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화책을 보았던 곳도 치과

2015. 7. 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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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이나라의 풍경의 감각] 계단에서 넘어져 찾게 된 대형병원 응급실과 동네 치과… 사람을 고치는 것은 마주 보고 앉은, 지척에 있는 사람

중동 호흡기 질병의 감염자가 급속하게 늘어나던 유월 초 일요일 오후, 동네 카페 계단에서 넘어진 나는 병원 응급실 신세를 졌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일요일 오후에 벽돌 바닥과 앞니 사이에서 입술이 슬쩍 찢어지고, 앞니 둘도 나란히 부러진 탓에 강 건너 목동에 있는 대형 병원에 가서 간단한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

긴장과 공포 아닌 지루함과 무료함

모두들 감염의 원흉으로 여겨진 병원을 기피하고 두려워한다고 언론이 보도했지만, 막상 일요일 저녁 대형 병원 응급실에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과 깁스를 한 아이들, 링거를 꽂은 이들, 이들의 보호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위급하지 않은 환자가 많이 내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한국 대형 병원의 응급실, 특히 일요일 저녁의 응급실은 대개의 시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투의 장소이기보다 무료한 대기의 장소다. 몇몇 사람이 마스크를 하고 있는 모습이 평소와 다르긴 했지만, 이미 병원에 오기로 마음먹을 만큼 아프거나 불편한 사람들은 어서 진료를 받고 바이러스가 가득한 응급실 대기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니 이는 긴장과 공포감의 외양이라기보다 지루함과 무료함의 외양이었다.

턱 사진을 찍고, 입술 위로 붕대를 붙이고 앉아 치과의사의 진료를 1시간 남짓 기다리는 내내, 편안할 리도 무료하지 않을 리도 없었다. 나와 다른 대기자들은 청결함을 강조하는 하얀 플라스틱 의자 20여 개가 사열종대로 배치된 응급환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사열종대의 의자들 왼쪽에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맞은편에는 환자 진료 상황과 호출 상황을 알리는 전광판이 배치돼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여 기다리는 곳이면 어디에나 빠지지 않고 있는 텔레비전이, 응급환자 대기실에도 있었다. 무료한 응급환자 대기실 사람들이 위급한 응급실 상황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곳에, 어떤 이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왔고, 어떤 이는 부축을 받고 도착했다. 의식을 잃은 채 도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을 시위하며 들어서는 환자도 있었다. 팔에 응급 부목을 하고 실려 들어오던 아저씨 한 분은 응급실 입구에서 '다나까'체로 '진술'을 했다. 마스크를 한 의료진이 어떤 일로 왔는지, 어떤 병원을 들렀는지 묻자 "저는 괜찮습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굴러떨어졌습니다. 오른쪽 다리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왼쪽 팔에는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큰 소리로 브리핑을 했다. 발목에 하얀 붕대를 감은 앳된 남학생과 그의 보호자 친구는 연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단다. 오늘 온종일 다 버렸다, 너 때문에"라고 친구는 스마트폰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날리고,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휙휙 넘기다가 다친 친구를 채근하기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같이 뛰어다니다가 다친 친구 옆에 끝까지 붙어 있었다. 어느 아주머니는 전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지인의 치료 상황과 치료비를 설명했고, 아이 여럿은 칭얼대며 울었다. 그 사람들 위로 번호판의 번호는 계속 바뀌었고, 그 사람들 위에서 뉴스 진행자는 초조하게 전국의 환자 수를 읊었다.

대형 병원들이 경쟁을 하면서 의료기기뿐 아니라 건물 역시 점점 더 으리으리해졌다. 으리으리한 건물의 로비에는 수익을 내려는 체인점이 들어왔다. 병원 밥이 군대 배급만큼 맛이 없다는 소리도 옛날 소리가 되었다. 번화한 곳에서 볼 만한 최신 서양 디저트를 파는 체인점이 병원 안에서도 훤칠한 인테리어를 하고 영업하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뒤 응급실을 나서 카페 앞을 지나며 긴장감이 풀리니 디저트라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이러스들의 집산지에서 벗어나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좀더 많았다. 유행병 때문인지, 비싼 가격 때문인지, 병마와 간호로 모두들 식욕을 잃은 탓인지 유명한 디저트 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

믿을 사람 없으니 연을 대고 검색하고

그 다음주 깨진 이빨 치료와 수복을 위해 동네 치과 두 곳에 갔다. 오랜 외국 생활 탓에 다니던 치과가 없으니 동네 지하철역 근처 대여섯 개쯤 있는 치과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신식 건물에 자리잡고, 커다란 대기실 한쪽 구석에 스포츠 채널을 틀어놓았던 첫 번째 치과도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병원은 우리를 고쳐주는 곳이지만, 때로 떳떳지 않은 이유로, 환자가 아닌 이에게 고칠 필요를 강요하기도 한다는 사회적 인식에서 나도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래시장 진입로의 비교적 낡은 건물에 새로 들어선 치과 간판이 눈에 들었던 나는 더 규모가 작은 이 병원을 택했다. 해당 병원 블로그에서 이빨의 보존에 주력한다는 의사의 진료 철학을 읽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신 탓에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이리저리 연을 댄다.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각자의 기준으로 신뢰를 가늠한다. 경기도에 살다 남쪽 지방으로 이사 간 일흔 근방의 보수적인 친척 어른은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동네 치과 의사들이 "어느 학교 출신"인지를 언급했다. 인터넷을 활용한 정보 검색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젊은 세대는 병원의 평판을 검색한다. 나처럼 증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꼼꼼한 설명 유무를 신뢰의 근거로 삼는 이도 있을 것이다. 대형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지인에게 응급실에 다녀와서 요즘 대형 병원은 설명도 잘해주고 서비스가 좋더라고 하니, 환자마다 그도 다 다르단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이것저것 설명해주면 더 귀찮아하고, 알아서 다 척척 해주는 것을 선호한다고. 누구에겐 설명도 없이 겁만 주거나 메디컬 서비스라는 물건만 파는 모습으로 비치지만, 누구에겐 만능의 선생님으로 비치는 것이리라. 작은 동네 병원도 최신 기기와 건물의 크기, 값비싸 '보이는' 인테리어를 고집하는 까닭은 이를 신뢰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시술의 공포를 심하게 느끼고 울던 아이

