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힐조가 순 우리말이라고?

2015. 4. 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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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말글바다] <156> 라온은 즐거운, 힐조(詰朝)는 이른 아침

[미디어오늘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말글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 뜻밖에 이런 문장을 만났다.

<'라온힐조'란 즐거운 이른 아침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머니투데이 2015년 3월 27일)

그 데이터베이스에는 최근까지 모두 80여건의 기사(뉴스)에 '라온힐조'라는 말이 포함돼 있고, 위의 문장처럼 거의 예외 없이 '라온힐조'가 무슨 뜻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그 말 앞에 달고 있다. 통합검색의 결과에는 엄청나게 많은 '라온힐조'들이 비슷한 설명과 함께 이미 만발해 있다.

말글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인 필자 같은 사람은 모르는 말이 나오면 바짝 긴장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와 뜻의 순우리말이라니. 우리 고유어(固有語) 즉 토박이말이라는데, 이걸 왜 아직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이 말 뜯어보니 아무래도 라온과 힐조의 합성인 것 같고, 힐조라는 말은 경험상 한자어일 가능성이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어본 말 같기도 했다. 사전을 확인했다. 힐조는 '이른 아침' 또는 '이튿날의 이른 아침'이라는 뜻의 한자어 詰朝였다.

그 신문에 따르면 라온은 '즐거운'이란 뜻이어야 한다. 어떤 사전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참 걸려 국어학 전공 고(故) 남광우 교수(1920~1997)가 편집한 '고어사전'에 라온이 '즐거운'을 뜻하는 옛말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범죄의 핵심을 짚어내는 프로파일러처럼 문제점을 들여다 본 것이다. '라온=즐거운'으로 결론짓거나 일반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라'가 바다의 순우리말이라는 황당하고 근거 없는 억지가 인터넷을 달궜던 몇 해 전 사태와는 달리, 이 말은 꽤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느낌도 좋으니, 오늘날에 살려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두 단어의 합성어인 라온힐조를 '순우리말'이라고 규정한 대목에 모아진다. 힐조는 국어사전과 한자사전에 모두 나오는 한자어다.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말을 떠올려 유행의 선반에 얹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이 잘못된 글 때문에 많은 사람(독자)들이 결과적으로 우리말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셈이다.

<스팽글이 장식된 화이트 튜브톱 상의와 … 스타일링에 위트를 더하며 상반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즐거운 이른 아침이라는 뜻이 내포된 라온힐조 콘셉트의 두 번째 콘셉트는…>

어떤 화보집의 패션기사 일부다. 난해한 외국어 용어 범벅인 이 글에 이어 몇 개 신문에 비슷한 문구가 포함된 기사가 실리더니 올해 1월 20일자부터는 날마다 [머투의 라온힐조]라는 시리즈 제목의 연재물이 인터넷에 뜨고 있다. 그 기사에는 어김없이 <'라온힐조'란 즐거운 이른 아침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고.

새롭게 보는 말 '라온힐조'의 생성 경로(經路)와 그 말이 최근에 이르러 '이러저러한 뜻의 순우리말'이라는 비뚤어진 모자를 쓰게 된 경위(經緯)를 추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라온 힐조'라고 떼어 쓰고 '즐거운 이른 아침이라는 뜻'이라고 풀어준다면 완전한 쓰임새일 것이다.

'순우리말'이라는 잘못된 설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라온힐조라는 4음절 말을 우리 토박이말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시리즈 기사, 수정하고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면 독자들도 여전히 좋아할 것 같다.

▲ 강상헌 언론인·(사)우리글진흥원장

< 토/막/새/김 >따져 나무란다는 힐책(詰責)처럼 詰은 따지다, 꾸짖는다는 뜻이다. 이 뜻으로는 힐조(詰朝)가 '이른 아침'이라는 사실을 유추하기 어렵다. 어떤 한자사전은 우리가 흔히 '쌍길(雙吉) 철'이라고 부르는 철(喆)자와 詰의 모양이 비슷해 생긴 와전(訛傳)일 수 있다고 했다. 喆은 철학의 밝을 철(哲)과 같은 글자다. 哲은 새벽의 뜻도 있는 밝을 명(明)자와도 의미상으로 통한다. 詰朝는 명(明)-철(哲)-철(喆)-힐(詰)의 의미의 흐름이 빚은 우연의 단어일까? 강한 추측일 뿐, 정설은 아니다. 한자의 이해는 때로 수사관의 추리력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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