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화 개방 17년, 러브레터 신화는 또 없었다

김재현 2015. 8. 1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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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러브레터' 한 장면

# “오겡끼데쓰까~와따시와 겡끼데스 (잘 지내나요? 전 잘 지내요)”

1999년 우리나라에 일본 영화를 알린 대표적인 대사다. 영화 '러브레터' 속 이 대사는 여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밭에서 외치는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 등 국내 방송에서 수차례 패러디됐고 이 장면을 그대로 따라 해 만든 CF도 있었다.

1999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러브레터는 전국 1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줬다. 1998년 우리나라가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한 지 1년 만에 드러난 성과였다.

직장인 김현주씨(31)는 당시 영화 러브레터에 빠져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김씨는 용돈을 모아 러브레터 비디오와 OST CD를 샀다. 그녀는 "러브레터 비디오를 20번 이상 돌려 볼 정도로 광팬이었다"며 "이 때문에 고등학교 제2외국어를 일어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후에도 '4월 이야기', '지금 만나러 갑니다', '철도원' 등 서정적인 분위기의 일본 영화를 놓치지 않고 관람했다.

하지만 지금 김씨는 일본 영화를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2000년대 초반 일본 영화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서 열심히 찾아봤지만 많은 작품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선함이 줄었다"며 "일부 개봉 작품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선뜻 보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 애니메이션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의 정보 게시판. 하루에도 여러 개의 애니메이션 관련 정보가 업데이트 된다

# 직장인 한진석씨(30,가명)가 퇴근 후 집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일본 애니메이션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일이다. 한씨는 10년째 이 커뮤니티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정보를 얻고 있다.

신작 애니메이션 소식부터 캐릭터 소개, OST, 심지어 일본 성우 정보까지 애니메이션과 연관된 콘텐츠는 그 커뮤니티로 모인다.

대학 시절 애니메이션 '에반겔리온'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했다는 한씨는 여전히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한씨는 '명탐정 코난', '도라에몽'과 같이 어린이들을 겨냥해 방학 기간에 개봉하는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놓치지 않고 본다.

그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야기만이 아니라 영상미가 뛰어나 한번 빠지면 쉽게 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며 “계속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고 있고 작품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는 이들도 많아 팬층이 나름대로 두껍다"고 말했다.

◆ 한국 속 일본 문화, 어떻게 변했나?

우리나라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다. 영화, 극장용 애니메이션, 만화, 방송(드라마), 게임 등 일본의 문화 콘텐츠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첫 개방 후 17년이 지난 지금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나라의 반응은 분야별로 매우 상반된다.

1990년대 후반 일본 대중문화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줬던 영화 분야는 현재는 사실상 비주류 문화로 침체됐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일본 영화 수입액은 2006년 450만 달러에서 2008년 608만 달러로 증가했지만 2013년에는 312만 달러로 반 토막 났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14년 영화 관객 가운데 일본 영화 점유율은 1.3%에 불과하다. 지난해 총 217편의 일본 영화가 개봉했지만 관객은 273만 명에 그쳤다. 1편당 관객이 채 2만 명이 되지 못했다.

2006년 37편의 일본 영화가 개봉해 395만 명의 관객을 모았던 때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해에는 역대 일본 영화 국내 흥행 5위와 6위인 '일본침몰'(94만 명)과 '데스노트1'(77만 명)이 개봉했다.

▲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한 장면

일본 영화 국내 흥행 1위는 2004년 개봉작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301만 명을 모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년)과 '벼랑위의 포뇨'(2009년)는 각각 200만 명, 15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뒤를 이었다. 4위가 러브레터다.

2010년 이후 관객 10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일본 영화는 없다. 관객 5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일본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화인 '명탐정 코난' 시리즈 3편뿐이다. 극장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일본 영화는 한국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는 데 실패했다.

더구나 최근 5년간 개봉한 895편의 일본 영화 가운데 351편은 성인 에로물이다. 일본 영화 콘텐츠의 질적 저하를 보여준다.

정헌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일본 영화 가운데는 국내 정서와 달라 경쟁력이 없는 작품이 많다"고 설명했다.

김영덕 한국콘텐츠진흥원 연구원은 "최근 들어 대부분 영화 부문 투자가 한국과 미국 영화에 이뤄지고 있어 일본 영화의 입지는 매우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은 드라마 등 일본 방송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2008년까지 국내 케이블 TV를 통해 방영됐던 일본 드라마 가운데 1%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은 고작 2편(고쿠센1·2)이다. 거의 모든 일본 드라마는 국내에서 큰 반향 없이 종영됐다.

일본 방송 프로그램의 입지가 줄어들다 보니 관련 수입액도 급감하고 있다. 2008년 1227만 달러였던 일본 방송 수입액은 2013년 658만 달러로 급감했다.

김영덕 연구원은 "온라인에서 미국, 중국 등의 방송 콘텐츠를 쉽게 접하게 되면서 일본 콘텐츠로 쏠렸던 관심이 점차 분산됐다"고 말했다.

더해 일본 드라마가 정식 수입돼 케이블 TV에서 방송되지만 여전히 대다수 작품이 온라인을 통해 소비되는 것도 낮은 시청률의 원인으로 꼽힌다.

◆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서도 막강한 영향력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극장과 TV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액은 2006년 500만 달러, 2008년 608만 달러, 2013년 652만 달러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꾸준한 인기를 확보하며 국내 애니메이션 채널 편성의 절반 이상을 맡고 있다.

어제 날짜(9일) 만화 전문 케이블 채널인 투니버스, 애니박스 등의 편성표를 보면 24시간 가운데 12시간 이상이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져 있다.

6세, 4세의 두 아들을 키우는 윤희정씨(39,가명)는 “아이들 때문에 애니메이션 채널을 켜놓고 있는 시간이 많다”며 “요괴워치, 짱구는 못말려 등 일본에서 만든 작품에 쉽게 접한다"고 했다.

다만 윤씨는 “일본 애니메이션 가운데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듯한 내용의 작품도 많다고 들었다”며 “너무 무분별하게 일본 문화에 노출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함께 일본 문학도 국내 시장에서 큰 존재감을 나타낸다. 일본 출판 콘텐츠 수입액은 2013년 4862만 달러로 영화, 게임 등 다른 분야보다 월등히 많았다.

이달 4일 기준 한 대형서점의 외국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1~10위 가운데 3개 작품이 일본 소설이었다.

만화(책) 콘텐츠 역시 국내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만화 콘텐츠 수입액은 2006년 342만 달러, 2008년 543만 달러, 2013년 638만 달러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4일 기준 대형서점의 만화 분야 베스트셀러 1~10위는 모두 일본 작품이다.

◆ “일본 문화 영향력, 언제든 커질 수 있는 구조”

개방 후 17년이 됐지만 일본 대중문화가 국내에 끼친 영향은 애초 우려보다 작다. 이는 방송, 영화 등 영상 콘텐츠가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원 소스 멀티 유즈' 방식이 발달된 일본 문화의 특성상 언제든지 그 영향력이 커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김영덕 연구원은 "일본 문화는 만화 작품이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으로 유형을 바꾸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돼 있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만큼 언제든지 일본 대중문화가 확산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아직 국내에 개방되지 않은 일본 대중문화는 예능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반일 감정 등을 고려할 때 오락성과 선정성이 지나치게 높은 일본 예능 프로그램을 개방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현재 이를 개방하기 위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분야를 개방한다고 하더라도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헌일 연구원은 “일본의 토크쇼 등 예능 프로그램은 국내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많아 추가 개방을 하더라도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며 “단지 마니아 중심의 문화가 형성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김재현기자 (hono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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