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덕후가 추천하는 '극한 와식' 명절 가이드

중림동 새우젓 2015. 9. 2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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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만큼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기 좋은 때가 어디 있느냐고? 뭘 모르는 분이거나 명절에 가족의 소중함만 느껴도 되는 처지의 복된 분이시다.

'살쪘네?' '취직은?' '결혼은?' '아이는?' 콤보를 연타로 얻어맞거나,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끝도 없는 가사노동에 시달려야 한다거나, 그간 쌓여온 가족 간의 갈등 요소들이 명절 어르신 덕담이란 탈을 쓰고 폭발한다거나….

나만 연휴인 게 아니라 가족도 연휴인 게 문제지만 그래도 추석을 견디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극한 와식(臥式) 생활자’를 위한 명절 가이드를 준비했다.

ⓒ이우일 그림 :

<스타워즈>는 SF영화가 아니라 ‘가족물’이라니까

전 국민에게 추석에 만나는 가장 반가운 친척 1위가 되어주었던 청룽(성룡) 아재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취직은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명절에 만나는 친척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청룽 아재도 이제는 명절에 예전 같진 않은 게 냉엄한 현실. 이럴 때일수록 고전을 찾아보자. 20세기 전 세계 덕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스타워즈> 극장판 6부작을 달리다 보면 시간도 잘 가거니와 올 12월 개봉 예정인 에피소드 7 <깨어난 포스> 영접을 앞두고 쏠쏠한 예습도 겸할 수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추천하는 것은 무엇보다 가족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사정없이 터질 예정이므로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들은 멀찌감치 도망가시라). 생각해보라. 다크사이드에 유혹당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아나킨이지만, 에피소드를 따라가며 곱씹어보면 얘 인생은 그릇된 조기교육이 망친 거다. 이제 간신히 코흘리개를 면한 애를 세워놓고는, 얘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하니 마음속에 결핍이 있고 결국 두려움으로 이어져 제다이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요다를 보라!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며 애를 못살게 들들 볶아대는 오비완을 보라! 이러니 애가 안 미치고 배기겠는가? 어른들의 그릇된 엘리트 중심적인 교육관과 과도한 기대가 결국 애를 삐뚤어지게 만들고 팰퍼틴 같은 나쁜 친구와 어울리게 만든 것이다.

<스타워즈>

출산 준비가 안 됐는데 무리하게 자꾸 애를 낳으라는 집안 어른들에게도 <스타워즈> 시리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 그래도 심사가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아나킨에게 파드메의 임신은 결코 긍정적인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될 준비가 안 된 아나킨은 결국 만삭의 파드메를 목 조르기에 이르고, 그 후 평생을 후회와 회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준비 안 된 출산과 입양으로 또 얼마나 비참한 일들이 이어졌는가? 다스베이더가 된 아나킨은 자신의 딸 레아를 눈앞에 두고도 완연한 남남이 되어 딸이 자란 행성을 파괴했으며, 서로가 남매라는 사실을 모르고 만난 루크와 레아는 세 번이나 키스를 했다.

마지막으로 <스타워즈> 시리즈는 친지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예전처럼 대통령한테 개기는 놈들 다 싹 잡아넣어야 해!'라 외치며 독재 친화적인 정치관을 자랑하는 집안 어르신들의 정신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한 친척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훌륭한 백신이 된다. 아무리 은하공화국이 부패하고 무능해 보여도 은하제국보다는 유능했다. 제국의 정예병사라는 스톰트루퍼들이 코앞에 있는 적조차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나아가 영링(어린 제다이들)들에게 민주주의의 소중함도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라니, 명절에 즐기기에 완벽하지 않은가! 부디 포스가 함께하는 명절이길.

