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역사르포](23)남영동 대공분실~연세대.. 박종철·이한열, 6·10항쟁 불씨가 되다

2015. 7. 2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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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고등학교 시절인 1976년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학교가 있는 용산역까지 통학했다. 그 중간 남영역 앞에 한 건물이 신축 중이었다. 검은 벽돌로 창문도 좁게 짓는 이 건물은 마치 토치카를 쌓는다는 느낌을 줬다. 물론 이 건물이 무슨 용도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도 몰랐다. 이 건물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한참 후다.

1987년 1월 15일 한 신문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으로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라는 2단짜리 기사가 실렸다.(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이 기사는 제5공화국 보도지침을 뚫고 신문에 실렸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된 것은 1월 13일 밤. 수배된 대학선배의 소재를 대라며 혹독한 물고문이 계속됐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최근 발간된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씨의 회고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검을 마친 후 황적준은 안상수(담당 검사)에게 말했다. ‘질식사입니다. 물고문 같습니다’… ‘온몸에 피멍자국이 많아, 두피에도 피멍이 있고’… 경찰은 허위 보고서 작성을 요구했다.… 황적준은 16일 하루 내내 고민하다 그날 밤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의로운 아빠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송기역, 유월의 아버지, 2015년)

유명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철저히 피의자를 위축시키기 위해 설계된 ‘흉기’이다.

정교하게 지어진 공포스러운 ‘흉기’

이곳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후에 국회의원) 김근태를 고문한 장소였다. 김근태는 이곳 경험을 <남영동>이라는 책으로 남겼고, 이를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 1985>로 영화화했다. 하지만 1948년 10월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시작된 이곳이 김근태만을 고문한 곳이었을까. 고문으로 조작된 많은 간첩사건의 상당수는 이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이 건물은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자는 이 건물이 ‘작품’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이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흉기’다. 검은 벽돌건물에 육중한 철문은 보는 순간부터 위협적이다. 조사실 5층 창문을 매우 좁게 낸 것은 투신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1973년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창문으로 투신 자살한(중정의 공식발표)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례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건물 뒤 입구와 역방향으로 설치된 5층 조사실까지 원형 계단은 철저하게 피의자의 공간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들으며 철제계단을 오르는 피의자는 이미 절반쯤 의지를 상실했을 것이다.

박종철이 숨진 509호 조사실 내부이다.

5층 조사실에서 보면 복도 출입구와 14개 방 출입구는 크기와 모양이 똑같다. 한 번 들어오면 어디가 나가는 곳인지 알 수 없는 미로이다. 복도 끝에서 보면 일제가 지은 서대문형무소 감방 복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밖에 설치된 전기 스위치는 서대문형무소 감방마다 설치된 패통 모습 그대로다. 실내는 철제 방음시설로 둘러쳐져 있다. 인권에 무지하고 승진의 공명심에 불타는 경찰들은 여기서 폭행과 전기·물고문을 일삼았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물 외형은 물론, 입구에서부터 실내까지 정교하게 피의자를 시각적·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해 설계됐다. 폴란드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유태인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최적화된 시설이라는 점과 비슷하다. 천재 건축가라는 김수근이 이 건물의 용도를 몰랐을까. 그런 면에서 이 건물은 작품이 아니라 흉기다.

이곳은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도 보존하듯 이곳 보존도 잘한 것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한 직원은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관람하는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간혹 있고, 개인적으로 관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단체 탐방하면 안내를 맡고 있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전시관 운영주체가 경찰이기 때문에 휴일 개방을 하지 못해 일반시민들이 편리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면서 “단체 관람일 경우 경찰의 협조를 얻어 개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에서 열린 박종철 추도식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분노한 국민에 신군부세력의 ‘항복선언’

‘광주의 피’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과거 유신체제를 능가했다. 대학 시위자는 철저히 학원에서 내쫓았다. 1983년까지 3년 동안 대학생 1400여명을 제적했다. 단순 시위가담자도 ‘강제징집’으로 군대에 보냈다. 1983년 5월 18일 가택 연금 중인 김영삼은 ‘구속인사 석방과 제적학생 복교, 언론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8일 범민주세력을 망라한 정치결사체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만든 신민당은 창당 한 달 만인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학생 및 재야 노동계도 결집하며 힘을 키워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으로 통합했다.

