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위로·예술 '양림 정신' 담긴 동네 사랑방 엽니다"

2015. 8. 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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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광주 양림동 한옥미술관 개관 한희원 화가 시인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간판이 보였다. 흰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로 '한희원 미술관'이라고 적혀 있다. 광주시 양림동 최승효가옥(민속자료 2호) 인근 155㎡(47평)짜리 옛 한옥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화가 한희원(60)씨는 4일 "골목길 안에 서민들의 삶과 연관되는 예술적인 공간들이 많이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옥 서까래를 그대로 살린 미술관엔 그의 고향인 양림동의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 걸려 있다. 건설현장의 철제 구조물을 살려 만든 탁자도 놓여 있다. 지역 문화계에서 "큰 산처럼 품이 넓은 호인이요 최후의 로맨티스트"로 불리는 그는 그림 속에 시를 표현하고 실제 시도 발표해온 "화가 시인"이다.

춘원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 아버지큰아버지 한경직 목사 따라 '월남'교사로 일하며 50년 전 양림동 정착지식인·예술인 많은 근대문화유산5년째 마을 축제 직접 기획·운영도"5월광주정신 예술로 꽃피는 공간"

-왜 양림동 골목길에 미술관을 열었는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양림동에서 살았다. 광주 송정동에서 태어났지만 이 동네가 고향인 셈이다. 아버지(고 한이직)가 평양 출신이다. 고 한경직 목사가 큰아버지다. 아버지는 이광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한국전쟁 전 광주로 온) 아버지는 교사로 일했다. 담양, 함평, 광양, 나주 등지로 전근을 다니다 양림동에 정착했다. 근처 학강초와 숭일중, 숭일고를 다녔다. 광주에서 기독교를 통해 처음 근대화가 시작된 곳도 이 동네다.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이 많이 살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들 가운데 '양림동 언덕 위의 교회'(양림 웃교회) 출신들이 많다. 사랑과 위로, 예술이 '양림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양림정신이 배어 있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사랑방을 만들고 싶었다. 서민들이 가까이서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동네 미술관의 의미는 무엇인가?

"광주비엔날레나 아시아문화전당이 잘 되려면 '실핏줄 문화'가 활발해야 한다. 골목길 안 예술공간이 대표적 사례다. 정율성, 김현승 등 양림동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작은 음악관이나 문학관이 먼저 들어서길 바랐다. 근대문화유산 마을다운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대인시장 등에도 작은 규모의 예술공간이 퍼져가는 마중물이 됐으면 좋겠다.

-양림동 마을 축제를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더디게 가더라도, 돈만 버는 축제는 아니었으면 했다. 관에서는 개발 위주로 가고, 주민들은 상업적 이익을 더 바라고, 전문가들에게만 맡기면 마을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세개의 축이 모여서 협의해 마을을 살려가야 한다. 2011년부터 술과 음식이 없는 동네 축제를 5년째 기획해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만명이 다녀갔다. 먹고 마시는 것을 배제하고 인문과 예술의 축제로 정착시키고 싶다."

-고교 때 태권도를 했다는 게 의외다. 그림과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숭일고 때 시작해 '인생을 걸고' 운동해 3단까지 땄다. 싸움하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시내에서 노는 애들도 우린 안 건드렸다.(웃음) 그런데 졸업하고 나니 붕 떠버렸다. 문인적인 기질의 집안에서 나만 '똘것'(별종)이었다. 재수하면서는 국문학과를 꿈꿨다. 시를 쓰고 싶어 혼자 습작도 했다. 정작 한 명만 떨어지는 철학과를 지망했는데, 그 한명이 나였다.(웃음) 대학생이던 누나가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고 했다. 고 오승윤 화백의 화실을 찾아가 처음 그림을 만났다. 1년간 심취해서 그렸다. 그리고 조선대 미대에 진학했다."

한씨는 "무엇이든 한번 빠지면 어영부영 않고 미치도록 파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적부터 책을 가까이 했다. 피아노 반주도 혼자 익혔다. 양림교회 청년부장을 하면서 생각의 틀을 갖췄다.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 양림교회 지하에서 가난한 민중들의 모습을 그린 대형 작품은 '민중미술의 시초'라는 평가도 받는다. 88년 창립된 광주미술인공동체(광미공)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주로 민중미술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트럭에 그림을 싣고 장터를 돌아다니며 전시를 했다던데?

"'시대는 힘든데 왜 화가들은 이쁜 풍경이나 꽃만 그릴까?'하고 고민했다. 81년 제대하고 순천여상 교사로 부임해 10년간 근무했다. 그때 '찾아가는 미술관'을 시작했다. 트럭에 그림을 싣고 광양과 화개장터, 구례장과 순천의 아랫장 등지로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장터전'을 3년동안 했다. 최초의 '움직이는 미술관'이었다. 하지만 걸개그림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리얼리즘을 하더라도 예술적인 향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적인 민중미술'을 하려고 했다."

-앞으로 뭘 그리고 싶나?

"바람, 나무, 별, 마을, 길, 강 등 가장 평범한 소재를 깊게 그리려고 한다. 91년 광주상고로 옮겨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유화에 몰두했다. 내면의 세계를 되돌아보고 싶었다. 대학 졸업 14년만인 93년 트럭 3대에 그림 150점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 첫 개인전을 했다. '시적인 느낌과 광활하고 쓸쓸한 고독이 배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지금 붓의 터치는 약간 달라졌지만, 죽음, 절망, 아픔, 환희 등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앞으로 80년 5월을 소재로 단단한 예술성이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 (062)653-5435.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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