혹시나 이 시리즈를 처음 보는 분들을 위해, 관람 순서는 반드시 에피소드 4-5-6-1-2-3 혹은 4-5-2-3-6으로 보시라(에피소드 1은 사실 굳이 안 봐도 된다). 에피소드 1부터 보는 실수를 저질러 시리즈의 첫인상을 구기는 참극만은 피해야 할뿐더러, 이렇게 봐야 반전의 묘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랜선 세계여행’ 어렵지 않아요

명절 연휴마다 뉴스를 보면 딴 나라 이야기 같다. 3대가 모여서 한복을 차려입고 성묘를 가거나 송편을 빚는 모습이라니. 이런 건 민속촌으로 가야 해! 다음 뉴스는 더 울적하다. 연휴를 맞아 인천공항에 출국 여행객이 몇만명이라는데 나만 텅 빈 한국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마음은 이미 출국장이지만 시간·지갑·체력의 3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귀한 순간은 좀체 오지 않는다. 모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추석 연휴라 한들, 저렴한 항공권은 진즉에 주인을 찾아간 지 오래다. 무엇보다 방바닥에 등을 대고 나면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럴 땐 내 방 안에서 ‘랜선 세계여행’을 해보는 것도 한 방편이다. 구글 스트리트뷰 서비스는 홈페이지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세계 곳곳의 360° 파노라마 이미지를 무료로 제공한다. 마우스로 화살표를 클릭하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현지 풍경을 살필 수 있다.

구글 스트리트뷰

여름휴가를 놓쳤다면 우선 바다로 떠나자. 스트리트뷰 홈페이지에서 바다(Oceans) 메뉴를 선택하고 세계지도에 나타난 빨간색 점 중에 원하는 곳을 누르면 끝이다(사진). 갈라파고스 제도, 인도네시아 발리, 모나코 등 전 세계 40여 개 바다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바닷속 산호초·열대어·바다거북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보다 산이 좋다면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추천한다. 실제 암벽등반 전문가와 함께 촬영한 이미지를 마우스로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찔한 절벽을 발아래 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밖에도 오로라가 뜬 핀란드의 하늘, 아마존 열대우림, 제주도 만장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부르즈칼리파의 80층 창밖 풍경 등 좀처럼 보기 힘든 장관을 마우스 클릭으로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구글 스트리트뷰 홈페이지에서 추천하는 명소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면 구글 지도에서 직접 장소를 검색해서 360° 이미지를 볼 수도 있다. 건물 이름이나 주소를 입력한 뒤, 화면 우측 하단의 노란색 사람 아이콘을 누르고 푸른색으로 활성화되는 길을 클릭하면 된다. 소소한 장소라도 놓칠 수 없는 ‘덕후’들의 ‘성지순례’에 최적화한 기능이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의 모델이 된 가마쿠라 고등학교를 검색해서 바닷가 쪽으로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다 보면, 눈에 익은 철길 건널목이 눈에 들어온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스>의 주인공 홈스가 집을 오갈 때마다 지나치던 스피디스 카페(Speedy’s Sandwich Bar & Cafe)도 엿볼 수 있다. 축구 팬이라면 토트넘 홋스퍼의 홈구장 화이트하트 레인 경기장을 둘러보며 ‘손흥민 선수의 시점에서 관중석을 보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고 마음이 뿌듯해질 것이다. 엑소의 팬이라면 ‘엑소더스(EXODUS)’ 앨범 티저 영상에 등장한 세계 10개 도시를 모두 되짚어보는 재미도 있겠다. 예컨대 멤버 백현의 티저 영상은 프랑스 리옹에서 촬영했다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백현이 걸어 올라가던 곳은 스페인 지로나 대성당(Cathedral of Girona) 앞 계단이다. 왜 굳이 이렇게 했을까 싶지만 이게 다 당신의 ‘덕력’을 시험하기 위한 SM의 깊은 뜻일지도 모른다.

명절의 의미가 퇴색됐다고는 하지만 한가위에는 역시 둥근 보름달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비 예보가 없어서 밝은 보름달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지만, 달맞이하러 나가는 것조차 귀찮다면 ‘랜선 달맞이’도 준비돼 있다. 구글 어스를 이용하면 우주 비행사의 안내를 들으면서 달 탐사선이 찍은 고해상도 달 표면 사진과 영상을 볼 수 있다. 다만 모두 영어로만 제공되니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어린이들 앞에서 동공의 떨림을 들키고 싶지 않다면 미리 예습을 해두자. 추석 연휴인 9월28일 오전에는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면서 붉게 보이는 ‘블러드문’과, 달과 지구 사이가 평소보다 가까워지면서 달이 크게 보이는 ‘슈퍼문’이 동시에 나타날 예정이다. 비록 이 시간대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은 낮이어서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지만, 미국 국립항공우주국(NASA) 홈페이지나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사진과 영상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고화질 사진에 소원을 빌면 왠지 달님이 내 소원을 더 잘 들어주지 않을까?

