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목받는 '바위섬' 가수 김원중 인터뷰 "금남로에서 살아남은 자의 빚, '광주정신' 노래하며 갚는다"

정희완 기자 2015. 7. 1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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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가수 김원중씨(57)의 히트곡 ‘바위섬’에 관한 트윗을 올렸다. “ ‘바위섬’이라는 노래, 가사에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난해시도 그런 난해시가 없고 초현실주의도 그런 초현실주의가 없다.” 이 트윗에 아이디 ‘July’가 댓글을 달자 황 교수는 사과 글로 답했다. “한국 현대사의 현실주의가 초현실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비아냥거렸던 말 용서를 빌어야겠다.”

‘July’가 쓴 댓글은 “선생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가요 ‘바위섬’은 ‘5·18 광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 ‘바위섬’의 ‘5·18 광주’의 은유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도 충격”이라고 했다.

‘바위섬’은 중년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부르는 노래다. 세대가 달라도, 제목은 몰라도 노래를 들으면 “아, 이 노래!”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많다. 황현산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이 노래를 아는 모두가 노랫말에 담긴 속뜻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시절을 풍미한 ‘유행가’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바위섬’이 ‘5·18 광주’의 은유라는 사실이 이번에 알려진 건 아니다. 1980년대 노래가 유행할 때 방송에도 나갔다. ‘바위섬’의 의미는 간헐적으로 언론에 언급됐다. 구전이 안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월이 ‘5·18 광주’를 희석시킨 때문일까. 김원중씨를 만나러 광주로 향한 이유는 ‘바위섬’에 얽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다. 인터뷰 섭외 때 김씨는 “옛 전남도청 앞에서 보면 좋겠다”고 했다.

1985년 1월 ‘바위섬’으로 방송에 데뷔하자마자 ‘대학생 스타’로 떠올랐을 때 그는 27살이었다. 30년이 흘렀다. 15일 광주 옛 전남도청 앞에서 만난 김씨의 귀밑머리는 하얗게 셌다. 목소리는 걸걸했다. 금남로를 바라보는 눈매는 화면과 사진으로 본 젊은 시절 그대로다. “계엄군들이 도청으로 가려는 대학생들을 금남로에서 마구 때렸죠.” 1980년 5월 전남대 학생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할 때 ‘바위섬’의 역사적 무게감을 조금은 버거워하는 듯했다. “나는 ‘딴따라’ 기질이 많아요. 그렇게 무거운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가 나를 고상하게 만들었을 뿐이에요.”

15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인근 ‘민주의 종’ 앞에서 가수 김원중씨(57)가 기타를 치고 있다. 김씨가 불러 큰 인기를 끈 ‘바위섬’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립된 광주를 의미한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소록도에서 ‘5·18 광주’를 보다

“음악을 깊이 고민하고 접근한 게 아니었다. 유희, 그 이상도 아니었다. 음악이라기보다 놀이였다.”

1980년 봄 2학년이던 그는 대학 합창단과 밴드 ‘로터스’에서 활동했다. 공부보다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게 좋았다. 그의 말대로 ‘속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김씨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었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폭력의) 상황을 눈으로 봤다면 누구나 함께했을 것이다.” 5·18 당시 광주에 군을 투입한 전두환 정권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 ‘빨갱이’로 몰았다

이듬해 입대하고도 그는 ‘광주의 폭도’로 여겨졌다. 최전방에서 선임들은 “너희(광주)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며 김씨를 때렸다. 제대 후 ‘광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복학을 준비하던 김씨는 사직공원에 있는 라이브 맥주집 ‘크라운 광장’에 자주 갔다. 광주에서 ‘음악 좀 한다’는 젊은이들이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쟁쟁한 선배들을 만났다.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은 박문옥씨, 가톨릭 생활성가의 ‘조용필’로 불린 김정식씨(로제리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씨 등. 거기엔 조선대 배창희씨도 있었다.

어느 날 함께 ‘놀던’ 배씨가 ‘바위섬’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왔다. 배씨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갔다가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고립된 섬의 모습이 마치 5·18 당시 광주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5·18 당시 계엄군은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광주에서 나갈 수도, 광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김씨도 배씨의 말에 공감하며 곡을 불렀다.

당시 지방에서 음반을 만든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음반에 관한 모든 것은 서울로 통했다. 지방에서 음반을 만들지 말란 법이 있나라고 생각했다. 1984년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을 냈다. LP판 표지도 자기들 손으로 그렸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만든 최초의 음반이다. 당시 음반 제작은 ‘집 팔고, 소 팔고’ 해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음반이 나오면 ‘로또’ 맞은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하던 시기였다.” 음반에 막내로 참가한 김씨는 ‘바위섬’을 불렀다.

