면 됐나?"

대구 | 글·사진 정유미 기자 2015. 10. 7. 22: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대구 지하철 3호선은 모노레일이다. 열차가 앙증맞게 생긴 데다 하늘길을 달리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한번쯤 타보고 싶어 한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근대골목, 서문시장 등 주요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열차는 3량인데 좌석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다. 무인 운행되며 30개역 23.2㎞를 달리는 데 편도 50분 정도 걸린다. 주거지역을 지날 때는 저절로 창문에 커튼이 쳐진다. 1100원으로 대구의 색다른 재미를 즐길 수 있다

■대구 음식은 맛없다? 서문시장에 가보라

조선시대 3대 장터였던 대구장이 바로 서문시장이다.

누른 국수, 납작만두, 찜갈비, 따로국밥,뭉티기, 복어불고기…

값싸고 맛있는 먹거리에 대구 음식에 대한 편견이 싹 사라진다

대구 음식은 “짜고 맛없기”로 소문나 있지만 서문시장에 가면 생각이 바뀐다. 대구 지하철 3호선 서문시장역 2·3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장터다.

서문시장은 조선시대에 형성된 장터가 오늘날까지 이어진 독특한 시장이다. 대구읍성 남문인 달서문 밖에 있던 서문시장의 본래 이름은 대구장, 혹은 대구 큰장이었다.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장으로 불리며 근대 상업도시 대구를 떠받친 큰 장터다.

서문시장에 들어서면 ‘누른 국수’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손으로 직접 ‘눌러’ 만든다는 경상도 칼국수의 별칭이다. 콩가루를 섞은 밀가루를 얇고 널찍하게 민 다음 가늘게 썰어 진한 멸칫국물에 넣고 푹 끓여낸다. 손으로 직접 만든 면은 쫄깃하고 국물은 시원하다. 호박을 고명으로 올릴 뿐 사골 국물이나 해물 등은 일절 쓰지 않는다. 뜨겁고 퍽퍽한 국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건 누른 국수’를 시키면 된다. 한번 칼국수를 끓여낸 뒤 육수를 다시 붓기 때문에 깔끔하다. 원하면 수제비를 넣어 주기도 한다. 가격은 정말 착하다. 한 그릇에 2500~3500원.

서문시장 칼국수 골목.

‘납작만두’ 원조는 대구다. 당면에 부추와 당근, 양배추, 파 등을 넣어 납작하게 만두를 빚는데 맛이 담백하다. 반달모양의 만두를 한번 삶은 뒤 다시 구워 간장을 술술 뿌려 준다. 매운 떡볶이를 시켜 함께 싸먹는 맛이 별미다. 납작만두 7~8개를 내주는데 3000원이다.

‘찜갈비’는 밥을 비벼 먹어야 제맛이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소·돼지갈비를 넣고 매운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과 같이 볶아주는데 입안이 얼얼하다. 1인분에 7000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소막창구이. 집집마다 된장 소스가 다른데 먹을수록 씹는 맛이 고소하다. 비교적 저렴한 돼지막창은 바삭하게 구울수록 맛이 배가된다.

대구는 ‘야끼우동’도 매콤하다. 센 불에서 오징어와 돼지고기를 양파, 배추, 호박, 숙주나물, 목이버섯 등 갖은 채소와 함께 매콤하게 볶아낸다. ‘따로국밥’은 한우고기를 깍두기만 한 크기로 썰어 넣는 것이 특징이다. 사골과 사태를 밤새 끓여 대파와 무를 넣고 푹 삶아낸 육수가 개운하다. 육개장은 ‘대구답게’ 얼큰하고 화끈하다. ‘뭉티기’는 생 한우고기를 엄지손가락만 하게 뭉텅뭉텅 썰어 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빨간 고추에 참기름, 마늘을 넣은 양념에 찍어 먹는데 맛이 달콤하다. 고기가 담긴 접시를 거꾸로 들어도 쏟아지지 않는다. 그만큼 신선도를 보증한다는 얘기다.

‘복어 불고기’는 매운 해물찜 같다. 뼈를 발라낸 복어살에 콩나물을 넣고 불판에 올려 불고기처럼 먹는다. 대구 문화해설사 이영숙씨(51)는 “대구 음식이 짜고 맛이 없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라면서 “다양한 음식을 싸고 맛있게 먹기에는 대구만 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가장 인기 있는 투어? 근대골목에 가보라

고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은 계산성당에서 출발,

3·1만세운동길, 이상화·서상돈 고택, 청라언덕까지 2시간 코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여행, 한 해 10만명 이상 찾는다.

대구 근대골목은 2012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될 만큼 ‘골목 투어’ 명소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해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이다. 내륙도시인 탓에 전쟁 피해가 적어 지금도 근대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실핏줄같이 연결된 골목은 5개 코스로 둘러볼 수 있다. 그중에 주 코스인 계산성당~3·1만세운동길~이상화·서상돈 고택~청라언덕 등을 둘러봤다. 2시간 정도 걸렸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은 계산성당.