3박4일 추석을 <1박2일>로 접어 보내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가사노동과 덕담을 빙자한 훈계. 거실에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는 시간은 이 두 가지가 중첩되는 가장 괴로운 순간이다. 바로 그때, 모두를 구원할 마법 같은 콘텐츠로 KBS <1박2일>을 추천한다. 기존 <1박2일> 덕후들은 복습을 하며 덕심을 일신우일신하고, 머글들은 뜻밖의 덕통사고로 기나긴 추석을 순식간에 날려 보내리라. 지금부터 정주행과 영업을 한 번에 시전하는 꿀팁을 소개한다.

<1박2일>

추석에는 모름지기 서로의 대화를 최대한 얄팍하게 끌고 가 언제든지 대화의 싹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하는바, 대화 소재로 <1박2일>만 한 게 없다. 2007년 시즌 1로 시작한 이래 누구든지 한마디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프로그램이니 공통의 대화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일단 거실에 일거리를 펼쳐놓고 앉은 후에, 약간의 침묵이 생기면 주저 없이 <1박2일>을 튼다. 노트북에 미리 받아놓은 파일을 재생해도 좋겠다. '시즌 3은 잘 안 봤지? 시즌 1 신입 피디가 맡았는데….'

먼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즐기자. 매번 똑같은 복불복 게임인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1박2일> 시즌 3의 성공적인 안착을 알린 역대급 레전드 ‘신안 새봄맞이 금연 캠프(2014년 3월9~23일)’는 흡연자 멤버들이 강제 금연으로 겪는 괴로움과 흡연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그려낸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그런가 하면 서울이 고향인 멤버들을 부모님의 젊은 날로 안내했던 ‘서울 시간여행(2014년 2월9~16일)’은 뜨끈한 눈물을 짓게 만든다. 그 밖에도 전국을 무대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누가 승리했는지를 예측하기 어려운 레이스들(스타 셰프 샘 킴과 레이먼 킴 팀으로 나눠 재료 구하기 레이스와 요리 배틀을 펼쳤던 ‘비포 선셋 레이스 2탄-최고의 가을 밥상(2014년 11월23~30일)’, 전국을 돌며 최대한 많은 국보를 만나고 정해진 시간에 귀환해야 하는 ‘당일치기 국보전국일주(2015년 3월29일~4월5일)’, 전라도 곳곳의 맛집을 돌아보고 더 많은 미션에 성공해야 하는 ‘전라도 미식레이스 맛세븐(2015년 8월23일~9월6일)’ 등도 역시 반전의 스토리를 즐기기에 좋다.

팀 간 구도와 멤버 간 ‘케미’를 살펴보는 재미도 남다르다. 같은 2인 조합이라도 한 명이 더해져 3인 팀을 꾸렸을 때 각 캐릭터며 팀의 색깔이 달라지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덤앤더머 김종민+김준호 조합에 ‘비운’ 하면 지지 않는 김주혁이 더해진 일명 3G(경기 북부 투어(2014년 1월12~19일)에서 다리에 쥐가 났던 3명)는 최강의 예능 조합으로 무조건 웃기고 무조건 패배한다. 이 둘에 차태현이 더해지면 뜻밖에 브레인 집단으로 변모하고, 정준영과 함께라면 소년 가장에게 의지하는 귀여운 형님들이 되기도 한다. 오타쿠 조합인 데프콘과 정준영에 큰형 김주혁이 한 팀이 되면 철딱서니 없는 아들들과 아버지 구도가 만들어진다.

