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 <향수로 글을 쓰는 남자>

2015. 5. 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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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나는 향수로 글을 쓴다(Journal d'un parfumeur)>는 '향이 단어라면, 향수는 문학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에르메스가 자랑하는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 그가 생애 최초로 한국을 찾았다.

후각은 다른 감각 못지않게 매우 민감하다. 어느 공간에서 맡은 향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하며 오래전 입던 옷에 묻어 있는 체취로 누군가를 기억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감각임에는 틀림이 없을 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냄새' 그리고 '향'에 익숙해져 있다.

'향'이라는 키워드를 꺼내는 순간, 우리는 이 인물을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에르메스가 자랑하는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이다. 혹자는 그를 두고 '향의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조향사란 직업은 우리에게 조금 낯선 직종이지만 향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시슬리의 '오 드 깡빠뉴', 이브 생로랑의 '인 러브 어게인', 불가리의 '오 빠르퓨메 오 떼베르', 까르띠에의 '데끌라라시옹', 에르메스의 '자르뎅' '쥬르 데르메스' 등 세계를 비롯하여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들의 시그너처 향 중 상당수가 그의 코끝을 거쳐 탄생했다.

유명한 향수와 조향사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엘레나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향수에 애정을 품게 만든다. 그는 종종 자신을 일컬어 '향의 예술가'라 일컬으며 자신과 향수는 한 몸이라고 말했다.

그는 1947년 프랑스 남부 향수의 본고장, 그라스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바쳐 조향 일에 종사한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자연스레 이 길에 들어섰다. 완벽하게 그를 도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환경이었다.

"재능에 관해 묻는 거라면, 아니에요. 천부적 자질이나 타고난 장점을 묻는 거라면 더욱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요. 타고난 기질보다는 노력이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란 환경이 아무래도 향수에 관해 자연스레 배울 수 있는 동네였어요. 일부러 배우려고 한 건 아닌데도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했죠. 물론 조향사가 된 이후로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반복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저는 이 모든 것이 좋은 합으로 만나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조향은 오감 중 가장 본능적인 감각인 후각을 기반으로 구현된다. 과연 노력만으로 가능한 직업일까? 이 질문에 엘레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답했다.

"충분히 가능해요. 얼마든지 도전하세요. 다만 조향사가 된 뒤 이 세계에서 '얼마만큼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선 그 이후의 문제로 다가올 겁니다."

2004년 여름 에르메스는 그에게 하우스의 전속 조향사가 되어줄 것을 의뢰한다. 제의를 하고 승낙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파리의 에르메스 대표와 일 년 이상 지속적으로 향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 상대방의 노하우를 존중하며 창조성을 향한 공통의 의지를 확인한 것. 이들은 '에르메스'라는 브랜드에서 향수 분야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이며 어떤 향수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날이 갈수록 만남의 빈도는 높아졌고 대화는 깊어졌다.

"에르메스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요. 서로 완벽하게 공모하여 만든 연금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로 그들의 만남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순수함과 재료의 미학을 가장 중시하는 엘레나가 합류한 시점부터 에르메스 향수 역사의 새 장이 열렸다 해도 무방하다. 그가 지닌 자유로움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했다. 에르메스에서 뛰어난 장인 정신과 더불어 예술적 사명이 반영된 향수들이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향수에는 상상력과 관대함, 감각과 같은 것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향수가 단순한 제품, 대상, 상품으로 전락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거든요."

이 말에서 그가 만드는 향수에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원초적인 재료로 담겨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즐거움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감정이에요.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조향도 감각적인 즐거움을 나누기 위한 것이에요. 향수를 만들어내는 구성가로서 스스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대중에게도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즐거움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영감을 줍니다."

그는 덧붙여 이탈리아의 전통 시장에서 과일 향기를 맡으며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냄새는 할머니와 함께 꽃을 따는 일을 하며 맡았던 인부들의 땀내였다는 이야기도 했다. 소박한 품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스스로 '향을 훔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한다. "모든 것이 영감의 원천이에요." 향수의 주제는 어떤 물체를 재조명하면서 발견할 수도 있고 패브릭과 타르, 나무의 향이 주는 매력에서도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조향사는 향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경험하는 예상치 못한 영감이나 생각을 통해 창조적인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곧 길이 남을 유수의 컬렉션을 탄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중 '떼르 데르메스(Terre d'Hermes)'는 그의 명성을 견고하게 다져준 최고의 컬렉션으로 대지의 남성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전체적으로는 곧게 뻗은 나무의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가 낳은 수많은 라인업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얻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향수이기도 하다.

그가 작업할 때 일 순위로 경계하는 것은 '잘 팔릴 향수를 만드는 마케팅 차원의 전략'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상상력'과 '영감'에 집중한다. "향수는 생각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에요." 박하와 라벤더를 즐겨 사용하는 그이지만 사실 좋아하는 특정 원료는 없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각각의 재료가 단어가 되듯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여 무엇을 만들지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죠. 그렇지만 특별하게 선호하는 성분이나 원료가 있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하나의 향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것은 30가지의 재료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4백여 가지가 필요한 것도 있기에 애써 원료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최고의 조향사가 사용하는 향수는 무엇일까?

