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원의 에브리컬처]어린 시절 '그냥 노는 시간'의 중요함

2015. 6. 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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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체계적이지 않고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이 품고 있을지도 모를 엄청난 미래. 비록 어른들 눈에는 허송세월 같아 보이고 못마땅해 보일지라도, 그 자유로운 공백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얼마 전에 신호대기를 하던 중에 옆차의 옆구리에 적힌 문구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문제의 문구는 <등하교-등하원 전문업체 중 독보적인 국내 1위>였는데, 순간 나는 ‘학업에 지친 초·중·고생들을 대신해 등하교-등하원을 해주는 대리출석 전문업체가 있다니, 요즘 초·중·고생들 용돈 사정은 무척이나 풍요로운가보군…’이라는 감탄과 함께, 전혀 자랑할 것 못 되는 왕년 대학생 시절의 조잡한 추억 돋워 올리려던 중, 옆에 탄 동승자의 핀잔을 듣고는 착각을 즉각 정정하였다.

그랬다. 그 업체는 말 그대로 학생들을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옮겨주는 일종의 단체 운전기사 서비스 업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나의 놀라움은 해소되었던가 하면, 오히려 그 반대여서 경악의 단계로까지 격상된다. 세상물정에 그리 어두워서야, 츠츠…라는 핀잔과 함께 동승자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그런 업체가 성업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 대치동 어린이들이 학원 버스에 오르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오락실 게임 경험이 SF영화 만들어

세상물정에 어두워서 죄송하다.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 그런 괴이한 카인드오브 업종까지 있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었다. 과연 지금은 현실이 상상을 압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 비현실의 현실화 시대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하루였다.

그런데 꼭 그런 업체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OECD 국가들 중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노는 시간이 가장 적다느니, 행복도가 최하라느니, 가장 스트레스가 심하다느니 하는 뉴스는 이제 전혀 뉴스로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 것쯤은 거리에 보이는 수많은 학원 간판들과 그 학원들이 접수해 갈 아이들의 ‘빈 시간’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짐작된다. 심지어 ‘놀게는 하되, 엄청 체계적으로 놀게 해준다’는 모토 앞세운 ‘놀이학원’까지 생겼으니 말 다했다. 머지않아 학원 다니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생겼다는 얘길 들어도 그닥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작년께 개봉했던 톰 크루즈 주연의 SF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다. <에일리언 2>를 필두로 <스타쉽 트루퍼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등의 영화들에서 이 설정 저 설정 요리조리 잘도 빌려와 짬뽕져 어우러지게 했던 이 흥미진진한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뼈대는, 다들 아시다피 영화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다.

자, 여기에서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짤막한 브리핑 드리겠다. 주인공 ‘케이지’는 전투경험 한 번 없는 뺀질이 공보장교였지만, 장군님께 밉보여 일병으로 강등되는 바람에 외계벌레와의 총력전을 위한 상륙작전 실전에 투입된다. 그런데 그는 이 전투에서 특수한 외계벌레에게 죽임을 당한 뒤로 특수한 능력을 얻게 된다. 죽으면 다시 하루 전 아침으로 돌아가는 ‘시간리셋’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덕분에 케이지는 인류의 사활을 건 일전이 벌어진 바로 그 하루를 수십, 수백 번씩 반복하면서 그야말로 시행착오법과 소거법을 통해 이 전쟁을 승리로 끝낼 해법에 점점 접근해 가는데… 이하 생략.