한 컷 한 컷을 뜯어보며 멤버 한 명 한 명의 매력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놓치지 말자. 그냥 아저씨들인 줄만 알았던 무해한 귀요미들에게 빠져들게 될 거다. 특히 ‘전북 남원 돌발여행(2013년 12월29일~2014년 1월5일)’ ‘밀양 더위탈출 여행(2014년 6월29일~7월6일)’ 편은 '그래, 요새 공부는/ 취직은/ 연애는 잘돼 가니?'라는 친척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유용한 대처가 될 수 있다. '(질문을 모른 척하며) 방금 봤어?! 김준호 귀달이 모자 쓴 거 완전 귀여워! 옆에 달랑달랑이라고 써 있었어!' '으악 정준영! 밥도 사줘또(하트)래! 뿌농색 하트!' 이렇게 멤버별로 사랑스러운 포인트를 세심하게 살려주는 제작진 덕에 프로그램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 역시 부드럽다. <1박2일> 멤버들의 가장 큰 덕후는 제작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게다가 편집과 자막도 덕후다운 드립과 배경음악을 적절히 사용해 복습의 묘미를 더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추천하는 방식은 시즌 3 첫 화부터 정주행이다. 어색하던 멤버들이 친해지면서 이야깃거리들이 쌓이고 스토리가 확장되는 과정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화에 시리즈가 다 완결되지 않고, 다음 화로 앞부분이 물리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이어서 계속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차례상 준비는 완료되고, 식사 시간에 서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분도 만끽할 테다. 이제 남은 것은 돌아가는 가족들에게 추천 화를 적어주며 생색내기. '같이 보면 더 재밌을 텐데, 집에 가서 꼭 봐.'

'밥은 먹고 다니냐' 추석이니까 ‘굶지 마’

생산을 자연에 크게 기대던 시절의 추석은 말 그대로 풍요와 결실의 명절이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한 해 농사의 결실을 보는 명절에는 배고픈 시절 쉽게 보기 힘들던 온갖 음식을 배부르게 먹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서양의 추수감사절과 마찬가지로 추석 또한 그 본질은 배부르고 등 따신 만족감에 있다.

미스터리 서바이벌 어드벤처 게임 <굶지 마>

사시사철 수확이 가능하고 식량의 저장과 유통이 손쉬워진 요즘은 추석의 의미가 과거만큼 두텁지 못하다. 특히나 도시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한 날의 대명사가 되어버릴 정도로 본래적 의미로서의 추석은 색이 바래었다. 어쩌다 한번 보는 친척들은 어찌 그리 말들이 많은지 고향 가고픈 마음을 날려버리기 일쑤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며칠간의 휴일을 오롯이 집안에서 보내고 싶은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연휴 동안 푹 빠져 즐길 만한 게임 중에서 추석의 본래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아주 적절한 게임이 있다.

<굶지 마>(Don’t Starve, 2013)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먹고사는 문제가 게임의 중심에 서 있는 미스터리 서바이벌 어드벤처 게임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앞뒤 알 수 없는 들판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포만감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제때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면 정말로 굶어 죽는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는 들판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 처음에는 아무런 도구가 없어서 단순히 야생 당근을 뽑아 먹거나 산딸기를 따먹는 채집 생활을 하지만, 돌멩이와 나무 등을 모아 화덕을 만들어 요리를 통해 음식의 효율을 높이고, 덫과 창을 이용해 사냥을 해서 좀 더 다양한 음식을 확보할 수 있다. 나중에는 씨앗을 주워다 농장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생산한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건조장과 요리장·냉장고(!) 등을 만들면서 저장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게임 내에서의 배고픔은 절대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날씨라도 좋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추위가 찾아오는 바람에 농사가 안 되거나 멀리 식량을 구하러 나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며, 매일 밤 찾아오는 어둠을 버티기 위한 땔감을 모으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하루 24시간 중 먹을 것을 찾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지 못하면 결국 얼어 죽거나 어둠 속에서 괴물들에게 공격받아 게임이 끝나고, 그렇다고 먹는 데 소홀하면 굶어 죽고 마는 가혹한 환경에서 플레이어는 하루하루를 버텨나가야 한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버티며 먹을 것을 모으다 보면 적어도 초겨울 전쯤에는 창고 안에 한가득 말린 고기와 요리 재료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마다 떨어지는 포만감 그래프를 보며 공포에 떠는 순간을 넘어 그래도 며칠은 버틸 만한 식량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에 귀한 벌꿀(꿀은 게임 내에서 절대 썩지 않는 재료다) 요리도 해먹어보고, 칠면조 요리도 해먹어보는 시점이 겨울 직전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추수감사절이든 추석이든 아마 <굶지 마>를 플레이하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의 사람들이 만든 명절이 아니었을까.

