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밀담 나눈 그 중국집, 이제는 없어

2015. 9. 10. 15:5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신중화요리 시대

한국 중식사는 화교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중식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곡금초, 후덕죽, 왕육성, 이연복, 여경래, 여경옥 등의 요리사들은 모두 화교다. 화교의 삶이 날실과 씨실로 교차하면서 우리 식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 한국의 중식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와 함께 온 산둥성의 상인들이 점포를 열면서 시작됐다. 원로 화교요리사인 추본경(66)씨는 "산둥성 복산(푸산) 출신의 요리사들이 많아 초창기 한국의 중식은 '복산파'가 좌지우지했다"고 말한다.

과거 박정희 정권은 화교들의 경제력 집중을 막고자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1961년), 화폐개혁(1962년), 중국음식점 쌀밥판매 금지(1973년) 등의 박해정책을 폈다. 현금을 좋아해 금고에 돈다발을 쌓아뒀던 화교들의 피해가 컸고, 중국집의 매출도 감소했다. 한국에서 화교는 외국인으로 분류돼 국가고시 등에 응시할 수 없었다. 선거권도 물론 없었다. 70년대 말 당시 문교부는 국내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대학입학 예비고사 응시 자격을 주지 않기로 해 한성화교고등학교 학생들은 체력검사까지 받고도 응시를 못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탄압받던 화교들이 생계대책으로 연 중국집들이 60~70년대 주로 정치인들의 밀담 장소나 접대를 위한 곳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요정집을 겸하는 곳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연 '대관원' '아서원' '태화관'과 1950년대 연 '대려도', 60년대의 '홍보석' 등은 수백 석을 확보한 화려한 식당이었다. 곰발바닥, 노루꽁지 같은 진귀한 재료가 나왔다. 회갑연이나 거창한 결혼식의 장소나 예술인들의 단골집들이기도 했다. 60년대 당시 신민당 당사에서 가까웠던 대관원은 주로 김대중, 김영삼, 김홍일 등이 다녔다고 추씨가 말한다. 아서원도 여당 인사들이나 비밀회합 목적인 정치인들이 자주 찾았다. 1925년 박헌영, 조봉암, 김재봉 등이 주축이 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대려도를 뺀 나머지 식당들은 70년대 고급 호텔들이 생겨나면서 하나둘 자취를 감췄고 매콤한 쓰촨요리도 이때 국내에 유입됐다. 이연복 셰프가 일한 사보이호텔의 '호화대반점'도 이때쯤 열었다. 대만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2세들은 중식당을 물려받지 않고 이 땅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빈자리를 한국인들이 채워갔다. 한국인 주인, 화교 요리사 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70~80년대 강남 붐이 일면서 생긴 '만리장성', '만다린', '중국성', '함지박' 등의 주인은 한국인이었다. 주방장은 추본경, 여경래 등 화교였다. 골목마다 배달 위주의 중국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예전 중식 주방장은 일의 구분이 확실했다. 칼판, 불판, 면판으로 나눠져서 각각 대장이 있었다. 칼판장은 채소, 고기류 등 온갖 재료를 빠른 손놀림으로 자르고, 불판장은 칼판장의 지시에 따라 튀기고 볶았다. 면판장은 면을 뽑고 밀가루로 각종 디저트를 만들었다. 재료 구입까지 했던 칼판장은 총감독으로 서열이 최고 높았다. 언제부터인가 면판장이 사라지더니 이제 구별이 없어졌다.

흔히 중식은 재료의 계량과 조리법을 외워서 배우는 요리가 아니라고 한다. 뜨거운 불 앞에서 몸으로 익히고 몸이 기억하는 요리다. 오는 10월 케이블채널에서 선보이는 요리 프로그램 <중화대반점>을 연출하는 옥근태 피디는 "40년 넘게 주방을 지킨 이들 화교 요리사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박미향 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김무성 칼춤'에 홀린 새정치 내년 총선 80석은 건질까송아지 24마리 팔아 졸업하니 백수…'헬조선'의 대학생들[영상] 아이 안고 탈출하는 난민 발 걸어 넘어뜨린 여기자[화보] 최고의 소방관은 누구?…세계 소방관 대회 현장[그림, 마음을 읽다] 가족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그림들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