보시다시피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죽으면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라는 설정은 왕년의 컴퓨터 게임, 그것도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고 하던 오락실 게임(또는 ‘아케이드 게임’)에서 따온 것이다. 게임이 중단된 곳에서 세이브를 하고 언제든 다시 그 부분을 불러올 수 있는 요즘의 컴퓨터게임과는 달리, 왕년의 오락실 게임은 동전을 넣고 ‘Game Start’ 버튼을 누르면 에누리 없이 게임 맨 처음 부분으로 돌아갔다. 즉, 플레이어는 언제나 게임의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따라서 당연히도 가본 적 없는 ‘스테이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미 거의 암기하다시피 해버린 앞 스테이지를 기계적으로 단순 반복해야 했는데, 어쩌다 방심한 나머지 실수라도 해서 게임오버가 돼버리면 또다시 동전을 넣고 처음부터 또다시 게임을 시작하고, 시작하고, 또 시작하고 등등….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중노동을 왜 내 돈 주고 사서 했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당시엔 고수가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기 주변엔 구름 같은(이라는 건 비좁아터진 오락실에선 좀 과장일지 모르겠으나) 관중들이 몰려들곤 했다. 나 역시 까치발로 그 크지도 않은 게임 화면을 열심히도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게임실력 및 경제력으로는 가볼 날이 요원하거나 아예 가볼 수 없는 스테이지를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으므로.

아이들 무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아무튼.

<엣지 오브…>의 이야기 구조도 이와 완전히 동일하다. 다만 오락실 게임과 다른 점은 영화의 주인공 ‘케이지’는 게임기에 동전을 넣는 대신 죽음을 당함으로써 게임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뿐이다. 덕분에 ‘케이지’는 ‘망치면 아예 죽고 처음부터 다시’를 거의 아무런 부담도 없이 무한반복하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소싯적 빵집 아들, 중국집 아들과 함께 가장 부러워했던 인물 중 하나였던 ‘오락실집 아들’의 게임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게임을 하다 좀 망쳤다 싶으면 아예 게임기 전원을 껐다 켜서 게임을 새로 시작해버리는 그 놀라운 사치…. 아아, 지금 생각해도 부럽다.

아무튼 그런 ‘불사신’ 케이지에게도 마침내 동전이 떨어지는(즉, 죽으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심판의 날은 오고, 천신만고 끝에 결국 케이지는 할리우드 주인공답게 ‘외계벌레 대 인간’이라는 게임을 완전 클리어하는 데 성공한다. <엣지 오브…> 개봉 당시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해석’이 분분했는데, 거기에 뭔 해석씩이나. 그건 그냥 게임을 완전히 클리어 한 플레이어에게 포상 차원으로 주어지는 해피엔딩 화면인 것이다.

그런데, 대체 영화얘기는 난데없이 왜?

요점은 과거 수많은 학부모들로부터 제지당하고 금기시되었던 오락실 게임의 경험이 20-30년 뒤 엄청난 예산 투입된 전지구적 규모의 SF영화의 중추적 세계관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 모습 보며 새삼 생각한다. 어린 시절 ‘그냥 노는 시간’의 중요함을. 그 안 체계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이 품고 있을지도 모를 엄청난 미래를. 비록 어른들 눈에는 허송세월 같아 보이고 못마땅해 보일지라도, 그 자유로운 공백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얼마 전 세계교육포럼인가 뭔가에서 ‘자뻑’과 자화자찬에 여념 없던 한국정부에 대해 비판 발언을 한 시민단체 대표와 그녀에게 발언권조차 주지 않던 주최 측의 한심한 ‘꼬라지’가 화제에 올랐더랬는데, 이를 보며 나는 멍청한 고집불통 꼰대의 전형인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장군을 자동적으로 떠올렸다. 내일 당장 전 인류에게 닥칠 종말을 전혀 상상조차 못한 채, 주인공의 경고에 귀를 꼭꼭 닫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공격해 잡아들이기까지 했던 그 꼰대 장군 말이다.

우리가 앞뒤물불 안 가리는 돈벌이와 ‘국가경쟁력 몇 위’ 따위의 공허한 숫자놀음을 위해 우리의 투모로우, 즉 아이들이 하는 무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맞을 투모로우는 덜렁 이 한마디 아로새겨진 검은 화면뿐이다.

‘Game Over’

<한동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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