초반의 어려움을 지나 짚단으로라도 그럴듯한 집을 만들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보노라면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 삶의 가장 원초적인 행복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추석에 고향에도 못 가보고 정말 혼자 남아 게임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연휴 동안 <굶지 마> 세계에서라도 추석의 풍요로움을 만끽해보자. 단, 명절에 혼자 있을수록 게임 제목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실제 삶에서도, 끼니는 굶지 말자.

영화로 알면 어린이 만화로 알면 어른!

배가 뒤집혀 300여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역병이 휩쓸더니 나라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런 나라에도 명절이 온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용어가 있다. 묵시록을 뜻하는 ‘아포칼립스’에서 유래된 말인데, ‘망한 이후의 세상’을 다룬 이야기를 부르는 말이다. 현대 문명이 경제공황이나, 핵전쟁, 기후변화 등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행하기 시작한 장르다. 망한 이유도 다양하다.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류를 공격하기도 하고, 핵전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 좀비가 창궐하기도 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만화’다.

만화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지금은 현대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거장이 되었지만 33년 전,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마주>에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하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백수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던 <아니마주>의 편집장이 출판사 사장을 설득해 투자를 받아냈고, 하야오는 자신이 연재하던 만화를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 작품이 바로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이다.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발자국이 되었다.

일본의 소설가 니시오 이신은 소설에 이런 대사를 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영화로 알고 있으면 어린이, 만화로 알고 있으면 어른.' 영화도 훌륭한 작품이지만, 만화에 비하면 어린이용이라는 평가다. 만화는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 뒤에야 완성되었다. 낮시간 동안 회사에서 스태프와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밤에 혼자 작업실에서 만화를 그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만화 ‘나우시카’가 미야자키 하야오 필생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이야기 배경은 다음과 같다. 고도로 발달한 기계문명이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대전쟁으로 망한 지 1000여 년이 지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근근이 버티고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무엇보다 위협하는 건 적대적인 자연환경이다. 이전 시대 사람들은 숲에서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지만, 이 시대의 숲은 방독면 없이는 피를 토하며 죽게 만드는 독기를 내뿜는다. 이 숲은 부해(썩은 바다)라고 불리는데, 부해에서 사는 거대한 곤충들은 인간들이 부해를 침범하는 것을 막는다. 여기까지의 설정은 영화와 만화가 같다.

그런데 부해에는 비밀이 있다. 사실은 부해가 땅에 퍼진 독소를 빨아들여 일부는 내뿜지만 대부분을 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비밀을 알게 된 나우시카가 부해를 태워 없애려는 사람들과 맞선다. 그런데 만화에서 나우시카는 조금 더 고민한다. ‘인류는 이미 오염에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부해가 정화를 끝내는 날 인류도 함께 사라지는 걸까.’

영화와 만화의 차이는 또 있다. 영화에서는 군사 대국 ‘도르메키아’가 평화로운 ‘바람계곡’을 침공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그런데 만화에서는 바람계곡이 도르메키아의 우방국이다. 도르메키아가 전쟁을 벌이면 바람계곡의 군주도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바람계곡의 공주인 나우시카는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에 나간다. 나우시카는 선과 악이 대결하는 세상이 아니라 악과 악이 서로 잡아먹는 세상에서, 최대한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판단하고, 때로는 손에 피를 묻히기도 하는 어른으로 그려진다.

나우시카는 이전 시대의 종말을 기획한 이들과 마주한다. 그들은 세상의 멸망을 인류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긴 이들이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의 시대가 끝이 나면 인류는 갱생할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나우시카는 고통과 슬픔은 인간의 일부여서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고통과 슬픔을 껴안고 윤리를 발명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일이다. 인류라는 종이 남아 있는 한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명절에는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정말 세상이 망해서 명절이 없어지면, 그땐 읽을 시간이 안 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중림동 새우젓 (팀명)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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