이빨을 더 많이 깎고 뽑기보다 잘 치료해서 쓰라고 권하는 보수적인 의료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동네 치과는 소소했다. 의사 한 사람, 위생사 한 명이 전부인 작은 병원은 생긴 지 1년 정도 됐다는데, 접수대 뒤로 환자의 진료기록 파일이 깔끔하고 빼곡하게 비치돼 있었다.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 등장한 이후 도서관의 서지 종이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자취를 감춘 종이 기록카드 위에 위생사가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크지 않은 대기실에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밝은 색 소파 하나와 간이 의자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배치돼 있었고, 붙박이 책꽂이에 많지 않은 수의 서적이 꽂혀 있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만화책 <포켓몬스터>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내가 처음 도착한 날 작은 진료실에선 초등학교 남학생이 겁에 질려 기를 쓰고 울고 있었고 그 소리가 바로 옆 대기실로 다 넘어왔다.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울음을 멈추라고 재촉하고 의사는 아이를 구슬렸다. 입을 벌리고 누워 있어야 한다는 치과의 공포를 심하게 느끼는 축에 속하던 아이는 결국 울면서 치료를 포기하고 대기실로 나왔다. 내 건너편에 앉아 엄마에게 야단을 맞으며 침울해하던 아이를 보고 나는 못된 사람처럼 웃었다.

아이들이 많은 치과였다. 육아 커뮤니티에 아이들 진료를 꼼꼼하고 자상하게 본다는 소문이 나면서 아이 손님이 많은 모양이었다. 틀니를 하러 찾는 노인보다 인터넷 입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이 많은 병원이었다.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빠듯하게 늙으신 분들은 외려 새로 생긴 기관이나 물건을 판단할 정보력이 없으니 건물이나 장식, 상담사 고용에 비용을 지출하지 않는 신출내기 병원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큰 것, 번쩍이는 것이 좋다고 듣고 배웠던 이들은 우선 새 건물, 치과 이름 앞의 학교 이름, 광고 노출도, 병원 규모로 판단하는 데 익숙할 테다.

좁은 자리에 최대한 많은 수로 배치된, 대형 병원 응급실의 단방향의 의자에서 긴 시간 동안 대기하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지 못한다. 모두가 바라보는 텔레비전 속 인물이 무어라고 말을 한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곳에 필요한 효율적 좌석 배치가 있지만, 동네 병원이 모두 커다랄 필요는 없다. 국가가 전염병 방역에 실기를 거듭했던 까닭이 무엇인지, 의료 시스템의 문제는 무엇인지 모두가 질문을 던지는 시절이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 심지어 의료 서비스의 불평등도가 높다고 알려진 미국에 견주어도 공공병동 수가 턱없이 적다는 사실도 지적됐다. 공공병동보다 훨씬 많은 민간병동, 병원과 의원은 수도 적지 않음에도 계속 새로 건물을 짓고, 새 기기를 사고, 크기를 불려가며 의료 서비스를 받을 소비자를 모집한다. 그러나 동네 병원이 환자의 상황과 환자 거주지 지역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에 바탕을 둔 진료를 수행하는 1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면 더더욱 동네 병원의 대기실과 진료실은 친밀함과 지속적인 상호 이해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몇 권의 책과 종이 기록 카드가 고마워라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던지는 문진에, 꽤 오래 걸리는 신경치료를 받고 나오니 아이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포켓몬스터>에 혼을 다 뺏긴 채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집에서 더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을 볼 테지만, 그 자리에서는 <포켓몬스터>가 최고로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어릴 때 내가 처음 만화책을 보았던 곳도 치과였다. 수십 년 만에 어릴 때 만화책이 수백 권 쌓여 있던 초등학교 앞 치과, 의사 아저씨, 위생사 언니들이 생각났다. 울지 않는 아이라고 예쁘다고 했던 어릴 적 기억이 나니, 이 예쁜 기억을 상기하도록 해준 우리 동네, 엘리베이터 없는 옛 건물에 새로 문을 연 작은 치과의 텔레비전 없는 작은 대기실,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의자들, 몇 권의 서적과 진료카드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병원 밖으로 나오면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재래시장 골목 빈대떡가게와 채소가게가 있다. 동네에 사는, 사람 좋다고 소문난 가수가 시장 근처 밥집 여기저기에 들른 덕에 이 가수의 친필 사인이 붙어 있지 않은 집이 없다. 입담 좋은 과일가게 주인에게 노란 참외를 샀다. 사람을 고치는 것은 마주 보고 앉은, 지척에 있는 사람이다.

이나라 이미지문화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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