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뉴스]노래 '바위섬'은 고립된 섬, '5·18 광주'

정희완 기자 2015. 7. 1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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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바위섬’이라는 노래, 가사에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황 교수는 “난해시도 그런 난해시가 없고 초현실주의도 그런 초현실주의가 없다”고 했다.

198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가수 김원중씨의 노래 ‘바위섬’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자 트위터 아이디 ‘July’는 “선생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가요 ‘바위섬’은 5·18 광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는 글을 올렸다.

황현산 교수는 “결국 한국 현대사의 현실주의가 초현실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비아냥거렸던 말 용서를 빌어야겠다”며 “‘바위섬’의 ‘5·18 광주’의 은유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도 충격”이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권혁웅 한양여대 교수도 “이현세 만화에 해왕도의 비극이란 작품이 있는데 그 내용이 바위섬 가사와 일치한다”며 “이 만화가 노래(바위섬)보다 먼저 나와서 저는 만화를 노랫말로 옮긴 것 아닐까 생각했다”고 적었다.

김원중씨 ‘바위섬’ | 유튜브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 인적 없던 이곳에 /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1984년 나온 가수 김원중씨의 ‘바위섬’은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중년들은 그 노래를 기억하고, 부른다. 세대가 달라도, 제목은 몰라도 노래를 들으면 “아, 이 노래!”라며 고개를 끄덕일 만큼 대중에게 알려진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를 아는 모두가 노래에 담긴 속뜻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시절을 풍미한 ‘유행가’ 정도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 바위섬은 ‘고립된 섬’ 5·18의 광주

“음악이라기보다 놀았죠”

1980년 5월18일 당시 김원중씨는 전남대 2학년이었다. ‘운동권’은 아니었다. 공부보다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게 좋았다. 그의 말대로 ‘속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김씨도 5·18 현장에 있었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눈으로 봤다면 누구나 동조했을 것이다”

김원중씨는 지역 선후배들과 만든 그룹사운드 ‘로터스’에서 활동했다. 5·18이 지나고 군을 제대한 김씨는 복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함께 ‘놀던’ 조선대 배창희씨가 ‘바위섬’이라는 노래를 들고 왔다. 배씨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갔다가 곡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고립된 섬의 모습이 마치 5·18 당시 광주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 당시 계엄군은 외부로부터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키는 작전을 폈다. 광주에서 나갈 수도, 광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김원중씨도 배씨의 말에 공감하며 곡을 불렀다.

당시만 해도 서울이 아니면 음반을 만들기 어려웠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음반에 관한 모든 것은 서울로 통했다. 김원중씨와 그의 동료들은 광주에서 음반을 만들기로 했다. ‘왜 지방에서는 음반을 만들 수 없을까’ ‘다양성 측면에서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1984년 김원중씨를 비롯해 광주에서 ‘노래 좀 한다’는 이들이 모여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을 냈다. LP판 표지까지 자기들 손으로 그렸다. 지역에서 만든 최초의 음반이다. 김원중씨는 이 음반에 막내로 참가해 ‘바위섬’을 불렀다.

출처 | 김원중씨 홈페이지

처음부터 가수가 되려고 한 건 아니다. 대학가요제 무대에 오른 적도 없다. 그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 힘’으로 음반 한번 내보자는 거였다. 일종의 기념음반이다. 그런데 ‘바위섬’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다. 김원중씨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며 1985년 방송에 출연, ‘대학생 스타 가수’가 됐다.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하에서 ‘5·18 광주’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였다. 1981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정오차씨는 ‘바윗돌’이란 노래로 대상을 받았다.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오차씨는 ‘바윗돌’의 의미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이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과 대척점에 있던 ‘5·18 민주열사’의 넋을 기리는 노래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방송을 탄 셈이다. ‘바윗돌’은 바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찬 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 하얀 눈 맞으며 아픈맘 달래는 바윗돌 / 세상 만사 야속타고 주저앉아 있을소냐 / 어이타고 이내 청춘 세월속에 묻힐소냐 /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 한 맺힌 내 가슴 부서지고 부서져도 /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 웃어보자 (‘바윗돌’ 가사 일부)

김원중씨도 데뷔 방송에서 바위섬이 ‘5·18 광주’를 의미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방송에서 처음부터 내놓고 바위섬의 의미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방송에 나갈 때마다 ‘나는 광주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씨는 방송이 아닌 개인 공연 무대에서 바위섬의 의미를 소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바위섬’은 ‘5·18 광주’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바위섬’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김원중씨는 “관리자들이 제 말을 잘 못들었든가, 아니면 제가 얘기를 잘 (애둘러) 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바위섬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를,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바위섬’은 북한 사람들도 아는 노래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보면, 북한 평양 김일성 대학 젊은이들 사이에서 ‘바위섬’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출처 | 김원중씨 홈페이지

■ ‘부채 의식이자 사명감’1987년에 발표한 ‘직녀에게’는 KBS에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빌려 통일을 바라는 가사 때문이다. 가사는 시인 문병란씨의 시를 옮겼다.

이후 김씨는 3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왔다. 김씨는 “방송 세계에서 요구하는 규격에 잘 맞지 않아 조금 방황했다”고 말한다.

광주에 대한 부채 의식도 지울 수 없었다. 김씨는 5·18 금남로 현장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두렵고 참혹한 현장을 피해 달아났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신은 아직도 힘들다고 말한다.

“인생에서 어떤 일을 할 때도 그때 기억이 영향을 끼친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5·18 같은 희생을 겪고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부채 의식과 더불어 어떤 나름의 사명감 같은 게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각종 집회·시위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북한 어린이들에게 빵을 보내기 위한 모금 공연도 연다. 2010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을 기념하는 음반을 냈다.

김원중씨는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유통되는 ‘좌빨, 전라디언 간첩들이 일으킨 5·18’이라는 글을 보면 답답하고 가슴이 먹먹해 진다고 한다. “나는 누가 시켜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간첩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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