1986년 2월 12일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권 재창출을 구상하던 신군부에게는 위협이었다. 전두환은 야만적인 학원 및 재야인사 탄압에 돌입했다. 1986년 10월 28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학생집회에서 1525명의 학생을 연행, 1259명을 구속했다. 정부수립 이후 단일사건으로 최대 구속사건이다.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장례식에 모인 군중들이 장례행렬을 따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1987년 1월 14일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박종철이 죽었다. 신군부세력에는 치명타였다. 민주세력은 ‘고문추방’ 이슈를 추가했다. 3월 3일 박종철 사십구재에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열렸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1987년 6월 10일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신민당을 포함한 모든 민주세력이 망라된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 시민대회’, 이른바 6·10대회로 맞불을 놓을 계획을 세웠다.

6월 9일 오후 2시 연세대학교 앞에서 ‘구출학우 환영 및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를 마친 1000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오후 5시,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직격으 로 날아 시위대 선두에 있던 학생 머리에 맞고 터졌다. 학생의 머리는 흐르는 피와 최루탄 가루가 범벅이 됐다. 그는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에 이어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국민의 분노는 더욱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경찰은 무차별 연행으로 맞섰지만 분노한 시민을 막을 수 없었다. 경찰의 최루탄이 다 떨어졌다. 6월 19일 청와대에서 군 최고회의가 열렸다. 제2의 5·18 광주 비극이 재연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극적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는 이른바 ‘6·29 선언’을 했다. 신군부세력의 ‘항복선언’이었다.

이한열 추도비는 2015년 6월 4일 새로운 기념비로 바뀌었다. ‘198769757922’라는 숫자는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은 1987년 6월 9일과 숨진 7월 5일, 그리고 7월 9일 장례식, 22세라는 의미다.

7월 5일 새벽 2시5분 이한열은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에는 8만여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기자는 당시 그 현장을 취재했다. 문익환 목사의 절규하는 추도사와, 정문에서 펼쳐진 무용가 이애주가 긴 삼베 가운데를 가르다 쓰러지는 ‘바람맞이 춤’이 생생하다. 이 춤에 대해 통일운동가 백기완은 “저 기가 막힌 울부짖음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춤이란 한낱 표현예술이 아니라 역사를 이끄는 힘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평했다.(이애주 한판춤 그림책, 1988년)

수백개의 만장을 앞세운 이한열 운구행렬은 서대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향했고,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추도했다. 시청 앞 노제 때, 서울시청 옥상에는 정상 태극기가 펄럭였다. 수만명의 시민들은 “조기” “조기”를 외쳤다. 결국 서울시청은 태극기를 조기로 고쳐달았다. 이한열은 고향 광주로 내려가 망월동 묘지에 묻혔다. 박종철이 경찰의 독촉으로 서둘러 화장돼 임진강 샛강에 뿌려진 것과는 달랐다.

정치인 분열로 ‘1987년 체제’는 미완

이한열이 숨지고 1년이 지난 1988년 9월 14일 총학생회는 학생회관 남쪽 작은 동산(한열동산)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에는 “여기 통일 염원 43년 6월 9일 본교 정문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님을 추모하고자 비를 세운다”고 썼다. 그러나 인조대리석 추모비는 27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올 6월 4일 통돌 모양의 기념비로 바꾸었다. 길이 약 4.5m 높이 약 1.4m의 육중한 보령산 검은돌에 ‘198769757922’라고 큼직하게 숫자를 썼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은 1987년 6월 9일과 숨진 7월 5일, 그리고 7월 9일 장례식, 22세라는 의미다. 그 옆에 납작한 통돌에는 LED 디지털로 현재 연·월·일·시간을 표시하는 시계가 있다. 현대적 감각이 가미되고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교차하는 느낌이다. 요즘 이곳 주변은 수십년된 백양나무를 베고 지하 할인매장과 쇼핑몰을 짓는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거기다 세브란스병원을 찾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철저히 자본만 넘쳐나는 느낌이다. 이한열이 꿈꿨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월 박종철에서 시작해 6월 이한열로 끝났다. 그러나 6월항쟁은 절반의 승리, 아니 절반의 패배였다. 민주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지만, 양 김씨가 분열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젊은이의 순교로 쟁취한 민주 승리를 기성 정치인의 분열로 신군부에 헌납하고 만 것이다.

6·10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체제’에 대한 이해다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성 정치인은 1987년 12월 양 김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정략적 이득만 앞세운다. 내각제 개헌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1987년 체제’의 결과는 권력구조에만 있지 않다. 양 김씨의 분열은 시민세력·노동·대학 운동권 등 총체적인 민주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분열된 민주세력은 1992년 대선에서 ‘신군부 동지’와 손을 잡았고, 199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예’와 연합했다. 진정한 6·10항쟁의 승리는 2002년 대선에서 겨우 이뤄냈으나 5년밖에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역사는 곧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6·10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체제’에서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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