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수포자'를 위하여 / 박용현

2015. 8. 2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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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국·영·수를 음악으로 대체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학생들은 오선지 가득 그려진 음표를 베끼고 조바꿈을 수없이 연습한다. 초등 3학년쯤이면 5도권을 외우고, 입시를 위해 화성법, 대위법, 푸가를 섭렵한다. 그런데 정작 노래, 악기 연주, 음악 감상은 하지 않는다. 음악의 본령인 이 심미적 체험은 기초를 철저히 다진 뒤에야 가능하다며 대학 이후로 미뤄진다. 미국의 수학 교사이자 연구자인 폴 록하트는 '한 수학자의 탄식'(A Mathematician's Lament)이라는 글에서 지금의 수학 교육이 꼭 이 모양이라고 탄식한다.

그는 "수학은 예술"이라고 한다. "아이들 마음속의 놀이터"라고 한다. 가장 순수한 질료인 상상을 주물러 우아한 질문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창조적인 해답을 입히는 아름다운 유희라는 것이다. 수학의 문외한으로서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초보적인 예시를 통해 어렴풋한 감은 얻을 수 있었다.

직사각형이 있다. 윗변의 어느 한 점과 밑변의 두 끝을 연결한 삼각형을 만든다. 이 삼각형은 직사각형 전체 면적의 얼마를 차지할까? (이미 답을 아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답을 찾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실마리는 단순하다. 삼각형의 위쪽 꼭짓점에서 수직으로 선을 하나 내려긋는다. 이로써 모든 게 선명해진다. 직사각형은 두 개로 나뉘었고 각각의 직사각형은 삼각형의 두 변에 의해 반씩으로 나뉘어 있다. 정답은 1/2. 그러나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다. 선 하나를 내려긋는 발상, 이것이야말로 수학의 아름다움이고, 시인이 찾아낸 반짝이는 시어, 작곡가가 떠올린 기막힌 선율 같은 것이다. 록하트는 수학 공부가 이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수학은 이렇다. A=1/2bh. 삼각형의 면적(A)은 밑변(b)과 높이(h)를 곱한 것(직사각형 면적)의 1/2이다. 문제를 설정하고 해법을 발견하는 심미적·창의적 체험은 제쳐둔 채 결론이 공식으로 제시된다. 공식을 외우고, 연습문제를 풀고, 더 꼬아놓은 연습문제를 풀고, 또 푼다. 입시와 사교육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이런 불모의 수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그 결과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1~2위를 다툰다. 반면 노벨상 수상자는 (평화상 빼고) 한 명도 없다. 초·중·고생 절반이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다. 수학은 가장 고통스런 과목이 됐다.('수학 고통 줄이자' 시리즈 참조)

"그러니 수학 교육을 바꾸자"고 하면, 필시 되묻는다. "그 방향이 맞다고 치자. 평가는 어떻게 하지?" 수학이 입시에서 가장 변별력 있는 도구로 사용되는 탓이다. "그럼 입시 제도를 바꿔보자"고 하면, 득달같이 되묻는다. "대안이 있나?" 없다. 선뜻 답이 보이지 않는 난제다. 하지만 정답이 나와 있어야만 문제를 풀기 시작하겠다는 건가. 창의적인 발상으로 미지의 답을 찾아가는 지적 모험은 지레 포기한 채, 공식과 사지선다형 답안이 주어지기만 기다리는 이런 태도는 무척 낯익다. 바로 우리가 지겹도록 반복해온 수학 문제풀이 방식이다. 배운 게 어디 갈 리 없다.

무리수라는 기상천외한 숫자는 피타고라스가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주어진 공식 없는 문제와 대면할 때, 숨겨져 있던 놀라운 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답은, 무리수가 수에 관한 피타고라스의 관념을 뒤엎었듯,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일 수도 있다. 록하트는 "수학만큼 전복적인 것은 없다"고 한다. 수학이라는, 수학 교육이라는, 입시 제도라는 난해한 퍼즐을 푸는 비결도 모두 그 수학의 본질에 숨어 있지 않을까. 필요한 것은 오직 호기심과 열정, 창의적 모험, 그리고 불현듯 찾아올 아름다운 영감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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