"사용하지 않아요.(웃음) 제가 향수를 사용하면 작업을 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요. 어떤 향도 없는 공간이 필수 조건이에요. 물론 일을 하지 않을 때 어떤 향수를 쓰는지 묻는 것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더욱이 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는 조향사의 일에 대해 대중에게 잘못 알려진 부분이나 선입견이 존재하는 현실을 의식한 듯, 향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원료를 조작하는 기술이 아닌 '창조적인 활동'이라고 말했다.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는 냄새와는 다르게 향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결코 우연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 그는 '철저하게 계산된 지적 활동을 통해 사람의 영혼과 감수성이 한데 결합되어 나온 창조물이 향'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미 몇 권의 저서를 냈지만 이번 <나는 향수로 글을 쓴다>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국내 팬들과는 처음 만났다.

"이 책을 쓰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렸습니다. 향을 만드는 일과 조향사의 세계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담았어요. 제가 이 책에 담고자 한 것은 향수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너저분하게 늘어놓는 설명이 아니에요. 향이라는 것은 제게 문학이자 일종의 소명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별개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둘은 예술이라는 정점에서 서로 만납니다. 향에 관한 제 경험과 감성을 최대한 진솔하게 담고자 애썼어요. 좀 더 넓은 향의 세계를 독자와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향수와 삶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이 책에 담백하게 담았다. 조향사가 되기까지의 열정과 그 과정 그리고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새로운 향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고민과 갈등, 향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오는 희열과 같은 감정들이 꾸미지 않은 날것으로 오롯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향사 엘레나뿐만 아니라 인간 엘레나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원서는 지난 2011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었고 이후 독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브라질, 폴란드, 중국, 대만, 일본에서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을 쓰면서 중심으로 삼았던 문장은 '향이 단어라면 향수는 문학이다'예요."

'향'이란 과연 몇 가지라고 셀 수 있는 개념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한 가지 색의 명도와 채도를 조절함으로써 무한대의 색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향도 가짓수가 무한대에 가깝다. 이 많은 향을 어떻게 구분해낼 수 있을까? 그는 향을 '공감각적 이미지'로 변화시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향수를 만들 때 자신이 처음 맡은 향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이미지'를 재현한다고. 향수는 금세 증발해버리는 휘발성 물질이 아닌,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생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문학'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조향을 글쓰기 작업에 비유하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혹자는 향을 만드는 작업을 요리에 비유하며 마법이라 칭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책 마지막 부분에는 후각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18가지 향의 배합이 등장한다. 가령 초콜릿 향이나 체리, 사과와 같은 향을 만드는 원료의 목록이 매우 잘 정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치 요리책의 레서피만큼 세세하며 친절하다.

"조향 작업에서 요리를 떠올릴 수 있다는 부분에는 동의해요. 맛을 느끼고 냄새를 맡는다는 건 모두 감각적인 부분이기에 분명 통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제가 조향을 요리보다 문학에 비유하기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요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좀 더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향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요리는 한 메뉴에서 대략 서너 가지 맛을 느낄 수 있지만 향수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죠.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어보자면, 요리는 이미 존재하는 원료를 취해 그것을 가지고 변형시키는 과정을 거치지만 향수는 순전히 화학적인 작용을 이용해 만듭니다. 조목조목 따지다 보니 조향과 요리의 다른 점이 제법 많다고 생각되네요."

그에게는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조향사'에 대해 듣고 싶었다.

"모든 사람이 혐오스러워하는 냄새조차 편안함과 안식을 줄 수 있는 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죠. 누구에게나 명확히 고약한 냄새라고 인식되는 것이 있어요. 이것을 명품 향수의 기본 재료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제가 인정하는 최고의 조향사예요. 저도 이런 작업에 큰 흥미를 갖고 있어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냄새나 저속하고 심지어 불쾌감마저 느끼게 하는 냄새들은 저에게 모험심을 불러일으키죠. 그런 냄새가 나는 종류로는 자작나무 진, 사향고양이, 오크나무 이끼, 라다넘 고무, 스카톨 등이 있습니다."

조향사로서 그의 최종 목표는 앞서 말한 독특하고 꺼려지는 냄새를 포함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냄새를 향수 작품으로 아름답게 변모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상적인 향수는 즉각적인 향이 느껴지고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살아 있는 듯 느껴져야 합니다. 몸에 지니는 장식품이 아니고 '감정'으로 존재하는 것, 향수는 모든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마법의 약 같은 존재죠."

그는 한국에 온 지 3일째라고 했다. 이튿날이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촘촘히 짜인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첫날보다 긴장이 풀어졌고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이제야 적응이 된 것 같다며 농을 건넸다. 오기 전에는 아는 것이 많지 않던 동양의 나라. 짧은 일정이지만 한국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 박물관을 들렀고 재래시장을 찾았다.

그와의 대화에서 유독 많이 등장한 낱말은 '상상력'과 '영감'이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그에게서 문득 호기심 많은 소년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가 만들어내는 향수처럼 부드럽고 반짝이는 장인은 그렇게 '문학과 같은 시간'을 선물하고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엔 향이 남았다.

기획_하은정 기자 | 취재_ 박지현 객원기자 | 사진_이진하, 에르메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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