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권분립 훼손하는 시행령]법 위의 '령'.. 꼬리가 몸통을 흔들다

박은하 기자 2015. 6. 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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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행규칙’으로 규정한 문신 때문에 경찰관 탈락 걱정 직업선택 자유 침해 당해 하위법이 상위법 왜곡

▲ 평생교육 위한 학점은행제 수강생에 수수료 챙긴 것도 부적절한 시행령 때문 국민 재산권 침해 지적 받아

지난해 6월17일 의료민영화 저지와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소속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의 의료법 시행규칙 폐기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일주일 전인 6월10일 병원의 영리사업 확대 등을 담은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5년 동안 군에서 특수부대원으로 복무한 ㄱ씨는 지난해 말 제대하고 경찰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 있었다. 왼팔에 새긴 문신이 문제였다. 경찰공무원법 제5조는 ‘응시자격, 시험방법, 그 밖의 시험 실시에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돼 있다. 그런데 경찰공무원임용 시행령은 신체검사를 할 것을 규정했으며, 시행규칙 제34조 제7항은 신체검사의 항목으로 시력 등과 함께 ‘문신’을 규정했다. “시술 동기, 의미 및 크기가 경찰공무원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문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신을 폭력조직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이 반영된 규칙이다. ㄱ씨는 “휴가지에서 패션으로 새긴 문신이 결격사유가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며 “비싼 돈을 들여 지워야 할지 고민이다. 지우더라도 혹시 그 사실이 발각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의 직업선택 자유를 박탈할지도 모를 이 조항이 경찰청이 만든 규칙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국회 법제실은 2011~2013년 제정된 법안 중 ‘부적절한 행정입법’ 사례 보고서에서 경찰공무원 시행규칙의 문신 항목을 들었다. 법제실은 시력과 달리 문신은 경찰의 업무수행과 직접적 연관이 없기 때문에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직업선택 자유가 부당하게 침해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부적절한 시행령의 대표적 사례다.

상위법의 내용을 왜곡해 입법 취지를 퇴색시키거나 부당한 내용이 담긴 시행령·규칙은 항상 있었다. 국회를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행정명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거나 세금을 사용할 근거를 마련한다면 국민주권의 원리를 훼손하게 된다. 국회가 행정명령 수정권한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을 마련한 이유다. 지난해 발간된 국회 법제실 보고서를 통해 대표적인 사례를 간추렸다.

■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시행령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교육부가 평생교육을 확대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학점은행제가 도마에 올랐다. 부실한 인증과 과도한 수수료가 문제였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직업전문학교 두 곳을 운영하며 수강생들로부터 수수료를 받아왔다. 수입은 등록된 학습자 수의 증가에 따라 2009년 75억원에서 2014년 109억원으로 45%나 증가했지만 대부분 진흥원의 인건비와 경상운영비 등으로 사용됐다. 문제는 학생들로부터 수수료를 징수할 근거가 ‘법’에는 없다는 점이었다. 수수료 징수는 학점인정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22조에 따른 것이었다. 법제실은 이 조항을 ‘내용이 부적절한 시행령’으로 분류하며 “법적 근거도 없이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상위법을 왜곡하는 시행령

환경단체 활동가 ㄴ씨는 국내 기업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알아보기 위해 정보공개 청구를 시도했지만 몇몇 업체들로부터 정보를 받지 못했다. 해당 업체가 정보 비공개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관한 법률’은 기업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보고하도록 규정했으며, “보고, 검증에 필요한 세부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행령은 “주무관청은 온실가스 배출총량 등 주요 정보를 할당대상 업체별로 공개할 수 있다”고 한 뒤 “다만, 할당대상 업체는 정보공개로 인하여 해당 업체의 권리나 영업상의 비밀이 침해될 우려가 있는 경우 비공개를 요청할 수 있다”는 부서조항을 달았다.

환경규제를 위한 법안에 피규제기관의 입장을 법적 근거도 없이 추가했다. 법제실은 “위임권한을 벗어나 국민 알 권리가 침해될 여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피해를 입은 주민의 생활 안정 등을 위해 제정된 ‘서해5도 지원 특별법’에도 입법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시행령이 포함돼 있다. 특별법 제12조 제1항은 “국가는 주민의 안정적인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서해5도에 주민등록법에 따라 주소가 등록되어 있고 일정한 기간 이상 거주한 주민에 대하여 정주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 법의 시행령 제7조는 “정주생활지원금 지급대상은 주민등록법에 따라 6개월 이상 서해5도에 주소가 등록되어 있고, 주소를 등록한 날부터 실제 거주한 기간이 6개월 이상인 주민으로 한다”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 즉 실제 거주기간이 6개월 이하면 백령도·연평도 주민이라도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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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관부처에 이익을 주는 시행령

2011년 서울대 법인화 과정이 진행될 때 서울대의 재산 문제가 쟁점이었다. 서울대는 전남 광양 백운산 휴양림, 지리산 노고단, 서울사대부설초 부지 등 막대한 국유재산을 교육·연구 목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서울대가 교육부 산하기관이 아니라 독립법인이 돼서 자산을 증여·매매할 수 있게 되면 이들 재산을 대학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은 제21조 2항에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의 재산 중 대학 교육·연구에 직접 사용되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은 매도 증여하거나 담보로 제공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시행령에서는 재산의 처분과 관련, 예외조항을 둬 길을 열어놓았다. 제9조에는 “학교 이전 또는 시설 노후 등 불가피한 사유로 인하여 교육·연구 용도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는 교육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교환하거나 용도변경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법제실은 상위법과 내용이 다르다며 “예외규정을 두더라도 법률로 뒀어야 한다”고 평했다.

수사대상에 오른 인물의 출국 요건을 정한 출입국관리법에도 문제가 되는 조항이 있다. 출입국관리법은 법무부 장관이 출국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명시했다. 시행령에서는 “출국금지는 법 제4조 제1항 또는 제2항에 따른 출국금지 대상자가 여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한다”는 조항을 달았다. 이어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유효한 여권을 가지지 아니한 경우에도 출국금지를 할 수 있다”고 부서조항을 달았다. 법에 규정돼 있지 않지만 출국금지의 범위가 더욱 넓다. “법무부 장관에게 과도하게 권한을 위임한 시행령”인 것이다.

■ 허술한 시행령

규칙 마련을 미루거나 부실하게 만든 시행령도 있다. 법제실은 ‘부작위’ 시행령으로 구분한다.

재가노인복지시설의 설치·운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노인복지법 제39조가 대표적이다. 39조는 “재가노인복지시설의 시설, 인력 및 운영에 관한 기준과 설치신고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시행규칙은 노인복지시설로 인정받으려면 필요한 인원 등을 규정했다. 복지사, 간호사 등은 ‘1명 이상’으로 돼 있는 데 반해 사무원, 조리원, 보조원은 ‘필요수’라는 모호한 조항으로 돼 있다. 관리감독기관 입장에서는 해당 복지시설이 보조원 등을 채용하지 않거나 턱없이 부족하게 채용해 시설 이용자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규율할 근거가 없게 된다.

기초연구진흥 및 기술개발지원에 관한 법률 제14조는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중략) 연구개발사업에 대해 다음 각 호의 기관 또는 단체와 협약을 맺어 연구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업단과 관련해 구체적 시행규칙이 마련되지 않았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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