■ 대학생 스타 가수로 부상

“처음부터 가수가 되려고 한 건 아니다. 대학가요제 무대에 오른 적도 없다. 그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 힘’으로 음반 한번 내보자는 데 한몫 보탠 거다. 일종의 기념음반이었다.” 김씨 등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음반을 돌렸다. ‘로또 맞은’ 이들의 음반은 연일 지역의 전파를 탔다. ‘바위섬’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다. 김씨도 덩달아 유명세를 치렀다. 1985년 1월7일, 김씨는 서울 라디오에 출연하며 방송에 데뷔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에서 ‘5·18 광주’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였다. 1981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정오차씨는 ‘바윗돌’이란 노래로 대상을 탔다.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씨는 ‘바윗돌’의 의미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이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5·18 민주열사’의 넋을 기리는 노래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방송을 탄 셈이다. ‘바윗돌’은 바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김씨도 첫 방송부터 내놓고 ‘바위섬’의 의미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나는 광주 출신이라는 점은 강조했다”고 했다. 개인 공연이나 사석에서는 ‘바위섬’이 ‘5·18 광주’라고 전했다. 방송에서도 기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루는 방송에 출연한 김씨에게 “바위섬의 의미가 뭐냐”고 사회자가 물었다. “80년 5월 당시 광주의 모습이다.” 김씨는 이후에도 몇차례 바위섬의 숨은 뜻을 전했다. 사회자들은 그 말을 듣고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금지곡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김씨는 “관리자들이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든가, 아니면 제가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바위섬’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를,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1985년 KBS의 ‘좋은 가사’ 후보에 올랐다. 각종 행사에 다니며 활발히 활동했다. 가수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 부채 의식 그리고 사명감

‘바위섬’ 이후 1987년엔 ‘직녀에게’를 발표했다. KBS에서 방송 금지 처분을 내렸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빌려 통일을 바라는 내용의 가사 때문이다. 시인 문병란씨의 동명의 시를 옮겼다. 이후 김씨는 3년 동안의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 음악·방송계 상업 시스템이 그의 몸에 맞지 않았다.

광주에 대한 부채 의식도 지울 수 없었다. 김씨는 5·18 금남로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참혹한 현장을 피해 광주 동구에 있는 외가로 달아났다. 살아남은 자신을 지금도 힘들어한다.

“인생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그때 기억이 영향을 끼친다. 자유로울 수 없다. 부채 의식과 더불어 어떤 나름의 사명감 같은 게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광주로 돌아온 그는 노래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1989년 5·18을 추모하며 혼자 거리 공연을 했다. ‘상록수’ ‘타는 목마름으로’ ‘광주출정가’ 등을 불렀다. ‘보통사람’을 자처하는 군부 출신의 독재 권력의 폭압은 1987년 민주화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시 거리 공연은 꿈도 못 꿨다. 백골단에 걸리면 맞기도 하는 시대였다”고 김씨는 말했다.

광주에선 가능했다. 시민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1990년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 장용주 신부가 금남로에 있을 당시 가톨릭센터(현 5·18기록관) 앞마당을 내줬다. 광주 지역 가수들과 함께 추모 공연을 벌였다. 전국에 있는 가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실내에서 이뤄졌던 추모제가 거리로 나오게 된 기폭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자평한다.

1997년에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49일 동안 노래를 불렀다. 2010년 5·18 30주년을 기념한 음반을 냈다.

■ “5·18이 없었다면…”

“ ‘바위섬’이 ‘히트’를 쳐서 가수가 됐다. ‘언더’에서 10년씩 고생을 하며 쌓은 내공 같은 게 없었다. 사람들이 좋아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가수가 되니 밑천이 없었다. 나중에 노래를 하면서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다. 이젠 음악을 좋아하면서 두려워한다.” 김씨는 마흔살까지도 음악을 계속할지 고민하다 결국 음악을 택했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데뷔 30주년 기념 음반을 제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일생의 업으로 가수를 택했을 때도 ‘광주정신’을 놓지 않았다.

2002년 8월부터 49일 동안 49개 도시를 돌며 ‘잘가라, 지역감정’이란 공연을 열었다. 마지막 날 각 지역의 소주를 한데 섞어 마시는 퍼포먼스도 했다. 전국 공연에 가수 80명과 시인 150명이 참가했다. 2003년부터 2년간 매달 북한에 빵 공장을 짓기 위한 모금 공연을 했다. 빵은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된다. 2010년 남북 간 인적·물적 교류를 중단한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이후 저항의 뜻으로 다시 공연을 시작했다. 각종 집회·시위 현장에도 가 노래를 부른다.

‘5·18 광주’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이기도 하다. 김씨는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오는 ‘5·18은 좌빨, 전라디언 간첩들이 선동’이라는 식의 글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한다. “나는 누가 시켜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간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5·18 추모제에 예전만큼 많은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 같다”는 사진기자의 말에 김씨는 말 없이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바라봤다. “5·18 같은 희생을 겪고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가슴 아픈 일이다.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이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누가 아는가, 5·18이 없었으면 지금도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있을지….”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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