탑이 뾰족뾰족해서 뾰족집이라고 불리는 계산성당은 1918년 서울 명동과 평양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영남권 신앙의 요람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문화해설사 김경화씨(54)는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를 전 세계 주요 성당에 보냈는데 계산성당에도 그 일부분이 보관되어 있다”며 “김대건 신부의 왼쪽 손목뼈도 안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역사적인 유물을 왜 서울 명동성당에 안치하지 않았을까. 당시 조선교구청을 서울과 지방으로 나눌 때 대구가 서울교구에 버금가는 중요한 성당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국내 최초의 가톨릭대학인 대구 성유스티노신학대를 졸업했고 계산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것만 봐도 대구교구의 위상을 알겠다.

계산성당은 겉모습만 봐선 여느 성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100년 세월이 느껴졌다. 프랑스인이 설계했다는 실내 회색 기둥은 성소의 경건함을 떠받치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조선시대 양반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 김대건 신부 등 박해받은 천주교인들을 기리고 있었다. 한국에 몇 개 없다는 폴란드산 파이프오르간도 눈길을 끌었다.

계산성당을 나오면 건너편에 3·1만세운동길이 있다. 만세운동 당시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니던 솔밭길이었다. 나부끼는 태극기들의 안내를 받아 오르막 계단을 오르자 액자에 담긴 사진들이 만세운동 당시를 증언하듯 줄지어 서 있다.

계산성당 건너편에 있는 3·1만세운동길.

청라언덕에는 제일교회가 우뚝하다. 대구·경북 최초의 기독교 본당으로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교회 옆 미국인 선교사들이 머물렀다는 고택은 담쟁이넝쿨에 뒤덮여 아담하고 고즈넉하다. 1601년 대구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경상 감영이 있던 곳이다.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약령시를 열었는데 외국인들이 선교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

근대골목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 고택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 선생의 생가 등이 깃들어 있다.

대구는 삼국시대부터 달구벌로 행정구역이 설치될 만큼 지리적으로 영남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매혹적인 명승지를 갖지 못한 도시이기도 하다. 대구시민들이 근대골목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대구는 여전히 심심한 도시였겠다 싶다. 근대골목 투어는 대구 지하철 3호선 신남역 6번 출구로 나와 7분 정도 걸으면서 시작된다. 근현대사를 담은 이 골목길을 체험하기 위해 한 해 10만명 이상의 산책자들이 찾는다고 한다. 시청 홈페이지나 전화로 해설을 신청하면 상세한 설명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053)661-2624

■김광석 고향이 대구? 대봉동에 가보라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에서 태어난 김광석,

어릴 적 TV·라디오를 수리하는 아버지 곁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골목길에 흐르는 음악과 벽화가 애잔하다.

내년이면 가수 김광석이 떠난 지 20년이다. 가을이 오면 유독 그의 노래가 귓가에 머물고 입가에 맴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들으며 김광석이 태어났다는 대구 방천시장으로 향했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너에게 편지를 쓴다/불안한 행복이지만/힘겨운 날도 있지만/새로운 꿈들을 위해/바람이 불어오는 곳/그곳으로 가자.”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의 고향이 대구인 줄 몰랐다.

야경이 더 운치있는 김광석길.

김광석을 밤에 만났다. 350m에 이르는 김광석 거리는 낮이면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지만 해가 지면 한가하고 조용해진다. 그의 노래에 집중하며 골목길을 걸었다. 통기타를 메고 하모니카와 휘파람을 불며 부르던 그의 노래가 아련하다.

1996년 서른 세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TV와 라디오를 수리하는 전업사를 운영했다. 소년 광석은 아버지 곁에서 노래를 듣고, 골목을 누비며 그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2009년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모여 요절한 ‘음유시인’을 기리며 김광석을 그리고 김광석을 불렀다. 그렇게 해서 김광석 거리가 생겼다.

골목 안에는 김광석의 초상과 조형물 등 70여 점의 ‘작품’들이 벽면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매주 토요일 낮 12시 생방송을 진행한다는 대구MBC 라디오 골목 스튜디오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비가 내리면 더욱 애잔해지는 그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가 흘러 나왔다. 그는 군인들을 볼 때마다 “집 떠나와 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를 부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친형이 군에서 사망했는데 어머니가 집으로 배달된 군복을 빨면서 한없이 울었고 그날 이후 김치 맛도 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 새롭게 단장한 벽화는 예뻤다. “매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는 애처롭게 이어지고,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며 매달아 놓은 자물쇠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흔살이 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싶다”는 그의 순박한 일기가 벽면 한쪽에 적혀 있었다. “키가 1m64라서 오토바이를 타면 발이 땅에 닿을 것”이라고 놀리던 친구에게 “가을에 편지를 써”라고 말하는 광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화해설사 이원섭씨(54)는 “디지털 한류시대에 아이돌 그룹이 대세라지만, <복면가왕> <히든싱어>에 이어 시민들이 함께하는 미완성 신곡 발표까지 아이들도 좋아하는 가수가 바로 김광석”이라고 말했다.

김광석 거리는 대구 지하철 3호선 대봉교역 1·4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대구 | 글·사진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